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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불안해도 우리는 굴러간다, <우리 둘 사이에> 성지혜 감독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바라보는 은진(김시은)의 표정이 오묘하다. ‘하반신 마비 장애인인 내가 과연 아이를 낳고 잘 기를 수 있을까.’ 복잡한 감정이 스친다. 아내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비장애인 남편 호선(설정환)의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불안정한 시간강사로 일하면서 한 생명을 책임질 수 있을까. 확신보다는 망설임이 크지만 부부는 그저 잘 모르겠는 상태로 한 생명을 품기로 결심한다. <우리 둘 사이에>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스크립터와 <최선의 삶> 조감독을 거친 성지혜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장애인의 일상과 임신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관객을 그 삶의 안쪽으로 초대한다. 이야기의 중심은 장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임신이 불러오는 신체적 변화, 아이에 대한 불안과 책임감 등 여성들이 공유하는 경험과 감정을 담아내며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한다. 오는 7월30일 개봉을 앞두고 성지혜 감독을 만나 첫 장편을 완성하기까지 안고 있던 고민을 들었다.

- 초고는 장애 여성과 비장애 남성의 러브 스토리에 집중한 대중적 서사였다고.

은진이 연년생 여동생에게 들어온 선 자리를 대신 나가면서 시작하는 이야기였고 주변 가족의 비중도 꽤 컸다. 2021년 PGK 창의인재동반사업 멘토링 과정에서 방향을 완전히 바꿨다. 그때가 낙태죄 폐지 찬성 운동이 활발하던 때였는데 당시 장애 여성 단체의 활동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임신 중절을 하는 건 내가 장애인이어서도, 태아에게 장애가 있어서도 아니다. 단지 지금 아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원하면 언제든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라는 목소리가 계기가 됐다. 그전부터 임신, 여성, 장애, 몸에 대해 관심이 있었는데 다 포괄하는 이야기를 첫 장편으로 내놓게 돼 의미가 깊다.

- 지금과 같은 보편성과 확장성을 갖춘 이야기를 만들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 같다.

처음에는 임신한 장애 여성에 초점을 맞춰 자료조사를 했다. 그런데 장애인 임신부에게서만 나타나는 특별한 증상 같은 건 거의 찾을 수 없었다. 그제야 임신으로 인한 몸의 변화와 심리적 불안은 장애 여부와 무관하게 일어난다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은진의 몸을 너무 다르게 바라보고 거기에 갇혀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던 거다. 그 뒤로는 장애와 비장애를 구분 짓지 않고 임신한 몸이 겪는 다양한 변화와 감정을 구체적으로 담으려고 했다.

- 은진과 호선은 부러움을 자아내는 부부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화면 너머로도 느껴지는데 어떤 부부의 상을 염두에 두었나.

소꿉친구로 만나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이어진 편안한 관계였으면 했다. 호선이 너무 이상적인 남편이자 사위 아니냐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는데. (웃음) 사실 호선뿐 아니라 은진의 주변 인물 모두를 그녀에게 다정한 사람들로 설정했다. 그렇지 않은 인물이 있을 경우 은진이 겪는 혼란이 그 사람 때문인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 같아 피하고 싶었다. 다정한 인물들로 둘러싸여 있어도 은진은 외로움 속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인간은 자기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많은 영향을 받고 그것은 누구도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이니까.

- 주로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어린이 진우(홍진우)는 가장 어려운 캐릭터처럼 보였다. 진우를 잠시 보호하는 일은 부부가 쪼꼬(아이 태명)를 낳기로 결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자칫 진우가 그러한 계기만 만들어주고 사라지는 장치처럼 보일 수도 있어서다.

그래서 진우의 비중을 여러 번 조정하며 다양한 버전을 써봤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진우를 데려다 키우지 않는 이상 다 비슷하게 느껴졌고 고심 끝에 지금 정도로 정리했다. 진우 캐릭터를 만들면서 아이들이 언제나 100%의 케어를 받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완벽한 부모와 함께 있더라도 돌봄의 공백은 존재한다. 은진과 호선 역시 쪼꼬에게 최선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걸 완벽히 해낼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가 망가지거나 불행해지는 건 절대 아니다. 아이는 자기 방식대로 그 순간을 겪고 나름대로 잘 살아낼 거다.

- 극 중 두번의 중요한 상승과 하강 장면이 있다. 호선이 칼국숫집의 가파른 계단을 째려보며 먹고 싶은 마음을 누르는 신과 교통약자용 엘리베이터에 비장애인이 가득 들어찬 신이다. 상징적으로 강렬하게 다가온다.

전자의 경우 처음 구상할 때는 그렇게까지 높은 계단이 아니었다. 휠체어 장애인에게는 계단 하나도 큰 장벽이니까. 근처에서 다른 장면을 촬영하다가 제작팀이 그곳을 발견했고 섭외도 가능해서 그곳으로 결정됐다. 엘리베이터 신은 대본에 없었고 원래는 은진이 길을 걷는 장면이었다. 로케이션 헌팅을 하다가 절묘한 위치에 있는 그 엘리베이터를 보고 프로듀서에게 여기서 꼭 찍고 싶다고 제안했다. 우리 영화에 유일무이한 즉흥 신이다.

- 첫 장편 작업이 어떤 생각과 변화를 가져다주었는지 궁금하다.

이전까지 나는 힘든 순간을 참고 외면해왔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한편을 완성하는 동안 그러지 않을 용기가 생겼다. 앞으로는 힘들면 힘들다고 내 감정을 표현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뒤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했다. 문학에서 영화로 관심이 옮겨간 계기가 있을까.

실은 10대 때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고 처음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땐 열정만 있다면 굳이 영화과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대학을 다니면서 알게 됐다. ‘아, 영화과를 갔어야 했구나.’ (웃음) 그렇게 대학원에 들어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연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오랫동안 품고 있는 창작자로서의 화두나 최근 들어 관심이 가는 사건 또는 인물이 있다면.

누군가가 아프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분명 현재의 고통임에도 주변에서는 그것을 이미 지나간 일처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당사자는 매일매일 새롭게 아픈데도, 누군가는 “아직도 아파?”라고 되묻는 거다. 현실에서 과거로 다뤄지는 것들이 영화에서만큼은 현재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느끼는 영화의 큰 매력이고 이 안에서 현재진행형의 아픔을 붙잡아두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