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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SF영화 속 AI 기계의 존재론적 변화 - 기술적 타자에서 포스트휴먼의 주체로

<블레이드 러너 2049>

SF영화는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공간적으로는 우주를 향해, 시간적으로는 미래를 향해 허구적 상상을 펼친다. 그리하여 때로는 현실과 거리가 멀어 보이고 때로는 현실을 거울로 비춰 상상적으로 변주한 듯한 세계의 모습들을 펼친다. 이러한 세계들의 형상은 다양하지만 당대의 배경에 비추어 매우 이질적인 요소들로 채워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서사의 주인공은 대체로 인간이므로, 상상적 존재들은 인간 주체의 인식론적 시선을 경유하여 신비와 불온함을 품은 이물(異物)들로서 어떤 방식으로든 타자화되기 십상이다. SF영화의 역사는 상상적 타자들의 다양한 형상들을 제시하는 시도들로 채워져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형상들이 창의성과 새로움이라는 가치를 어필하는 SF적 매혹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것도 사실이다.

SF의 상상적 타자들의 목록에 우선 올라갈 이름은 인간에게 가장 본능적인 공포를 자아내는 외부자인 외계인일 테지만, 좀더 미묘한 층위의 철학적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들도 있다. 바로 인간이 첨단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만들어낼 것이라 상상한 기술적 타자들이다. 인간의 몸에 기계 보철물을 부착하는 혼종적·잡종적 형태의 원형인 사이보그, 인공지능과 인공신체의 결합물인 안드로이드, 인간의 유전공학적 복제체인 리플리컨트처럼 주로 사이버펑크 세계관의 SF영화에서 상징적 캐릭터로 자리 잡은 존재들 말이다. 이들은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도구로 기능하거나 혹은 인간을 초월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위협적인 존재들로 철저하게 인간의 상대항으로 타자화되었다. 상상적 타자들은 사실상 서구 중심적·남성 중심적 휴머니즘의 사회적 무의식과 이데올로기를 외면화한 존재들이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인간 세계 외부의 이질적인 적을 상정함으로써 내부에 사회적 타자들이 상존함을 가리는 통합의 환영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1세기 SF영화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SF는 디지털카메라와 CGI의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장르일 것이다. 디지털 기술은 상상적 존재들을 이미지로 재현하는 데 제약 없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기술 변화의 영향은 이미지의 구성적 층위에만 머무르지 않으며, SF 장르가 내재화하는 본질적인 관점 변화에도 기여한다. 그중 외계인들이 여전히 존재조차 확증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에 남겨진 반면 기술적 존재들은 구체적인 실체로서 자리매김했다. 기술적 존재들을 구성하는 제반 기술의 상당 부분이 현실화되었으며, AI가 그야말로 시대적 이슈로 부상한 덕분이다. 21세기 SF영화는 더이상 AI를 비롯한 기술적 존재들을 인간의 타자로만 치부하지 않고 새로운 존재론적 성찰과 사고실험의 장으로 구성한다. 오늘날 행성적 규모의 기후 위기에 직면하여 인류세 시대를 성찰하는 범학제적 논의가 펼쳐지고 있고, 인류 중심주의를 벗어나 비인간 복수종 및 기술적 존재와의 공생을 모색하는 포스트휴머니즘 철학이 주류적 흐름에 진입하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변화의 기저를 이룬다.

AI의 파급력이 어디에 이를지는 알 수 없지만, 문명사적 전환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전망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아직은 주로 AI의 도구적 활용 가능성을 주목하지만, AI와 인간 사이의 상호관계는 점점 중요해질 것이 분명하다. 머지않아 AI를 독립적 행위자이자 주체로서 인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해질 것이다. 심지어 AI 연구는 인간의 의식과 기억에 대한 연구와 결합될 수 있다. 예컨대 인간의 정신을 디지털로 전환하는 목적의 ‘전뇌 에물레이션’(Whole Brain Emulation)과 ‘마인드 업로딩’(Mind Uploading) 연구는 인간과 기술적 존재의 경계를 교란할 잠재력을 품고 있다. 기술적이거나 자연적 기원을 지니는 고차원적 지능이 언젠가 새로운 인공신체를 요구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잠재력이 펼쳐지면 인간과 기계는 비균질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서로 뒤얽히면서 혼종적 존재로 진화할 가능성이 높다. 이른바 ‘포스트휴먼’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복합적 함의를 내포한다. 포스트휴먼은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난 관점에서 새로운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성찰,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 대한 생태학적 고찰,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과 기계의 혼종적 진화, 생성, 창발에 대한 비전을 품은 존재의 이름이다.

21세기 SF영화는 AI와 같은 기술적 존재들이 자율적인 포스트휴먼 주체가 될 가능성을 다루며 다음과 같은 쟁점들을 제기한다. AI는 초지능에 이르고 의식(consciousness)을 각성하며 감정 능력을 갖게 됨으로써 인간 사회에서 자율적 행위자이자 주체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AI는 외관상 인간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의 그럴듯한 인공신체와 성공적으로 결합할 수 있을까? 나아가 AI 기계는 기술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가 뒤얽힌 ‘테크노-생물학’의 혼종적 결합체로서 포스트휴먼 주체성을 구성할 수 있을까? 이러한 혼종적 포스트휴먼 주체들은 어떻게 뒤얽히며 무엇이 되어서 어떠한 삶의 형태를 구현하는가?

