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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스쳐지나가는 우연한 삶, <홍이>

30대 후반의 여성 홍이(장선)는 빚더미에 앉자 목돈을 가진 엄마 서희(변중희)를 요양병원에서 퇴원시켜 집으로 데려온다. 치매 초기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엄마 서희와 특별히 살갑거나 끈끈하지 않은 홍이의 갑작스러운 동거는 얼핏 평범한 시작으로 보인다. 그러나 홍이는 서희가 보관해 달라고 내민 통장에 몰래 손을 대어 빚을 갚고, 데이트할 때 입을 옷을 쇼핑하는 데 금세 써버리고 만다. 낮에는 해주 이모에게 엄마를 맡기고 강사와 건설 현장 요원을 오가며 돈을 버는 홍이의 생활은 단조롭다가도 격정이 치솟는다. 나이 들어 아픈 서희는 연약하기보다 억척스러워 소란을 일으킨다. 틈만 나면 불러내 빚을 독촉하는 과거의 남자에게 홍이는 되도록 뻔뻔하게 버티고, 자신의 실체를 모르는 데이트 상대 앞에서는 끝내 거짓된 모습으로 자신을 감춘다. 그러는 사이 서희를 돌봐주던 해주 이모와 끝내 사이가 틀어지고 엄마의 치매 증세는 홍이가 감당할 수 있는 날들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한다. 단편 <좋은날> <자유로> 등을 연출한 황슬기 감독의 첫 번째 장편 <홍이>에서 화해하지 못한 과거를 묻어둔 채 마주 살아야 하는 모녀의 좁은 자취방 동거는 점차 반갑지 않은 시간이 된다. 영화는 홍이가 처한 상황에 구체적 서사를 덧붙이지 않으며 홍이라는 인물의 배경에 관해서도 설명하지 않는다. 엄마 서희와의 관계도,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아버지와의 가족사도 마찬가지다. 마치 길 위에서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의 삶을 우연히 목격하는 것처럼 홍이와 서희의 일상은 큰 서사적 굴곡 없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모녀 관계에서 흔히 떠올릴 법한 나긋한 다툼이나 화해 대신, 혈육과 생계가 무겁게 얹힌 모습이 <홍이>를 지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