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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눈을 감은 영화 - 21세기 영화의 얼굴 없는 자화상

두 번째 키워드 – 인간의 조건

<텐>

이란의 여성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마니아 아크바리는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텐>의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키아로스타미가 사망한 이후 그는 <텐>의 배급권을 보유한 배급사 MK2에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엔 아바스 키아로스타미가 <텐>을 연출하지 않았고, 시나리오를 쓰지도 않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아크바리는 <텐>에 사용된 장면은 모두 자신이 촬영한 것이며 이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기록된 영상이 아니라 심리치료사와 논의를 거쳐 녹화된 사적 프로젝트의 러시 필름이었다고 주장한다. 아크바리는 키아로스타미가 거짓말과 조작으로 자신의 영상을 훔치고 영상에 담긴 가족들의 민감한 사생활을 허락 없이 착취했음을 몇 차례에 걸쳐 폭로한다. <텐>을 편집하고 나서 완성본을 감상한 뒤에도 아크바리는 이 영화를 키아로스타미의 작업으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칸영화제 공식 상영 직전에 마니아 아크바리가 기억하는 키아로스타미의 말은 다음과 같다. “마니아, 이 영화는 픽션이야.” 그리고 <텐>은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연출작이자 21세기 디지털시네마의 태동기에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을 밝힌 영화사의 혁신으로 남았다.

아크바리의 진술에 따르면 <텐>은 현실의 기록을 착취해 픽션으로 구성한 결과물이다. 이 사실이 해명하기 어려운 문제를 산출한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영화가 촬영되는 현장에 존재하지 않았고 각 시퀀스 사이에 번호를 매겨 에피소드를 구분하는 것 말고는 이 영화의 화면과 구성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그 영화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이는 키아로스타미가 저지른 폭력과 착취를 외면하거나 비난하려는 판단이 아니다. 또한 <텐>이 함의하는 영화적 혁신과 성취를 일방적으로 옹호하거나 기각하려는 것도 아니다. 스크린을 바라보는 종족인 우리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대신 우리 눈앞에 도착한 21세기의 영화가 훨씬 모호하고 불투명한 사태로 뒤엉켜 있다는 조건을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 <텐>은 자동차 앞좌석에 설치한 두대의 소형 디지털카메라로 촬영된 열개의 시퀀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안에는 영화적 시공간과 카메라의 시점을 극도로 제한하고 통제했을 때 영화의 프레임 내부에서 벌어지는 놀랍도록 단순한 혁신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또한 공개를 염두에 두지 않은 한 여성감독과 가족의 사적인 기록 영상일 뿐이다. <텐>은 두 가지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 무작위적으로 녹화된 단순한 기록이지만, 특정한 규칙과 영화적 구성으로 조율된 픽션이다. 마리아 아크바리가 촬영한 영상이지만,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논리로 작동하고 편집된 영화다. 이 모든 진술은 서로 모순되는 부분적인 진실과 닿아 있다. <텐>에는 키아로스타미의 흔적이 없다. 그러나 <텐>은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이기도 하다.

디지털카메라와 그래픽이미지가 영화의 표면을 장악한 시대인 21세기에 영화적 이미지의 범주와 위상은 치명적으로 교란되고 있다. 이제 숏에 새겨지는 필름카메라의 사진적 재현, 연출자의 지시에 맞춰 활동하는 피사체와 세계, 인공 어둠이 드리운 극장에서 스크린을 향해 영사되는 이미지의 빛은 영화의 경험을 형성하는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다. 촬영과 상영은 어디에서든 편재적으로 발생하고, 이미지는 언제든지 변형되고 조작될 수 있다. 영화 이미지가 생산되고 거주하는 장소는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허구의 시공간을 전제하는 개별 숏의 물질성이 지극히 불확실한 표면으로 재편되면서 사진적 이미지와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경계 없이 뒤섞이고 촬영하는 자와 촬영되는 피사체의 명확한 위상은 흐트러진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불확실해진 대상은 카메라 뒤에서 프레임 안과 밖의 움직임을 통제하고 교정하던 영화감독의 존재다. 그들은 촬영 현장 한곳에 서서 컷이 시작하고 끝나는 지점을 표시하는 전능한 지휘자가 아니다. 어느 정도 농담 같은 면모가 섞여 있지만 <파이브>를 촬영하는 현장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자신은 잠을 잤을 뿐이라고 술회하며 “내 영화의 목표는 극장에 앉은 관객들을 잠들게 하는 것”이라 말하는 키아로스타미의 언급에는 영화를 촬영하는 현장에 입회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타인으로서의 연출자의 초상이 날카롭게 새겨져 있다. 영화는 연출자의 의도와 통제 바깥에서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며 만들어질 수 있다. 영화감독은 ‘자기’ 앞에 혹은 그들이 만든 영화 앞에서 타인이 된다.

