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후 복길의 K팝 강연도 있사오니 청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메일을 확인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강연이라뇨? 분명 무언가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자리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요, 그런 애매함을 설명하느니 강연(의 일종…)으로 얼버무리는 게 나았겠죠. 그런데 ‘행사 후’는 뭔가요? 저는 제가 참여하는 것이 행사 그 자체인 줄 알았는데요? 왜 축하공연처럼 알리는 거죠? 아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이름 뒤에 작가나 선생님 같은 직함이 붙어 있는데, 전 그냥 ‘복길’인 거예요? “행사 후 복길의 K팝 강연”이라니… 너무 허접해 보이고… 또 너무 특별해 보여요….
“어머, 그런데 선생님은 어떤 분이신 거죠? 저희 직원이 설명했는데 저는 잘 와닿지 않아서요.” 행사 장소에 도착하니 나를 섭외한 담당자는 어김없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벌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익숙하게 나를 알 리 없는 책임자에게 나도 모르는 나의 정체를 설명하고, 돌아오는 그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씹어 삼키며 고통을 견뎠다. 가시방석에 앉으니 언젠가 한 축제에서 만났던 ‘높으신 분’의 농담이 떠올랐다. “당신은 대체 누구지? 당신보다 내가 더 유명할 것 같은데!”
행사 직전에야 겨우 만날 수 있었던 담당자는 가쁜 숨을 고르며 “너무 불편한 주제를 다루진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암요. 청년은 푸르고, K팝은 반짝이니 쾌청한 이야기를 하는 게 순리지요. 그러나 내가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을 행사장 컴퓨터에 연결하니 “K팝은 왜 불편할까?”라는 제목이 너무도 선명히 보이지 않겠는가? 강연까지 남은 시간은 단 5분, 말벌 같던 담당자의 몸이 굳었다. 나는 그에게 온 힘을 다해 평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K팝 얘기가 불편하면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K팝을 좋아하면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을 얘기해볼까요?” 결코 입을 떼지 않으리라는 비장한 적막에 낙담하고 있는데, 한 중년의 여성이 은인처럼 손을 들었다. “한글로 된 가사가 너무 없어요. 제목도 노래도 전부 영어예요.” 곁에 앉은 딸이 엄마의 어깨를 툭 치며 “엄마, 그런 불편함을 말하는 게 아니잖아” 하고 핀잔을 줬다. 그래서 나는 큰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런 불편함을 말하는 자리입니다! 영어 일색의 가사는 유의미한 트렌드이기도 하고, 오늘은 K팝의 사회적 문제를 얘기하는 자리가 아니니까 자유롭게 얘기해주세요. 바뀐 그룹의 컨셉과 최애가 어울리지 않아서 짜증난다, 내가 미는 커플의 리버스 팬덤이 짜증난다, 같은 것도 좋아요.” 물꼬를 트자, 기상천외한 불편 사항이 콸콸 쏟아졌다. 좋아하는 아이돌이 있는데 ‘라방’을 하면 외국인들의 채팅이 너무 많아서 그 아이가 슬퍼 보인다, 여자 아이돌을 좋아하는데 ‘남덕’들이 싫어서 서버를 분리하고 싶다, 사생활 논란이 많은 아이돌의 팬인데 그걸로 약점 잡히는 게 싫어 일코(일반인 코스프레) 중이다, 트로트 가수 정동원을 좋아하는데 정동원도 아이돌이라 할 수 있나, 그 애는 방송 댄스도 잘 추고…. 그만, 제발 그만!
강연은 어느덧 절반이 지나 ‘이미 엎질러진 물’ 상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게 다 무슨 소용인지, 하는 흐름에 도달했을 즈음 다시 질문과 답변 타임이 돌아왔다. 한 참가자가 오래 참았다는 얼굴로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좋아하는 아이돌이 소위 듣보잡… 그러니까… 너무 오래 무명이라 힘들어요.” 그리 심오한 고민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듣보잡’ 그 세 음절을 듣는 순간 얼어붙었다. 듣보잡.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스러운 것. 해외 K팝 팬덤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듣보돌’을 ‘누구’(NUGU)라고도 부릅니다. 음악평론가이자 DJ인 스큅은 그런 그룹을 조명하는 행사 ‘누구팔 루자’, ‘누구첼라’를 열고 있고…. 야, 복길 너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저 사람의 질문, 너라는 듣보잡, 너라는 ‘누구’에 대한 의문 제기잖아!
나는 빈 슬라이드를 열어 문장을 적어넣었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잡스러움. 테이스티의 <너 나 알아>라는 노래를 아세요? 테이스티는 대룡과 소룡이라는 이름을 가진 쌍둥이 형제였는데 저는 대룡을 좋아했어요. 당시 그 무대가 방송될 때 중계 커뮤니티엔 ‘니가 누군데ㅋㅋㅋ’라는 게시글이 도배되곤 했는데, 저는 ‘너 나 알아?’ 하는 구절만 반복되는 그 단순한 노래를 정말 좋아했어요. 밑도 끝도 없이 ‘너 나 알아?’ 하고 시비를 거는 배포가 좋았거든요. 그들은 제발 자신을 알아달라고 해야 하는 신인인데도요. 그들은 데뷔 2년 만에 활동을 멈추고 고국으로 돌아갔어요. 그러니 테이스티는 듣보잡의 대명사, <너 나 알아>는 듣보잡의 주제가 같은 것이죠. 그들의 활동을 ‘실패’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글쎄요. 저 역시 ‘듣보잡’인데, 무엇을 해야 성공이라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저리에서 시시한 성과를 내도 그것을 힘껏 긍정하는 것뿐이에요. 질문에 대한 답변도, 위로도 되지 않겠죠? 하지만 저는 지금도 종종 그들의 노래를 들어요. 그건 제게 아주 은밀한 프라이드를 만들어줘요. ‘듣보부심’이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