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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보는 순간 생기가 넘실대는 영화, <고백의 역사> 남궁선 감독

1998년 부산, 국민 영웅 골프선수와 이름이 같은 19살 세리(신은수)는 악성 곱슬머리를 쫙 펴고 짝사랑 상대 앞에 서고 싶다. 그가 택한 방법은 ‘서울 매직 스트레이트 펌’을 자신 있게 홍보하는 미용실 사장의 아들 윤석(공명)과 친해지는 것. 친구 찬스로 할인 혜택을 누리려는 세리와 콤플렉스마저 진취적으로 해결하려는 생기에 스며든 윤석은 동상이몽 <고백의 역사>를 쓰고 있다. 8월29일 넷플릭스에서 관객을 만난 이 영화에 “대책 없는 낙관성”을 불어넣은 이는 남궁선 감독이다. 계획 없이 임신한 여성이 보내는 <십개월의 미래>, 아이돌 그룹을 그만둔 동료들의 <힘을 낼 시간>을 지나온 그는 창작자로서 목말랐던 밝은 에너지를 세 번째 작품을 통해 수혈받았다며 세기말 고등학교에 다녀온 후일담을 들려줬다.

- 처음부터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전작들과 달리 <고백의 역사>는 지춘희, 왕두리 작가의 글을 본 후 감독으로 합류했다. 무엇에 끌렸나.

그동안 청춘의 난해한 문제들을 다뤄왔다. 특히 <힘을 낼 시간>을 위해 취재하는 동안 너무 울적해 다음에는 작가로서 즐겁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참에 <고백의 역사> 시나리오를 받았다. 원래 로맨스를 즐기는 편이 아니다. 딱 이 장르 하나만 잘 모르겠다고 여겨왔다. 그런데도 연출 제안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분이 좋아지더라. 이렇게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이야기가 지금 나에게, 어쩌면 관객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잊 고 지내온 기쁨을 다시 불러오고 싶은 마음으로 로맨스 공부를 시작했다.

- <고백의 역사>는 그중에서도 하이틴 로맨스다.

하이틴물은 내 길티 플레저 중 하나인데, 돌아보니 그게 다 미국영화였다. 동양 하이틴은 결이 좀 다르지 않나.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보다 에둘러가는 그 리듬을 배우려 했다. 아시아에서는 고백도 다르게 한다. 종이로 학과 학알을 접고, 러브장을 꾸미는 등 시대별로 유행한 고백 아이템이 있다. 내가 그런 걸 하면서 자라지 않아서 몰랐을 뿐 서브컬처로 불릴 만한 문화가 있는 거다! 전설이 된 장소에서 고백하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도 재밌어서 우리 영화에 차용했다.

- 세리는 하이틴 로맨스 여자주인공의 전형을 웃돌 만큼 씩씩하다. 감독의 눈에는 어떤 인물로 보 였나.

이미 행복한데 자기가 행복한지 잘 모르는 아이. 그와 대비되는 상황에 놓인 윤석의 눈에는 세리가 그런 아이라는 게 너무 잘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처음 이입한 인물도 윤석이었다. 윤석은 세리로 인해 치유되고 밝아지는 인물이라 정이 많이 갔다.

- 세리와 윤석을 묶어주는 공간으로 세리 아버지(류승수)의 아지트가 등장한다. <고백의 역사>를 포함해 헤테로 하이틴 로맨스의 여자주인공들은 대개 아빠와 사이가 좋은데, 그 이유를 고민해본 적 있나.

그게 현실감 있지 않나. 부모와 관계가 좋은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엄마는 딸을 걱정하는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딸을 바라보는 시선이 복잡해지고. 그런데 아빠는 철없고 낭만적인 태도만으로도 딸에게 ‘좋은 아버지’로 남을 수 있는 것 같다. 엄마도 그런 아빠와 티격태격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게 눈에 보이는, 이상적인 커플의 모습이 이 영화에 있었으면 했다.

- 신은수 배우는 어떻게 세리가 되었나.

은수 배우는 처연하고 성숙한 역할을 자주 맡았는데, 젊은 에너지도 가진 사람이다. 세리가 너무 자기 같아서 탐났다더라. 은수 배우도 세리처럼 속이 다 보인다. (웃음)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면이 세리의 직선성과도 굉장히 잘 어울렸다. 사투리라는 벽을 만났지만 전담 코치님과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처음에는 대사를 달달 외우더니 나중에는 규칙을 익혀서 새로운 대사에 바로 적용했고, 자기만의 표기법을 만들어 대본에 강세, 억양 표시를 빼곡히 해왔다. 그런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 세리와 친구들의 앙상블도 사랑스럽다. 특히 성래(윤상현)의 존재감이 상당하다.

학창 시절 우리가 봐온 친구들 무리의 느낌을 반영하고 싶었다. 여자애들과 잘 놀고 시끄러운 남자애, 연애에 참견하길 좋아하는 애, 체육 잘하는 애, 미술 잘하는 애가 꼭 한명씩 있지 않나. 영화에 다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우리끼리는 누가 누구와 더 친하게 지내는지까지 정했다. 성래를 연기한 윤상현 배우는 정말 얌전하다. 그런데 성래가 될 때면 접신한 것처럼 표정을 바꿔놓고 정작 촬영이 끝나면 기억을 못하더라. (웃음) 그런 순간들이 웃겨서 엔지가 많이 났다. 밤에 자려고 누웠다가 오늘 찍은 성래 컷이 떠올라 혼자 웃은 적도 많다.

- 학교생활의 귀여운 디테일들이 영화에 녹아든 덕에 인물들이 더 생동할 수 있었다. 학생들이 점심시간에 맞춰 지진에 가까운 진동을 일으키며 급식실로 돌진하는 장면이나 치열한 짝피구 시퀀스는 어떻게 탄생했나.

급식실 신은 시나리오에는 없었는데, 아주 좋아하는 장면이다. 내가 그렇게 뛰던 학생이었다. (웃음) 종이 치는 순간 1등으로 밥을 먹겠다고 뛰어나가는 그 에너지가 아시안 학생들만의 에너지 아닐까? 그리고 짝피구는 시나리오를 보기 전까지 그 존재조차 몰랐다. 여학생이 남학생 뒤에 숨어서 공을 피하는 것이 뭐가 설레는 건지 의문스럽기도 했다. 성역할을 부각하는 게 아닐지 고민스럽기도 했고. 하지만 사소한 시합을 죽고사는 문제로 대하는 아이들의 모습이야말로 정말 아이들답지 않나. 그 분위기를 살리는 것이 우리 영화만의 재미라고 믿었다. 80명이 이틀간 찍고 나니 배우들 얼굴이 다 짙게 익었다.

- <십개월의 미래>는 29살, <힘을 낼 시간>은 26살, <고백의 역사>는 19살로 남궁선 감독의 주인공이 점점 어려지고 있다. 다음 주인공은 몇 살일까.

내가 그리 성숙하지 않아서인지 주인공이 어려지고 있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여전히 10대, 20대만의 치기를 가졌으면서도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그러면서도 아직은 비겁하게 살고 싶지 않아 하는 인물들에 관심이 많다. 한편으로 <십개월의 미래>의 미래는 29살이어도 애 같았고, <힘을 낼 시간>의 친구들은 26살이어도 어른스러웠는데, <고백의 역사>에서야 19살다운 아이들을 그린 것 같아 기쁘다. 어쩐지 다음 작품의 주인공도 정신연령이 높지는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