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제목의 영화가 된 소설 <북샵>은 한 여자가 책방을 짓고, 지키는 이야기다. 그 끝에 공간과 함께 남은 것은 공간에 관한 말이다. “그 누구도 서점에서는 결코 외롭지 않다.” 작품을 매듭짓는 이 문장은 서울 중화동의 ‘시네필 책방’ 코프키노와 공명한다. 지난 1월 문을 연 이곳은 외롭고 싶지 않은 시네필들을 위한 자리를 표방하기 때문이다. 독일어로 머리(kopf)와 영화(kino)의 합성어인, 그래서 공상을 많이 하는 사람을 칭하기도 한다는 이름 아래 영화 서적 전문 서점과 출판사를 겸하는 이는 스물여덟 강탄우 대표다. 그는 지난 6월 말 세상에 나온 코프키노의 세 번째 책 <아트 호러: 아리 애스터와 로버트 에거스의 영화>를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나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이들을 모으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왕빙의 <사령혼>은 500여분에 달하는 대작이다. 8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에 두번의 인터미션이 딸려올 정도다. 그럼에도 올 초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이뤄진 <사령혼> 특별 상영회 티켓은 금세 매진되었다. 이날 고행을 자청한 동료 관객들을 위해 ‘당충전 이벤트’를 준비한 사람이 있다. 영화가 일시 정지될 때, 강탄우 코프키노 대표는 이제 막 시작하는 서점 겸 출판사를 홍보하기 위해 초코바를 나눴다. “마침 탄핵 정국이었다. 시위 현장에서 나눔 문화가 퍼지고 있다는 기사를 읽으며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상영회 이틀 전 인스타그램에 이 소식을 알리며 덧붙였다. “현재 중랑구에 오프라인 서점을 운영 중이며 시네마토그래프와 함께 <마티아스 피녜이로: 방랑하는 영화, 모험하는 영화>를 출간할 예정입니다.”
강탄우 대표가 코프키노를 구상한 건 지난해 여름이다. 대학 졸업 후 에무시네마에서 코디네이터로 일하던 그는 연말 계약 종료를 앞두고 있었다. “언젠가 다른 곳에 취직하더라도 한번쯤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어렴풋한 희망은 해방촌을 걸으며 형체를 갖췄다. “스토리지북앤필름, 풀무질 같은 독립 서점을 보며 우리 동네에도 이런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를 좋아하니 영화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공간이기를 바랐다.” 영화 책방이라는 아이템이 손에 잡히자 자연히 어떤 영화책이 필요한지에 관한 고민이 따라왔다. 고전과 거장을 다룬 서적은 많았지만 동시대 창작자들에의 안내서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해외에는 그런 책이 많던데 번역해 펴내면 나 같은 독자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당시 정성일 평론가의 저서 <나의 작가주의: 왕빙, 영화가 여기에 있다>가 온라인에서 펀딩을 받는 걸 지켜보며 용기를 얻었다. 왕빙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단 말이야? (웃음)” 코프키노가 마티아스 피녜이로를 탐구하는 원고를 엮은 첫 책에 이어 <사탄탱고: 벨라 타르에 들어가기 앞서> <아트 호러: 아리 애스터와 로버트 에거스의 영화>를 계획할 수 있었던 이유다. 초판으로 각각 400부, 500부, 700부를 찍어냈다. 다음 목표는 겨울이 오기 전에 크리스티안 페촐트 인터뷰집을 번역 출간하는 것. 2025년 1월 책방을 열고, 2월 첫 책을 내놓았으니 모든 게 반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좋은 관객’이 외롭지 않도록
강탄우 대표는 코로나19로 인해 영화와 진한 애착 관계를 형성했다고 한다. 군 입대를 석달 남겨두고 팬데믹이 번졌다. 여행은커녕 집 밖을 나서기도 힘든 상황에서 혼자 화면 속 세계를 들여다보는 날이 많아졌다. 가까운 극장에서 재개봉하는 명작들도 챙겨 봤다. “남들이 좋아하는 만큼 좋아하던 영화”라는 매체를 남다른 심경으로 대하게 이끈 작품은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내가 이전까지 봐온 영화에는 주인공이 될 법한 인물들이 주인공이었는데, <하나 그리고 둘>의 등장인물들은 너무 평범해서 충격받았다. 그럼에도 그 풍경이 아름다웠다. <하나 그리고 둘>에는 ‘영화가 탄생한 뒤로 인간의 수명이 3배 늘어났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영화를 본 사람은 자기 것 말고도 두배의 삶을 더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상하게 이 대사가 계속 떠올랐다. 그때부터 영화를 많이 찾아 보기 시작했다.”
강탄우 대표는 이를 “결정적인 만남”으로 여긴다. 청주에서 학교를 다녔고, 군 생활도 충북에서 마친 그가 서울행을 점치게 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공군으로 복무하는 도중 편입 시험을 대비했고, 제대 후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에 들어갔다. 여러 선택지들을 검토했지만 막연하게 끌리는 전공을 골랐다. “독일에 베를린국제영화제가 있으니까.” 다행히 전공 수업 중에는 유럽영화 전반을 다루는 과목도 있었다. 그는 고다르와 타르콥스키를 배우는 동안 비로소 편입하길 잘한 것 같다고 안도하며 웃었다. 방과 후에는 서울 전역의 독립예술영화관을 쏘다녔고, 마침내 에무시네마에서 파트타이머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영화의 서클 안으로 들어왔다는 느낌이었다.” 야외 상영을 기획하고, 작은 영화제도 꾸려보며 코디네이터로 진급까지 한 그는 비단 경력만을 쌓은 게 아니라고 회고했다. 만나고 싶었지만 만나지 못했던, 함께 영화 이야기를 나눌 존재들을 곁에 둘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이제 막 영화를 주제로 수다 떨 수 있는 친구들이 생긴 기분이었다. 사람이 모이려면 확실히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곳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해야 한다.” 코프키노가 ‘오프라인’을 지향해가며 소규모로나마 독서 모임을 여는 까닭이다.