장뤼크 고다르는 20세기의 끝자락인 1990년대를 통과하면서 두 가지 유형의 작업을 전개했다. 하나는 <영화의 역사(들)> <프랑스 영화 2X50>을 통해 영화의 역사적 시간을 투사하는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JLG/JLG: 고다르의 자화상>을 통해 고다르 자신의 자화상을 구성하는 작업이다. 그는 20세기 영화를 되돌아보면서 21세기의 영화가 역사적 멜랑콜리와 불투명한 자화상의 시대가 될 것을 예고한다. 고다르는 언제나 스크린에 펼쳐지는 영화적 자화상이 그것을 만들어낸 창작자보다 거대하다고 말한다. 그는 영화감독의 초상을 구체적으로 조각하지만, 스크린에 새겨진 자화상은 단순히 카메라 앞에 선 연출자의 얼굴을 왜곡 없이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 영화감독의 자화상이란 사각의 프레임과 스크린 위에서 다시 태어나는 또 다른 자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연출자’의 자아가 존재론적인 변형을 통과하는 동안 21세기 영화에서 재현되는 영화감독의 초상은 위태롭게 굴절되어간다. 다큐멘터리의 영역에서 아녜스 바르다의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이나 샹탈 아케르만의 <노 홈 무비>처럼 카메라, 스크린, 촬영 행위의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조건을 보다 자유로운 영화적 실천의 장소로 받아들여 연출자의 초상을 성찰적으로 재구성하는 소수의 작업이 출현하기도 했지만, 21세기에 나타난 대다수의 픽션에서 영화감독과 영화를 만드는 현장은 촬영 행위의 지연, 유예, 실패에 구속되어 있다. 일련의 영화들에서 그들의 행위는 희박하고 불안정하며 불확실하다. 고다르가 새로운 세기의 초입을 여는 시기에 만든 두편의 영화 <사랑의 찬가>와 <아워 뮤직>에서 영화를 준비하는 젊은 영화감독과 사라예보를 방문한 나이 든 감독은 협업을 계획한 여배우와 학생 영화감독의 자살 소식을 듣는다. 웨스 앤더슨의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에서 해양 다큐멘터리 감독인 스티브 지소는 결정적인 순간에 카메라를 놓치는 바람에 희귀한 상어의 모습을 담아내지 못했다. 데이비드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에서 촬영 중인 할리우드영화는 폴란드 단편영화의 리메이크로 밝혀지고, 원작의 두 주연배우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진다. 미겔 고메스의 <친애하는 8월>에서 고메스가 직접 연기한 영화감독과 그의 제작진은 그들이 계획한 거대한 규모의 극영화를 촬영할 수 없게 되면서 지역 주민들과 마을의 풍경을 다큐멘터리처럼 기록한다. 그들은 그들이 만들고 있는 영화에 설정한 권리와 규칙을 잃어버리고 만다.

