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앞에 선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설계된 영화적 환경 속에서 모종의 실험을 경험한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자격은 그리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소비에트영화에서 노동계급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 실제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네오리얼리즘 영화에서 전후 폐허의 상황을 찍기 위해 비전문 배우를 기용하고,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사회적 배우와 협업하고, 영화감독들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경우 등을 상상해보라. 그 영화에 등장한 사람들은 전문 배우처럼 연기를 한다기보다는 본래 자신의 기억, 습관, 경험 등을 영화 속 인물에 투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영화 만들기에 참여하는 사람, 즉 배우로 존재하기 이전에 여러 다양한 인간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사람을 인간-배우라고 지칭해보자. 그들은 여러 다양한 영화적 환경의 구성 요소들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영화 만들기에 있어 변수로 기능하는 존재에 가깝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인간-배우는 디지털카메라와 관련된 새로운 실험에 참여했다. 그 시절 디지털카메라의 휴대성과 이동성은 폐쇄적인 스튜디오보다는 개방적인 야외 환경에 더 적합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대도시의 거리와 같은 곳에서 삶의 우연성을 시험하는 작품들이 크게 다음의 두 가지 경향을 이루면서 제작되었다. 하나는 카메라를 들고 배우의 뒤를 쫓아가는 방식으로 촬영된 영화들이었다. 주로 거리를 무대로 활용하여 이민, 난민, 실업, 전쟁 등의 이유로 사회에서 추방되거나 배제된 사람들의 실존적 불안을 다루었다. 다른 하나는 우연히 발견된 카메라에서 폭력적이거나 불가사의한 현상이 기록된 영화들이었다. <블레어 윗치>(1999)의 영향을 받은 그 작품들은 공포에 질린 인간-배우의 반응을 중요하게 보여주면서, 그런 상황이 우연적으로 디지털카메라에 기록되었다가 시간이 흘러 누군가에 의해 발견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처럼 디지털카메라의 이동성을 하나의 조건값으로 갖는 새로운 영화 만들기는 인간-배우가 삶 속에서 겪을 수 있는 불안과 공포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응시하는 형식을 따랐던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편 디지털카메라의 매체적 속성이 지속성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카메라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면서 롱테이크를 주요하게 활용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 결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몸짓과 행위가 강조된 작품이 등장했다. 그것은 서사와 의미의 구축을 중시하는 고전적인 영화 만들기에서 요구되는 배우의 연기와는 무관한 부류의 것이었다. 고전적인 영화에서 하나의 상황은 그것을 원인으로 하는 어떤 반응으로서의 행위를 유도한다. 가령 누군가 총을 쏘면 다른 누군가가 쓰러진다. 인과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지극히 당연한 상황과 반응의 연쇄를 기초로 선과 악의 대결 구도를 구축하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낭만적 영웅담과 관련된 서사와 의미를 파생시킨다. 여기서 배우의 행위는 서사와 의미에 종속된 탓에 그것 자체로 자율성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특정 상황 속에서 배우의 생리적, 신체적, 습관적 반응과 그에 관한 감각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이런 고민은 로베르 브레송, 칼 드레이어, 로베르토 로셀리니,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등과 같이 느림의 미학을 통해 전통적인 서사의 흐름을 교란하는 영화감독들에 의해 시도된 바 있다. 그리고 그 전통은 디지털카메라가 물질적 현실을 데이터의 형태로 저장할 수 있는 역량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그에 따른 경제적 비용이 획기적으로 감소하는 상황과 맞물리면서 느린 영화(slow cinema)의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것은 촬영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실수, 실패, 낭비에 대한 두려움 없이 오랜 시간 동안 그리고 반복적으로 촬영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차이밍량의 영화는 인간-배우에 관한 기존의 통념을 뒤흔든 대표적인 실험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작품은 인간-배우가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 작품 속 세계에서 본연의 성격을 가진 인물, 극 중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로 분열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인간-배우가 가지고 있는 여러 복합적인 속성과 가능성을 시험한다. 차이밍량의 주요 인물들은 밥을 먹는 것, 물을 마시는 것, 걷는 것, 잠을 자는 것, 성관계를 맺는 것 등과 관련된 상황 속에서 모종의 불안과 결핍을 겪는다. 그들은 인물이나 배우로 기능하는 동시에 특정 상황 속에서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으로 묘사된다. 이는 종종 극단적인 상황에 대한 인물-배우의 반응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방식을 통해서 처리된다. 차이밍량의 페르소나인 이강생이 1인2역을 연기한 <홀로 잠들고 싶지 않아>(2006)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에서 이강생은 길거리에서 집단 구타를 당한 이후에 라왕이라는 청년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 어느 이주노동자를 연기한다. 또한 그는 병상에 누워서 한 여인의 간호를 받는 동시에 어머니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는 어느 식물인간의 모습을 연기한다. 두 인물이 누군가로부터 학대와 보살핌을 동시에 받는 그 모순적인 상황에 관한 장면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느린 흐름과 상세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양식적 특징을 갖는 작품 속에서 이강생이라는 인간-배우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망,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그렇다고 차이밍량이 추구하는 인간-배우의 관념이 소극적, 수동적, 절망적이라는 등의 부정적 언사로 설명될 필요는 없다. 