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신록의 정화의 순간들] 흐물거리고 흘러넘치는 거대한 요괴의 몸뚱이

90살 넘은 어떤 할머니께서 접시에 담긴 홍시를 스푼으로 떠서 맛있게 드시며 ‘이런 귀한 건 없어서 못 먹어’ 하는 영상이 릴스에 떴다. 영상을 찍고 있는 딸이 지난해 가을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홍시를 올여름 날 더울 때 하나씩 꺼내드린 것인데, 홍시도, 할머니의 입 모양도, 얼굴도, 기분도, 영상을 찍는 딸의 목소리도, 영상을 보는 내 눈도 마음도 다 같이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받들어… 1인극이라는 바쁘고 중요한 일을 앞두고 릴스며 쇼츠를 평소보다 더 많이 본다. 주여. 릴스를 보더라도 연습실 바닥에 앉아 다리라도 찢으면서 보겠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그러다가 눈이 침침해지고 마음이 울적해지면, 급히 공연장으로 간다. 무대 위에 선 퍼포머의 몸을 보면서 ‘보디 더블링’이라도 하려는 것이다. 마침 연습실이 대학로여서 한성대입구역 근처에서 공연한 황수현 안무가의 <싱크 디 싱크>(sync de sync)를 보러 갔다.

<싱크 디 싱크>. 제공 황수현, 사진 박지선

두 무용수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무더기들이, 끌어당겨, 거부할 수, 없는, 형체들이, 산발적으로, 솟구치는, 덩어리들이, 미친 듯이, 떼로, 몰려드는, 기운들이, 갑자기…’라는 분절적인 말들을 마치 찬트처럼, 혹은 주문처럼 리드미컬하게 반복하며 서로를 향해 다가간다. 두 몸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더니 결국 정면으로 맞닿고 두 입술이 부딪힌다. 두 입술은 말을 멈추지 않고 서로 밀착한 채 맞닿은 서로의 입안으로 계속 말을 던져넣는다. 와중에 두 몸은 여전히 서로를 향해 거리를 좁히려던 욕망을 계속 유지하고 있어서 두 몸과 입술은 서로 덩어리져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서로 막힌 두 입술 사이에서 말은 더이상 말의 꼴을 갖추지 못하고 읍읍 소리가 됐다가 이내 쯥쯥 쪽쪽 삑삑 소리로 전환된다. 두 무용수는 말하기 근육에서 입술 흡착하기 근육 혹은 소리내기 근육으로 움직임과 감각의 집중을 집요하게 옮겨간다. 단어는 소리로 숨으로 움직임으로 전환되고 말하기는 키스하기로 이행된 듯 보이지만, 말도 키스도 사회적인 의미 이전의 움직임의 감각과 힘을 여전히 잃지 않고 있으므로 의미나 스토리, 감정으로 완전히 이행되거나 포섭되지 않는다. 그 장면은 어떤 면에서는 키스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여전히 입술 빨아당기기라는 움직임이거나 쯥쪽삑 소리내기인 것이다.

감각의 전환 혹은 행위의 이행은 매끄럽고 유려하기보다는 오히려 부르트고 찢어지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서로 막힌 상대의 입안으로 말을 던져넣다가 정말로 정말로 더이상 조음이 안되고 숨이 막히는 순간에야 움직거리는 입술과 혀와 목구멍으로 집중이 옮겨간다. 그리고 그 움직거림을 끝까지 밀어붙이다가 삑삑거리고 쯥쯥거리는 소리가 나오면 그제야 그 소리를 수용하고 그것으로 집중을 옮겨간다. 다음이 이전을 찢고 들이닥치는 형국이다. 사실 이미 연습을 통해 다음이 올 것을 알고 있음에도 두 무용수는 끝까지 버티다 버티다 다음이 진짜로 틈입하고 나서야 지금 막 침범한 낯선 감각을 수용하고 실시간의 탐색에 나선다.