21세기 영화 속 영화감독의 자화상은 얼굴 없는 자화상이다. 필름카메라의 촬영 현장과 영화감독이 한곳에 멈춰 서서 서로 굳건하게 결합된 채로 정박할 수 있었다면, 21세기의 스크린 위에 재구성되는 영화감독의 초상은 고정된 장소 없이 분열된 표상의 형식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감독이라는 존재는 실패의 기록과 불가능한 사태의 흔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 그 불투명한 자아에 관한 두편의 우화를 떠올려본다. 두편의 우화에서 얼굴을 잃어버린 영화감독은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한 배우의 얼굴을 바라본다. 벌거벗은 남자의 몸을 촬영한 흑백영화의 장면이 나타난다. 영화관의 관객은 모두 잠들어 있다. <홀리 모터스>의 도입부에서 이 영화의 연출자인 레오스 카락스는 배우로 출연해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극장으로 걸어간다. 잠든 관객 사이로 한 마리 개와 벌거벗은 갓난아이가 극장 안을 배회한다. 12년 만에 만든 장편영화로 21세기 영화의 영토에 진입한 레오스 카락스는 스크린에 떠오른 영화를 외면하고 잠들어 있는 관객을 불길하게 바라본다. 잠든 관객들은 깨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눈앞의 스크린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 도입부가 끝난 뒤에 <홀리 모터스>에는 아홉 가지 에피소드가 펼쳐지고 드니 라방의 얼굴과 신체를 매개로 아홉 가지 자아가 나타나고 사라진다. 분장실이 갖춰진 리무진이 멈춰 설 때마다 드니 라방은 다른 얼굴로 스크린에 나타난다. 그의 육체엔 서로 다른 분열적 자아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고 새겨져 있다. 이 무수한 초상의 여정은 끝나지 않고 반복될 것이다. 레오스 카락스는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고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자화상의 여정을 스크린에 옮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

또 다른 우화가 남아 있다. 이 우화에서 영화감독은 영화를 완성하지 못했다. 그는 오랜 친구를 배우로 선택해 영화를 만들었지만, 갑작스러운 배우의 실종으로 촬영을 마치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영화감독은 실종된 친구이자 배우를 되찾는다. 하지만 그는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다. 친구도 가족도 똑바로 기억하지 못한다. 빅토르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영화감독 미겔은 한 사람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 완성되지 못한 영화를 상영한다. 21세기에 도착한 20세기의 영화는, 감독과 배우의 잃어버린 기억과 정체성을 복원할 수 있을까?(빅토르 에리세는 디지털영화가 카메라 앞의 세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뒤에서 세계의 이미지를 바꾼다고 말한다.) 미겔의 친구이자 배우인 훌리오는 완성되지 못한 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을 향해 눈을 감는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필름의 시대에서 디지털영화의 시기로, 영화를 촬영하던 영화감독에서 영화를 완성하지 못한 영화감독으로 이미지는 전이된다. 다만 훌리오의 눈감은 얼굴은 그 사이에서 무엇도 바라보지 않고 어떤 진실도 드러내지 않는다. 미겔은 고개를 돌려 훌리오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가 마주하는 것은 두 시간 사이에 걸쳐 어느 쪽의 진실로도 치우치지 않는 지극히 투명하고도 모호한 거울로서의 얼굴이다.

영화평론가 세르주 다네는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과 <밤과 안개>가 포착한 2차 세계대전과 강제수용소의 시신을 스크린으로 지켜본 경험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시네필은 누구일까? 그는 헛되게 눈을 뜨고 있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자다.”(<영화가 보낸 그림엽서>) 20세기 모던 시네마에서 전쟁이 남긴 죽음은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고,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사태였지만 끝내 그 시신과 흔적이 필름카메라의 프레임에 담겼다. 자신이 태어난 해(1944년)에 전후 영화의 분기점인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역설하며 유년기의 삶과 현대영화의 역사를 병치하는 이 평론가에게 모던 시네마는 우리가 바라보지 못한 죽음을 응시하는 실천이다. 우리는 21세기 영화에 침입한 영화감독의 얼굴 없는 자화상을 마주하며 다네의 표현을 비틀어 인용하게 된다. 이 시대에 영화감독이란 누구일까? 그들은 눈을 감고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말하는 자들이다. 21세기 영화감독의 분열적 자화상을 증언하는 키아로스타미와 고다르와 카락스는 모두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마지막 장면처럼 이 모호한 얼굴들은 그 위상과 기원을 해명하지 않은 채로 영화의 두 번째 세기를 물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