강탄우 대표는 서울 이문동이나 회기동 같은 대학가에 책방을 열고 싶었지만 제한된 예산으로 인해 근처 중랑구로 터를 잡아야 했다. 주택가 골목은 고요한 편이지만 태릉시장 근방이라 활기가 깔려 있다. 그 기운을 받는 코프키노는 영화를 좋아하는 주민들과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커뮤니티로 자라나고 있다. 강탄우 대표는 “좋은 관객이 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책”들로 이 성장을 도모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에게 ‘좋은 관객’이란 “영화를 재밌게 보려는 사람”. “최근 개봉한 <미세리코르디아> 같은 영화도 겉으로 재미를 드러내는 영화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일정 수준의 소양을 갖추고 본다면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영화를 재밌게, 깊게 보려고 노력하는 관객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관객’이다.”
강탄우 대표도 한명의 ‘좋은 관객’으로서 코프키노를 지키고 있다. 그는 ‘좋은 관객’과 ‘좋은 관객이 되고 싶은 이’들을 모으는 일을 지속하고 싶을 뿐이다. “힙합 음악을 좋아하던 어린 시절부터 내가 듣는 음악을 공유하고 싶었다. 왜 내 주변에는 나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이 안 보일까 궁금했다. 그들과 만나고 싶다는 욕심이 오래전부터 컸다.” 대신 물질적인 압박이 느껴질 때는 태연하게 되뇌어본다. “지금 제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뿐이다. 언제든 다른 걸 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 ‘이거 아니면 안돼, 이거 아니면 죽어’라고 하는 순간 이 일을 사랑하지 못할 것 같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자세가 오히려 영화를 더 오래 깊이 사랑할 수 있는 방법 아닐까.” 수많은 영화인들에게 사인을 받은 애장품으로 채워진 공간에서, 그는 영원을 약속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명의 관객이자 독자로서 섣불리 영원을 기원해본다. 코프키노의 장수를 응원하는 것도 영화를 사랑하는 하나의 방식이니까.
책방이 있는 골목
중랑역 1번 출구에서 200여m를 걸으면 시네필 책방 코프키노가 보인다. 거기서부터 3분 거리에는 오래된 분식집이 있는데, 할머니 사장님의 얼굴을 간판에 내건 곳으로도 유명하다. 코프키노에 들른 다음 방송도 탄 적 있는 그 집 떡볶이 한 그릇을 비우고, 중랑양원미디어센터 내 극장 시네마노필에서 영화 한편을 감상하는 건 어떨까. 강탄우 대표가 제안하는 중랑구 시네필 투어 코스다
코프키노가 펴낸 책들
출판사 코프키노는 2025년 상반기에만 세권의 책을 내놓았다. 2월에는 <마티아스 피녜이로: 방랑하는 영화, 모험하는 영화>, 3월에는 <사탄탱고: 벨라 타르에 들어가기 앞서>를 시네마토그래프와 협업해 펴냈고, 6월에는 <아트 호러: 아리 애스터와 로버트 에거스의 영화>를 번역 출간했다. 강탄우 대표는 마티아스 피녜이로 감독이 주인공인 책에 그의 사인을 받았다. 표지를 채운 색과 같은 보랏빛 펜으로.
문학 서가 위의 탁구채
코프키노에는 영화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이라면 관심 가질 만한 문학작품을 모아둔 서가도 있다. 지역 주민들이 많이 찾았다는 한강 작가의 저서들도 거기에 있다. 그렇다면 책장 맨 위칸에 놓인 탁구채에 적힌 글자는 무엇일까. 정답은 <실종> 가타야마 신조 감독의 사인. 강탄우 대표가 감독의 사인을 받기 위해 챙겨 갔다는 탁구채는 <실종>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 이라면 끄덕일 수밖에 없는 물건이다.
강탄우 코프키노 대표가 여름휴가를 떠나는 시네필의 손에 들려주고픈 책
<대양의 느낌> 에리카 발솜 지음·손효정 옮김·현실문화 펴냄
“8월 독서 모임에서 함께 읽고 싶은 책. ‘영화와 바다’라는 부제에 걸맞게 영화에 등장하는 바다를 다룬다. 인간이 아닌 자연과 지구를 중심으로 영화를 다시 보는 비평서라 할 수 있다. 어업, 노예무역 등 주제의 스펙트럼이 넓고, 낯선 영화부터 <모아나>처럼 익숙한 영화까지 레퍼런스로 등장해 재밌다. 200쪽이 안되는 짧은 책이라는 것도 장점.”
<에릭 로메르 각본집> 에릭 로메르 지음·길경선 옮김·고트 펴냄
“여름에 잘 어울리는 감독으로 에릭 로메르가 떠오른다. 에릭 로메르 각본집 시리즈로 <희극과 격언1, 2> <사계절 이야기>가 나와 있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의 각본을 찾아 읽어보면 어떨까. 나도 로메르의 영화를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녹색 광선>과 <겨울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 여름이지만 <겨울 이야기>를 추천해본다.”
<캐리> 스티븐 킹 지음·한기찬 옮김·황금가지 펴냄
“브라이언 드 팔마가 연출한 영화 <캐리>를 처음 봤을 때는 옛날 특수효과로 인해 조금 웃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무척 슬펐다. 원작 소설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 <캐리>를 7월 독서 모임 도서로 선정했었다. 스티븐 킹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데 반해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는 분들이 많을 듯하다. <캐리>로 그 세계에 입문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