스코어는 이미 예비한 것임에도 그 수행은 예비되지 않은 방식으로 일어나기를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 그 일이 진짜로 닥치고 나서야 다음으로 옮겨가는 버티기의 힘이랄까? 예비했으나 예비되지 않은, 그럼으로써 살아 있는 가능성의 순간을 계속해서 열어젖히려는 시도는, 수행을 기반으로 한 예술가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붙잡으려는 핵심이 아닐까. 물론 자기만의 방법론은 모두 다르겠지만.

이 버티기에 비견할 만한 나의 방법론은 뭘까 떠올려보니 어느 철학 논문에서 읽은 ‘의지는 욕망의 경합’이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욕망은 사람만 갖는 것이 아니고 사물도 사상도 근육도 소리도 공기도 기억도 생각도, 즉 존재하거나 일어나는 유무형의 모든 것은 스스로의 행위를 지속하려는, 혹은 자신의 특성을 발현하려는 욕망을 갖는다. 이런 의미라면 욕망을 ‘힘’으로 대체해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다.

예를 들면 지금 노트북 옆에는 토마토바질에이드가 담긴 투명 유리잔이 놓여 있다. 컵 안의 얼음은 녹아내리려는 욕망을, 나는 계속해서 키보드를 두드리려는 욕망을, 노트북 스크린에 타이핑되고 있는 활자들과 나의 생각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단어와 문장을 이어가려는 욕망을 경합하고 있다. 얼음이 너무 녹으면 에이드가 너무 희석될 테니 시간에 대한 감각 혹은 관념이 개입하고 밍밍한 에이드가 얼마나 맛이 없는지를 아는 나의 기억이 개입해 글쓰기를 잠깐 멈추고 컵을 들어 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나의 눈동자와 뇌는 여전히 타이핑되고 있던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어 있고, 다음 문장으로 생각을 이어간다. 여기에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주변 다른 손님들의 대화 소리는 공기를 진동시켜 내 고막을 울리려는 욕망, 즉 힘을 갖고 있고, 나의 뇌는 비교적 균일한 에너지와 주파수로 반복되는 이 소리를 백색소음으로 인식하려고 힘을 쓴다. 덕분에 나는 집중력이 높아지고 이 단어를 적어넣고 싶다. 땡큐. 방금 내가 앉은 바 테이블 통창 너머로 택시가 불법 유턴을 한다. 저 택시의 혹은 택시 기사의 불법 유턴 욕망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 글쓰기를 뚫고 한 문장을 차지하고야 만다.

욕망은 실시간으로 서로 부딪히고 밀어붙이면서 예상치 못한 길을 내며 서로를 엎치고 밀치며 나아간다. 그러므로 이 순간에 관여하고 있는, 될 수 있으면 많은 행위자의 욕망을 서로 경합시키는 것이 연기의 역동과 밀도와 돌발성을 만들어낸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럴 때 행위자들은 울퉁불퉁하게 서로 머리를 들이밀며 거대한 몸집으로 연결된다고 믿는다. 연결은 1:1로, 직선적으로, 안정적이고 논리적으로 일어나는 대신, 어떤 식의 동시다발적인 침범을 통해 서로를 먹어치우고 배설하고 죽이고 낳으며 부패하고 스미며 일어나는 것 같다. 마치 전장에서의 전투처럼.

과거 교회였던 곳을 공연장으로 개조한 TINC(This is Not A Church)는 관습적인 극장과는 달리 한쪽 벽면 전체에 걸쳐 있던 가슴 높이의 창문들을 그대로 살려놓은 것이 특징적이다. 저녁 7시에 시작된 공연은 일몰과 함께 어스름을 거쳐 어둠 속에서 끝이 났다. 무용수의 움직임과 소리와 말은 각자의 밀도로 존재하면서도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서로를 침범하고 서로로 이행되고 유동한다. 이전에는 목사님이 서 계셨을 단상과 그 단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객석 삼아 줄줄이 앉아 있던 관객들과 맞은편에 접이식 의자를 깔고 앉은(이전이었다면 신도들이 단상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을 자리에 앉은) 관객들이 가운데 두 무용수 너머로 서로를 바라본다. 공연 시작 전 서로를 훑어보고 지인에게 손 흔들던 사람들이 어스름을 거쳐 어둠이 찾아들 때쯤에는 피아를 구분할 수 없이 덩어리진 채 언덕처럼 산처럼 웅크리고 있다. 객석도 무대도 윤곽이 흐려진 채 뒤섞여 건물 전체가 하나의 흐물거리고 흘러내리는 거대한 몸뚱이처럼 느껴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나왔을 법한, 계속해서 주변을 집어삼켜 몸집이 커지고 모양이 변하면서 흘러내리며 이동하는 요괴의 몸뚱이처럼.

