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영화제 시즌2 광양이 10월23일부터 27일까지 광양시 일대에서 펼쳐진다. 남도영화제는 2023년 시즌1 순천을 시작으로 격년마다 남도의 22개 시군을 순회하며 진행되는 영화제다. 순회 영화제를 통해 남도 각지의 문화와 정체성을 구현하고, 관객과 지역민의 너른 참여를 이끄는 독특한 방식의 운영을 이어가고 있다. 국내 장·단편 경쟁 섹션, 남도의 시선·남도 피크닉·남도 스펙트럼 등의 비경쟁 섹션과 더불어 다양한 축제 프로그램과 공연을 통해 전방위적인 지역 축제로 자리매김하는 중이다. 특히 올해엔 지난 영화제가 치러졌던 순천과 자매결연 도시였던 낭트의 낭트3대륙영화제(이하 낭트영화제)와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며 로컬과 글로벌이 교차하는 영화제로 발돋움할 계획이다. 이에 올해부터 남도영화제의 한국영화 및 경쟁 부문 프로그래머를 맡은 정지혜 프로그래머와 남도영화제와의 MOU 체결을 위해 내한한 제롬 바롱 낭트영화제 집행위원장이 한자리에 모였다. 두 사람은 지역 영화제가 지니는 의미와 방향성, 나아가 한국과 프랑스의 영화산업 협력을 통한 다양한 방식을 논의했다.
- 낭트영화제가 남도영화제와 협력 관계를 맺게 된 과정은.
제롬 바롱 지난해 남도영화제 관계자들이 낭트영화제를 방문했다. 남도영화제의 운영과 프로젝트에 대한 여러 논의를 거쳤고, 우리와 협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낭트영화제는 1979년부터 쌓아온 역사가 있고, 남도영화제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 우리의 경험을 적절히 공유하고 녹여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마련된 셈이다. 예를 들어 몇년 전에는 낭트영화제가 타이완에서 처음으로 아프리카영화 회고전을 열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상영과 내 강연에 사람들이 몰릴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이처럼 한국에도 기존에 소개되지 못했던 외국의 영화를 연결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낭트영화제는 25년 전부터 시작한 국제 워크숍을 통해 타이완, 필리핀, 브라질, 파라과이, 인도 등의 영화산업과 다리를 놓아주고 있다. 워크숍에서 지금까지 200여편의 장편영화가 제작됐고, 150편 정도가 완성되며 큰 성공을 거둔 사례도 있었다. 프로그래머로서는 워크숍 과정을 통해 ‘아, 이 지역 혹은 국가에 분명히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라는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은 특히 프랑스 국립영화영상센터(CNC)가 아시아 영화계와의 협업 체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국가다. 그렇기에 남도영화제와 낭트영화제의 협력이 CNC 정책과 함께 엮이며 한국-프랑스의 공동제작 등 두 국가간의 협력 관계를 공고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 정지혜 프로그래머는 올해부터 남도영화제에 합류했다. 참여하게 된 배경을 묻고 싶다.
정지혜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비평가로서의 정체성이 있는데, 이러한 정체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구현할지엔 굉장히 다양한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간 여러 면으로 영화제 관련 일을 해오며 느낀 바는 영화제 프로그래머 역시 이런 실천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영화를 수급하고 상영하는 행위를 넘어서 구체적이고 스토리텔링이 가미된 기획을 통한 비평적 시도를 프로그래밍을 통해 수행할 수 있다고 느낀다. 특히 남도영화제는 지역 영화제이고, 남도를 순회하는 영화제이다 보니 기존 영화제들보다 관성에서 벗어난 기획과 농밀한 프로그램, 공간적으로도 더 다양한 시도를 만들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언급한 대로 남도영화제와 낭트영화제는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영화제다. 이러한 지역적 정체성과 영화제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제롬 바롱 포르투갈의 시인 미겔 토르가가 이런 말을 했다. “지역성은 벽이 없는 보편성이다.” 즉 내가 있는 장소나 내가 잘 아는 장소의 사람과 풍경, 감정, 습관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엔 열린 시선으로 더 넓은 세상을 보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특히 유익한 매체다. 우선 대중적인 접근성이 좋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영화는 이국적이고 이질적인 무언가라기보단 공통의 감정으로 만들어지는 예술에 가깝다. 각자의 정체성과 국적의 차이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공통된 인간성, 역사, 감수성을 공유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내겐 프랑스영화보다 한국영화의 이야기, 감정, 동기, 철학적 관점이 더 와닿을 때가 있다. 영화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 길과 다리를 만드는 건 현대미술이나 문학, 시보다 더 자연스러운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낭트는 18세기 노예무역의 주요 항구 중 하나였다는 어두운 역사가 있다. 언제나 역사를 직시해야 할 지역의 의무가 있는 것이다. 또한 1979년 낭트영화제는 유럽에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등의 일본 감독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면서 북미와 유럽 중심으로 쓰였던 세계 영화사에 큰 변동을 준 적이 있다. 이처럼 지역과 특정 도시의 문화 활동이 특별한 역할을 해낼 수도 있다.
