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1일 개막한 제2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SIWFF)가 7일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올해 영화제는 불법 계엄과 탄핵 정국에서 광장을 메운 한국 여성들의 목소리에서 출발해, 인도·필리핀·아프가니스탄 등 아시아영화계 여성들과의 연대를 모색하려는 기획이 특히 돋보였다. 다채로운 프로그램 가운데 올해의 핵심으로 소개된 특별전 ‘헬렌 리: 여기와 어딘가 사이’는 한국계 캐나다 감독 헬렌 리의 작품 세계를 조명했다. 캐나다와 한국을 오가며 35년간 활동해온 그는 총 12편의 장·단편을 통해 한국, 아시아, 디아스포라 여성들의 삶과 정체성을 탐구해왔다. 24일 열린 마스터클래스에서 헬렌 리는 5살에 한국을 떠난 뒤 모국과 다시 가까워지게 된 여정, 휴지기를 거치면서도 창작을 이어온 경험, 그리고 1세대 여성 교포 감독으로서의 이야기를 관객들과 나눴다.
단편 <샐리의 애교점>(1990)으로 데뷔해 장편 <우양의 간계> (2001)를 선보였고, 신작 <텐더니스>(2024)를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발표한 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찾은 헬렌 리 감독은 올해로 영화 나이 35년, 육체 나이 예순을 맞았다. 그는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아가씨 영화”와 “아줌마 영화”로 재치 있게 구분해 소개하며, 처음 그의 작품을 접한 관객들이 보다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안내했다. 전기(1990~2001) 작품들에서 서구 사회를 살아가는 아시아 여성의 몸과 기억, 섹슈얼리티를 전면적으로 탐구했던 그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10주년 기념작 <허즈 앳 래스트>(2008)를 기점으로 한국 사회와 역사에 보다 밀착한 후기 작업을 이어왔다. “보통 북미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 교포 감독들도 있지만 한국에 돌아와 10년 넘게 생활하기도 한” 그는, “문화적 또는 언어적인 고립 속에서도 교포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이해하려 애써왔다”고 자신의 여정을 설명했다.
이날 마스터클래스에는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참석하여 헬렌 리 감독과 “1997년 후쿠오카 아시아 영화제에서 만나 이어온 29년의 우정”을 돌아보기도 했다. 김 위원장이 “남북한의 현실을 체험적으로 다룬 영화”라 현장에서 평한 헬렌 리 감독의 최신작 <파리에서 평양까지>(2024)는 남로당원으로 전쟁 후 월북을 택한 외할머니를 한번도 만날 수 없었던 개인적 서사와 1958년 프랑스 실험영화 그룹의 북한영화 제작기를 교차한 에세이 필름이다. 감독은 연로한 어머니와 함께한 작업을 떠올리며 “한 사람의 사적인 역사를 돌아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불투명한 일인지 깨달았다”고 전했다. 또 다른 신작 <텐더니스>는 세월호 참사를 배경으로 2014년 서울에서 살아가는 한 부녀의 관계를 그린 작품이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 나 역시 참사를 멀리서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며, “그 경험이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 권력과 정부에 대한 불신 속에서도 어떻게 세상을 바꾸려 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영화제를 찾은 관객 테레사 가오는 “중국계 미국인인 내가 겪어온 소외와 배제의 경험이 영화에 담겨 있어 깊이 공감했다”며, “아시안 아메리칸 영화사에서 덜 알려진 이야기를 부각하는 동시에 로맨틱코미디 같은 장르 문법을 과감히 전복하는 그녀의 야심에 박수를 보내게 되었다”고 소감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