공연예술이든 영화예술이든, 한 공간에 일정 시간 동안 다른 사람과 함께 갇혀서 무엇인가를 체험하는 경험은 궁극적으로 이런 감각을 위한 것이 아닐까. 서로의 외피와 경계가 허물어지고 너와 나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 의미와 형식 사이, 안과 밖 사이의 경계가 흐물흐물해져서 결국 서로 이상한 뒤섞임을 경험하게 되는 그런 순간. 그런 순간을 나누고 싶어서 OTT가 활성화되고 모두가 바쁜 현대사회에서도 우리는 미리 티켓을 사서 시간에 맞춰 한자리에 모여 나가라고 할 때까지 버티고 앉아 있는 게 아닐까. 때로는 내가 왜 집에 안 있고 여기까지 와서 고작 이런 걸 보고 있나 싶다가도 운 좋으면 정말 내가 허물어지고 흐물거려져서 내 옆 사람 손을 다시 잡게 되는 그런 시간을, 내가 방금 본 이 아름다운 순간을 나 말고 또 어떤 사람들이 봤나 싶어 극장 안을 슥 둘러보게 되는 그런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어쩌면 축제나 박람회도 마찬가지 아닐까. 정해진 기간에 특정 공간이나 지역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 열기와 체취를 나누며 커다란 덩어리로 일렁이고 흘러내린다.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은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얼마 전 열린 군산북페어 2025도 성공적이었던 모양이다. 프리즈 서울에 들뜬 사람들이 삼성동으로 한남동으로 을지로로 삼청동으로 무리지어 흘러다닌다. 9월에는 다른 해보다 조금 빨리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도 열린다.

9월17일~26일, 부산국제영화제를 보러 국내외의 많은 영화인들, 언론인들, 관객들이 부산으로 모여들겠지. 나도 <프로젝트 Y>에 참여한 덕에 영화제에 초청받았다. 같은 날 서울에서 열리는 <문학주간2025 도움-닿기: 김명순의 첫 번째 100주년> 행사에서 시 낭독을 하기로 미리 약조한 바람에 개막식에는 참석을 못하지만 다음날 열리는 커비컬렉션 및 기타 행사 참석차 얼싸절싸 부산으로 향하게 됐다. 해운대와 남포동 일대에 모인 사람들이 극장 안팎에서, 영화 안팎에서 서로 흐물흐물 뒤섞이며 거대한 요괴의 몸뚱이로 걸어다니겠지. 걸어다니는 곳마다 더 많은 주변을 삼키고 몸집은 더 커지고 더 흐물흐물해지고 더 흘러내리고 결국엔 흘러넘쳐서 서울 극장에도 더 많은 관객들이 찾아들겠지.

<프리마 파시>. 제공 쇼노트

위 몇 단락을 쓰는 동안 시간은 2주 넘게 흘러 나는 무사히 <프리마 파시> 첫 공연을 올렸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나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격파해내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까지 가보고 싶었다. 그럴 때라야 무대와 객석이, 텍스트와 현실이, 너와 내가 서로를 찢고 침범해서 극장 전체가, 공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연결의 전장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20여회의 공연이 남았고 나는 정말로 그런 세계를 만나고 싶다. 우리가 흐물흐물 뒤엉키고 뒤섞이는, 이야기 너머로 극장 너머로 나 너머로 녹아내리고 흘러넘치는 그런 세계를.

9월 한달, 여기저기서 이렇게 저렇게 당신들과 뒤섞일 생각에 벅차고 설렌다. <씨네21> 독자 여러분, 우리 어디선가 곧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