차이밍량의 인간-배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상황을 인내하는 과정 그 자체를 하나의 수행적 과제로 삼는다. 차이밍량에게 무언가를 하는 것과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 또는 무언가를 하는 것과 무언가를 당하는 것은 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참으면서 기다리는 그 인고의 시간이다.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되기도 한다. 차이밍량의 주요 인물들이 겪는 신체적 고통을 떠올려보라. 그 고통은 극 중 인물이 겪는 고통이기 이전에 배우가 촬영 현장이나 일상에서 겪는 고통이기도 하다. 차이밍량은 실제 촬영 현장에서 배우가 겪는 고통을 느린 속도로 전달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다림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따져 묻는다. 이강생이 <떠돌이 개>(2013)에서 강풍을 맞으면서 장시간 동안 광고 간판을 들고 서 있는 행위는 최종적으로 임금 노동의 가치로 전환된다. 시간의 지속이 상황과 상태의 변화를 유발한 것이다. <데이즈>(2020)는 영화 전반에 걸쳐서 이강생이 목과 등 주변에서 발생하는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물리치료, 전기치료, 마사지 등을 받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치료 행위를 통해 이강생의 신체에 나타난 고통에 관한 표상은 점점 건강, 행복, 사랑에 관한 것으로 바뀐다. 차이밍량에게 고통은 세계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고통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다스림의 대상이다. 이것은 <행자> 연작이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 연작에서 붉은색 승려복을 입은 이강생은 극단적으로 느린 속도로 지하와 지상을 연결하는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행인들로 붐비는 도시의 거리와 광장을 가로지른다. 이강생의 느린 걸음걸이로 압축되는 이 영화의 의도는 현대 자본주의의 속도와 감각을 중지시키는 것, 다시 말해 동시대의 삶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인간-배우로서의 이강생은 동시대의 삶의 시간과 속도를 다스리기 위한 하나의 몸짓으로 느린 걸음을 선보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인간-배우에 관한 실험을 제시하는 또 다른 경우는 페드로 코스타의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또한 인간-배우를 서사, 재현, 의미 등과 같은 고전적인 영화 관습에 봉사하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배우의 몸을 매개로 작품 속 세계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차이밍량과 같은 계열에 속한다. 페드로 코스타는 지금은 도시 재개발로 인해 사라진 리스본의 폰타이냐스 빈민가를 배경으로, 실제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일상을 다큐 픽션처럼 찍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들에 관한 새로운 관념을 정초했다. <반다의 방>(2000)의 반다 두아르트, <행진하는 청춘>(2006), <호스 머니>(2014) 의 벤투라, <비탈리나 바렐라>(2019)의 비탈리나 바렐라는 모두 자신의 육신, 목소리, 이름을 가지고 작품 속 세계에 출현하여 가난, 식민지 지배, 군사독재와 관련된 삶의 경험을 펼쳐놓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인간-배우들은 자기 자신에 해당하는 것과 자기 자신에 해당하지 않는 것을 동시에 연기하면서 픽션과 논픽션의 구분을 무너뜨린다. 그들은 지금 여기 관객의 눈앞에 문자 그대로 출현하여 그때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재현하거나 발화하면서 과거와 현재의 구분을 무너뜨린다. 이처럼 페드로 코스타가 시도한 인간-배우에 관한 새로운 기능은 픽션과 논픽션, 과거와 현재, 여기와 저기와 같은 서로 다른 세계의 구분을 무효화시키거나 교통시키는 것이다.
페드로 코스타는 자신을 연기하는 인물의 현재 상태를 묘사하는 동시에 그들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넌지시 제시한다. <반다의 방>에서 반다 두아르트는 어두컴컴한 골방에 틀어박혀 마약에 중독된 삶을 살아간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심신이 망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종종 거리로 나와 빛이 있는 곳을 찾음으로써 생의 의지를 드러낸다. 반다의 현재가 어둠이 잠식한 세계라면, 그녀의 미래는 빛이 충만한 세계이다. <행진하는 청춘>과 <호스 머니>에서 벤투라는 집을 잃고, 가족과 친구를 잃고, 병마로 고통받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흩어진 가족과 친구를 불러 모아 예전처럼 함께 살기 위해 집을 마련할 계획을 세운다. 이는 벤투라가 가족들을 위해 필요한 방의 개수나 집을 짓기 위해 필요한 벽돌의 개수를 말하는 장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벤투라의 현재가 파괴에 가깝고 그의 미래를 재건에 가깝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처럼 페드로 코스타는 반다와 벤투라를 통해 지금 그들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를 직시하면서, 그와 함께 그들이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를 그리려고 한다.
아직 오지 않은 세계는 그것을 꿈꾸는 자의 몫이다.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구체적인 실행으로 옮기는 인간-배우의 모습은 <비탈리나 바렐라>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비탈리나 바렐라는 남편 요아킴의 부고 소식을 듣고 고향을 떠나 폰타이냐스를 찾는다. 그녀는 벤투라를 비롯한 남편의 동료들을 만나고, 남편이 살아 생전에 살던 집을 방문하여 그곳의 벽과 천장이 무너져가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녀는 벤투라를 비롯한 폰타이냐스 주민들이 끝내 완성하지 못한 계획, 즉 무너진 집과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일을 계승하기 위해 문자 그대로 강림, 즉 하늘에서 내려온 인물처럼 묘사된다. 그녀는 현재 폰타이냐스가 파괴된 자리에 서 있지만, 그녀는 앞으로 폰타이냐스가 아닌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어나갈 것처럼 그려진다. 이처럼 페드로 코스타의 인간-배우들에게는 저마다의 비전과 계획이 있고 그들은 그에 맞추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거주하는 세계는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계속해서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곳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