정지혜 영화제로서 새로운 영화를 발굴하고 영화인들을 지원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동시에 지역민들과 교감하고 그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 역시 무척 중요하다. 이번에 남도영화제가 열리는 광양은 이전에 영화제가 한번도 열리지 않은 지역이다. 그만큼 광양 시민과 도민들에겐 생애 첫 영화제가 될 수도 있다. 영화제에 대한 경험이 없는 분들은 ‘우리 동네에서 뭔가 축제가 열린다고 하니 한번 가볼까?’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제에 오실 수도 있다. 영화제의 문턱을 없애고 다양한 연령대와 세대의 관객이 즐겁게 행사에 참여하고 먹거리와 놀거리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영화제의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린이 관객부터 성인들까지 두루 모여 야외에서 볼 수 있는 상영 프로그램이나 지역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워크숍 프로그램 등을 준비하고 있다.
- 일례로 ‘남도 영화 연기 워크숍’이 이러한 시민 참여 형태의 프로그램인 것 같다.
정지혜 그렇다. 전남영상위원회가 오랫동안 연기캠프를 진행해왔고 최수종 남도영화제 집행위원장도 연기캠프에 직접 참여하며 청소년들에게 연기를 지도해주시기도 했다. 이런 남도의 오랜 특징이 영화제에도 적용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실제 연기 워크숍의 과정이 영화의 내용이 된 <최초의 기억>이 개봉을 준비하고 있단 소식을 접했고, 이 영화 속의 연기 워크숍 프로그램을 영화제에서 진행하는 연계 상영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비전문 배우들이 영화제 기간 동안 합숙하며 워크숍에 참여하고, <최초의 기억>의 장건재 감독이 있는 제작사 모쿠슈라가 제작을 돕는다. 워크숍 참여자의 경우엔 전남 도민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쿼터 제도를 적용하여 지역민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할 예정이다. 이 워크숍의 결과물은 하나의 단편영화로 만들어져 폐막일에 공개된다. 이러한 워크숍 외에도 ‘남도 스펙트럼’이라는 비경쟁 섹션을 통해 남도를 주제로 했거나 남도에서 촬영하고 제작한 작품 등을 영화제를 통해 지속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 어느 영화제든 지속 가능성에 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약 반세기 동안 이어진 낭트영화제의 원동력은 무엇이며, 남도영화제는 어떠한 방향성을 좇을 예정인가.
제롬 바롱 하나의 키워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관객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것이다. 영화제가 높은 목표를 설정하면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1979년 낭트영화제에 처음 오셨고 지금도 꾸준히 영화제를 찾아주시는 관객들이 이제 70~75살이 됐다. 웬만한 프로그래머보다 영화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아신다. (웃음) 우리가 형편없는 영화를 틀면 그분들은 나가버리고 항의도 하실 거다. 그래서 관객들에게 “이걸 봐라. 이런 감정을 느껴라. 이런 욕망을 가져라”라고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의 프로그램이 더 잘 짜여 있고 더 나은 스토리텔링, 기억, 감정을 세공했다면 관객들은 자연스레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 영화제, 관객 사이의 ‘벽’이 무너지는 거다.
정지혜 ‘남도’라고 했을 때 우리의 머릿속에 느슨하지만 공통된 어떤 그림이 있다고 생각한다. 평소 많이 들었던 남도 기행이나 남도 문학에서 영향을 받은 이미지인 것 같다. 그런 남도의 정체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라며 한두 문장 안에 정리하긴 어렵겠으나 그러한 공통된 정서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시대적, 사회적으로 전통적인 문화재들과 투쟁의 역사를 지닌 치열함의 정서가 있을 수도 있고, 감정적으로는 따스하고 포근하며 온화한 뉘앙스가 풍기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런 남도의 정서를 영화제가 끌어안으면서 지역 축제이자 신진 창작자 발굴을 위한다든지 영화제로서 어느 한쪽으로만 쏠리지 않고 균형을 지켜야 한단 생각이 든다. 경쟁 섹션을 통해 한국의 최신작을 소개하면서도, 여러 비경쟁 섹션과 프로그램을 통해 영화제의 정체성을 잘 유지해야 할 것 같다. 제롬 바롱 집행위원장이 말씀하신 것처럼 좋은 스토리텔링을 부여한 기획이 따른다면 자연스레 영화제의 정체성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롬 바롱 균형 감각과 겸손함이 중요한 것 같다. 이 일을 30년 넘게 하면서 ‘이 감독은 정말 큰 스타가 될 거야!’라고 확신한 경우가 3~4번 있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는 일은 매우 드물더라. 첫 장편영화로 칸영화제에 초청된 감독 중에서도 10년 안에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낭트영화제는 공식 경쟁부문을 아주 제한적으로 구성한다. 1천여편의 공모작 중에 20편 정도만 경쟁부문에 선정한다. 또 프랑스 내 다른 영화제들과 꾸준히 소통하면서 각각의 영화제에 어느 작품이 어울리는지, 어떤 시기가 적절할지 논의하기도 한다. 이런 협의를 거치는 것도 영화제의 지속 가능성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