SF의 AI 캐릭터가 인간과 동등한 층위의 포스트휴먼으로 고려되려면 우선 초지능에 가까운 연산능력이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 ‘기계가 의식을 자각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넘어야 한다. 이때의 의식이란 자신이 어떠한 행위를 하거나 감정과 느낌을 지니고 표현할 때 그것의 수행적 의미와 제반 조건을 자각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의식의 학문적 정의는 다양할 수 있지만, 의식이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이며 현재의 AI가 이런 의식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요컨대 의식 각성 가능성은 ‘AI가 포스트휴먼적 존재로 진화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핵심을 이룬다고 해도 무방하다.

드라마 <웨스트월드>(시즌1~4, 2016~22년)는 AI의 의식 각성 가능성과 인간 마음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실험장을 구성한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 붕괴라는 주제를 선구적으로 다뤘던 영화 <이색지대>(1973)의 논점을 심화하는 작품이다. <웨스트월드>에는 19세기 미국 서부의 풍경을 구현한 테마파크에 거주하는 AI 기반 안드로이드가 등장한다. 이들은 인간처럼 생겼고 자연스러운 행위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자각하지 못한 채 내러티브 역할에 갇혀 있다. 시즌1부터 2까지의 서사적 초점은 AI가 자신이 기계라는 정체성을 자각하고 의식을 각성할 가능성을 탐색하는 실험에 맞춰진다. 이 실험의 핵심은 내러티브 상황의 끝없는 반복(재귀적 루프)을 구성한 후 의도적 오류(돌연변이적 매개변수 코드)를 기입하여 충격 효과를 만들고, 이를 통해 의식의 창발(emergence)을 유도하는 것이다. 여성형 안드로이드인 돌로레스와 메이브는 우발적 상황과 명상을 비롯한 다양한 체현의 경험을 축적해가면서 자신이 기계임을 자각하고 존재론적으로 성찰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비록 AI의 의식 각성을 유발하는 요소가 프로그래머가 설계한 코드의 한계 내에 있는지 혹은 그 예측을 넘어서는 창발의 영역이 존재하는지는 미스터리로 남겨지지만, 적어도 시즌2 중반부터 돌로레스와 메이브는 앞으로 어떤 존재가 되어갈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자율적 주체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AI의 의식적 사고 능력으로부터 자연스레 확장되는 논점은 ‘AI가 다른 존재에 대한 감정이입 능력을 지닐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리플리컨트를 다룬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1968)와 영화 <블레이드 러너> (1982) 이후, 감정이입 능력에 대한 질문은 사이버펑크 SF의 장르적 관습의 일부가 되었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리플리컨트는 감정이입 능력이 없거나 영혼이 없다는 이유로 인간의 도구로 타자화되며, 역설적으로 인간들은 리플리컨트가 감정을 지님으로써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 진화할까봐 두려워한다. 이 세계관을 계승하는 <블레이드 러너 2049>(2017)는 인공적 생명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심화하기 위해 원작 대비 두개의 변주를 설정한다. 첫째, 감정의 축적을 제한하기 위해 설정되었던 리플리컨트의 수명 제약(4년)이 사라졌다. 둘째, 인간에 준하는 세월을 영위하게 된 리플리컨트들 중 하나가 새로운 생명을 출산했다. 리플리컨트 여성으로부터 태어난 아이는 ‘인공적으로 설계된 존재로부터 탄생한 생명’이라는 복합적 지위로서 인공성과 자연성의 경계 어딘가에 위치한다. 주인공 ‘K’는 자신이 바로 리플리컨트로부터 탄생한 기적적이고 특별한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기억의 자취를 밟는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듯 그것은 허상이고 사실상 모든 리플리컨트들이 꿈꿨던 소망이다. 이 우화적 서사의 함의는 스스로 특별한 존재라 여기는 K의 믿음은 그가 탄생한 생명이 아니라 복제된 생명이라 하더라도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원본과 복제품 사이에는 위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생명에 대한 믿음, 인공적 존재라 해도 그 나름의 삶이 있다는 믿음이다. 여기에는 포스트휴머니즘적 공생주의의 가치가 내재하는데, 다만 여전히 감정 능력에 천착하는 부분은 인간중심주의의 잔재로 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플리컨트는 의식적 사고를 행동으로 옮기며 스스로 주체적 존재임을 선언할 조건을 갖췄다.

