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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보라, 생각하기 전에, 제22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로 처음 내한한 로버트 비버스 감독

한국의 관객에게 로버트 비버스 감독은 생경한 이름일지도 모른다. 1949년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난 그는 16살에 뉴욕으로 떠나, 요나스 메카스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부흥기를 경험하고 실험영화 감독이 되기로 결심한다. 예술적 동반자 그레고리 마르코풀로스를 만나 1967년 유럽으로 이주한 후, 약 60년 동안 필름으로 실험영화를 만들었다. 지난해 뉴욕 앤솔러지필름아카이브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던 감독은, 지금도 베를린에서 필름 복원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첫 공식 상영에 앞서, 평일임에도 객석을 꽉 채운 관객들을 향해 ‘보라, 생각하기 전에. 그리고 이미지가 당신 안에 머물도록 허락하라’라는, 주문과도 같은 말을 설레는 목소리로 전했다. 실험영화의 살아 있는 역사, 로버트 비버스 감독과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 1955년 요나스 메카스가 <필름 컬처>를 창간한 후 1960년대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부흥기를 맞이했다. 당시를 어떻게 회상하나.

16살이 되던 해에 뉴욕의 필름메이커스 시네마테크에서 처음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접했고, 그레고리 마르코풀로스와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 뉴욕은 영화를 보기 좋은 장소였고, 예술가들이 적은 돈으로 정착하기 좋은 도시였다. 아모스 포겔과 그의 아내가 만든 ‘시네마 16’이 있었는데,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그곳에서도 많은 영화를 봤다. 케네스 앵거, 스탠 브래키지와 같은 감독들의 작품을 보면서 감독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작가들은 영화감독으로 생을 마감하고자 했던 사람들이었고, 영화가 이미지로 전달되도록 하는, 다시 말해 이미지가 미지의 영역으로 도약하도록 이끈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관객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능동적으로 영화를 보도록 하는, 이야기에 의존하지 않고 이미지를 직접 보도록 요청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나는 당시 영화들에서 서정성을 발견했고, 영화는 나에게 하나의 시적인 표현이었다.

- 많은 영화 사조들이 그러하듯이, 뉴 아메리칸 시네마 역시 역사적, 문화적 저항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이윤과 상업성이 아닌, 다른 이상을 추구했다. 돈이 주요 가치가 되는 나라나 문화에서, 이윤과 상관없는 영화를 만든다는 건 그 자체로 급진적인 행위이다. 가령 120달러를 가지고도 아름다운 6분 길이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그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 뉴욕에서 짧은 시간을 보내며 첫 영화를 만든 후, 유럽으로 이주했다. 무엇이 이런 결정을 하도록 이끌었나.

뉴욕의 필름메이커스 시네마테크에서 매니저로 일하는 동안 볼렉스 카메라를 접할 기회가 생겨 첫 영화를 만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고대 그리스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여기에 마르코풀로스가 용기를 주기도 했고. 18살에 그리스로 간 후, 대부분의 삶을 유럽에서 보냈다.

- 당신의 영화에는 필름의 물성과 카메라의 원리를 탐구하는 매체적 실험과 인간에 대한 호기심 어린 탐미적 시선이 맞물려 있다. 손의 제스처, 몸의 형상을 다루는 방식에선 로베르 브레송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내 작업 방식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와 무성영화다. 그다음이 로베르 브레송칼 드레이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가 내가 처음 본 브레송의 영화였다. 이후 <볼로뉴 숲의 여인들>을 봤고. 그런데 영화감독을 비롯한 음악가, 무용가, 시인과 같은 예술가들은 작품을 만드는 동안에는 그것이 정확히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아채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단지 어떤 충동이 있을 것이고, 그 충동과 그로 인한 생각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작품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과정은 매 순간 변한다. 참, 브레송의 마지막 영화 <돈>은 정말 충격적인 영화다.

- 자연의 요소들. 그중에서도 ‘빛’은 당신 작품에서 핵심적 요소이자 서정적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카메라에 담는 시공간을 정하는 기준이 있다면.

빛과 자연은 나에게 무척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이유를 말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카메라의 무빙과 장소를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단어로 작업하듯, 나는 이미지, 사운드로 작업한다. 그리고 일련의 촬영 과정들은 나에게 리듬에 대한 감각을 부여한다. 편집을 통해 그 리듬감을 끌어낸다.

- 당신이 일상의 풍경과 사물을 관조하는 방식은, 아르튀르 랭보가 선언하고 질 들뢰즈가 인용했던 ‘견자’의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내 삶의 어떤 순간들에서는 그랬을 것이다. 예컨대 <작업 완료>를 만들 때 나는 사물이 촬영 방식을 이끌어가도록 두었다. 그리고 ‘견자’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색이 곧바로 떠오른다. 색은 감정과 정신, 심리적인 부분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니까. 그리고 일상도 단순하고 평범한 것이 아니다. 일상성도 구조를 내포하고 있다. <빛의 색을 담은 그릇>부터 시작해서 약 20년동안 나는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건 삶의 유한성에 대한 것이다. 그 때문에 나이 많은 사람들이 영화에 등장한다.

- 그렇다면 <빛의 색을 담은 그릇>에 내재된 삶의 유한성이라는 보편적인 현상과 감정을 통해 사람들의 공감과 연결을 만드는 것이 당신이 추구하는 미학적 실천인가.

그렇다. 초기 작업에서는 영화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 지적 열망이 중심이 되었던 것 같다. 이후 작업에서는 유한성을 가진 인간의 삶, 감정과 연결된 색채로 관심이 바뀌었다. 알다시피 나는 시나리오 구조나 전통적인 서사를 배제하고 영화를 만든다. 아름다운 무성영화, 혹은 칼 드레이어나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느껴지는 휴머니티를 추구하지만 그 감정을 시나리오나 배우의 연기로 만들지 않는다.

- 지난해에 뉴욕에서 회고전을 열었고, 약 60년 동안 영화를 만들고 있다. 그동안 영화에 대한 정의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필름 복원 작업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덕분에 에벨리나 로신스카, 에바 클라우스와 같은 젊은 감독, 그리고 피터 토드와 함께 작업할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필름이라는 물질에 몰두하고 있고, 그렇기에 이런 페스티벌이나 프로그램이 정말 중요하다. 나는 단지 나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뿐 미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문을 계속 열어두는 것.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젊은 감독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열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