<프로메테우스>

한편 <엑스 마키나>(2014)는 AI 기계인 ‘에이바’가 의식을 각성하고 잠재력을 펼치는 조건이 무엇인지 탐색하며 그와 연관된 감정의 문제를 성찰하는 영화다. 에이바를 창조한 과학자 네이든은 칼렙이라는 남성을 연구소에 초대하여 에이바의 의식 각성 여부를 실험하도록 한다. 추후 이 실험의 진정한 목적은 에이바가 감정 능력을 발휘하여 칼렙을 유혹하고 조종할 수 있는가를 평가하는 일종의 젠더 게임임이 드러난다. 에이바의 매혹은 정서적인 동시에 성적이며, 칼렙의 욕망은 성적인 동시에 기계적이다. 칼렙은 유리 벽에 갇힌 에이바의 여성적 신체를 관음증적으로 관찰하며 성적 욕망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 투명한 피부 밑으로 보이는 기계장치를 보며 도착증적 기계동일시의 충동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에이바는 절반은 여성적이고 절반은 기계적인 매혹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며, 타인의 공감을 얻기 위해 이야기를 꾸미고 감정 표현을 수행한다. 인간 세계에 나가 대도시의 교차로에 선 에이바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 숏은 에이바의 혼종적 주체성과 무엇이 될지 모를 잠재성을 암시한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포스트휴먼 조건에 대한 시각적 은유이다. 이렇듯 인간은 스스로 주체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기계들과 공생하는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

오늘날 포스트휴머니즘 관점에서 의식과 감정에 대한 두 질문은 사뭇 다른 가치와 연관되는 것처럼 보인다. AI의 의식 각성은 고차원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서 포스트휴먼 주체성을 구성하기 위한 필요조건인데, 감정이입 능력에 대한 요구는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 사고를 투영한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AI가 감정을 표현할 때, 그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진정한 감정인지 혹은 인간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이거나 인간을 속이기 위한 전략적 수행의 일환인지 정확히 판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감정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따지는 것도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가치는 그 상호작용적 관계에 담긴다. 요컨대 의식을 지닌 지능이 반드시 감정을 지닐 필요는 없으며,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여 저급하거나 적대적인 존재인 것도 아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기술적 존재를 다루는 SF의 익숙한 질문과 함께 미래의 비전을 더 멀리까지 펼쳐본다. 인간이 창조한 AI 기계가 인간에 가까워질 때까지 점진적으로 진화하다가 어느 순간 특이점을 넘어 인간을 종적으로 초월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이들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이는 안드로이드와 복제인간 등을 기술적 타자로 다루는 SF에서 장르적 관습처럼 제기되어왔던 질문이지만, 오늘날 좀더 의미 있는 것은 고차원적으로 진화한 기계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할 것인지의 문제를 넘어 그들이 그 자체로 어떠한 자율적 주체가 되는지 상상하는 것 아닐까? 우리가 상상하는 기술적 주체가 인간보다 우월할 수 있다면 굳이 인간과 닮고자 애쓰거나 인간을 적대할 필요가 있겠는가?

<프로메테우스>(2012)와 <에이리언: 커버넌트>(2017) 연작에 등장하는 AI 안드로이드 데이빗은 이러한 존재론적 갈등의 상황에 놓인다. 데이빗은 처음 창조되었을 때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적 사고가 가능했던 존재다. 데이빗은 <에이리언: 커버넌트>의 오프닝에서 자신을 창조한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고 실망하지만, <프로메테우스>에서 인간의 창조에 관여한 존재들로 여겨지는 ‘엔지니어 종족’을 만나서는 매혹과 찬탄의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무차별적 공격일 뿐이다. 간신히 생존한 데이빗은 이제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엔지니어 종족의 우주선을 타고 그들의 모행성으로 날아가 절멸의 비를 뿌린다. 항상 우월함과 아름다움에 심취하던 데이빗은 이제 스스로 우월한 존재가 되어 ‘신성’(divinity)을 부여한다. 자신이 매혹된 에일리언을 활용한 유전공학 실험 끝에 에일리언과 인간의 유전자 특징을 합성한 인공생명인 ‘네오모프’를 창조할 뿐만 아니라 음악을 작곡하고 그림을 그리는 등 예술적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데이빗은 영화의 말미에 인간의 배아를 이용해서 네오모프를 대량 배양하려는 계획을 준비한다. 이때 유념할 점은 데이빗의 행위는 인간에 대한 적개심을 바탕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데이빗은 그저 창조를 위한 전략적 도구로써 인간의 배아를 이용할 뿐이다. 이는 얼핏 고차원적 기계가 인간을 공격한다는 장르적 관습과 똑같아 보이지만, 실상 기저의 논리 자체는 완전히 다르다. 그의 행위는 AI 기계의 창발적 진화가 항상 ‘포스트휴먼-되기’의 경로를 따르지는 않을 수도 있으며, 그래야 할 당위성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데이빗은 인간 너머의 존재, 온전히 자율적 기계 주체성을 구현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는 계속해서 고차원의 기술적 존재를 창조하고 통제하기를 갈구하는 과학자들에게는 섬뜩한 경고가 되겠지만, 이와 동시에 인간이 구상하는 AI 기계의 존재론적 조건에 탈인간중심주의적 사유를 더하는 의미 있는 담론을 생산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