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장면이 없는 알랭 기로디의 영화는 상상하기 어렵다. 기로디의 설명을 빌리자면, 그것은 “신체 기관이 작동하는 방식과 사랑 이야기의 관계를 재확립하는 방향” (<필로> 13호)으로 감각과 정치의 지표 같은 것이다. 물론 기로디의 영화를 한편이라도 경험한 이들이라면, 이 말이 멜로 속 아름다움을 그럴듯하게 가장한 섹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기로디가 “포르노그래피적 삽화”라고 노골적으로 칭한 섹스 장면들은 사랑과 성에 대한 통념과 도덕에 대한 도전이자, 욕망과 유희가 적극적으로 뒹굴며 더러는 죽음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닿는 맹렬하고 거친 육체의 활동이다. <도주왕> <호수의 이방인> <스테잉 버티컬> <노바디즈 히어로>로 이어진 기로디의 지도에서 은밀하지만 수치심 없이 내달리고 전면화되는 그 활동의 지평은 특히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몸들, 주변부의 한없이 보잘것없는 존재들에게 열려 그들을 당당한 관능의 주체로 다정하게 응시하며 저항적으로 호명해왔다.
어찌 된 일일까. 한 남자가 고향 마을로 돌아와 오랜 지인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모습으로 시작해, 웬일인지 그곳을 떠나지 않고 여러 날을 보내다가 어느 밤 침실에서 끝나는 <미세리코르디아>에는 섹스 장면이 단 한번도 출현하지 않는다. 기로디의 세계가 가장 중시하던 ‘욕망’의 화두는 이제 성이 아닌 다른 방향성과 기반을 발견한 것일까. 그의 영화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고 섣불리 단정할 일은 아니나 섹스 장면을 불러들이지 않는 이 세계의 속성과 욕망에 대해서라면 새삼스럽게 들여다보고 싶다.
다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미세리코르디아>에는 섹스 장면 대신 성기가 도드라진 장면이 두번 등장한다. 한번은 제레미(펠릭스 키실)가 살인을 저지른 후 마르틴(카트린 프로)의 집으로 돌아와 샤워하는 대목에서다. 마르틴은 세탁기를 돌려야 한다며 불쑥 욕실에 들어와 제레미의 나신에 별반 눈길을 주지 않는 체하며 그의 더러워진 옷을 챙겨 나가는데, 화면에는 어쩌지 못하고 그 자리에 벌거벗은 채 붙박인 제레미처럼 그의 성기가 그대로 비친다. 이 ‘성기 장면’이 제레미가 마르틴의 아들 뱅상(장바티스트 뒤랑)을 죽인 직후에 배치된다는 점(뱅상은 제레미가 엄마를 유혹한다고 내내 의심하고, 그 의심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몬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또 다른 순간은 영화 후반, 사제관 침실에서 등장한다. 이 장면에 밴 담대하고 애처로운 유머는 <미세리코르디아>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감흥일 것이다. 신부 필리프(자크 드블레)는 경찰을 피해 사제관으로 도망쳐온 제레미를 침실로 데려오고 둘은 경찰의 심문에 대비해, 옷을 벗고 함께 침대에 눕는다. 그러나 이것은 필리프가 짠 계획이자 둘의 연기다. 그는 제레미에게 자비롭게 말한다. “속옷은 입어도 괜찮아.” 경찰이 들이닥쳐 이들의 동침을 확인하려 이불을 걷으려고 하자, 신부가 벌떡 일어나 경찰을 쫓는데, 그는 속옷조차 걸치지 않은 몸이다. 제레미를 향한 사랑으로 그의 살인 행각을 은폐하기로 한 성직자의 성기가 화면에 또렷이 새겨지는 것이다.
두번의 성기 장면은 성적인 접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구애의 작용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욕망을 발화하지만, 시도하거나 실현하는 데는 이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극적이고 수줍기도 하다. 하지만 뱅상이 살해된 후 일어난 장면으로서 그의 죽음과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연루된다는 점에서는 불경하다. 무엇보다 이 성기 장면들의 주인은 제레미가 아닌 마르틴과 필리프로 보이며, 이들이 성기가 ‘활동’되는 순간을 지연한다. 성당 고백소에서 제레미와 대면한 필리프는 그저 영원한 침묵 속에서 그를 사랑하며 견딜 수 있다고 말하고, 영화 끝에 이르러서도 마르틴은 옆에 누운 제레미에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묘한 뉘앙스로 답한다. 쉽게 증발하지 않으나, 폭발하지도 않을 필리프와 마르틴의 욕망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제레미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 클로즈업에도 담긴다. 이는 제레미를 향한 이 공동체 전반의 태도로 감지되기도 한다. 고향 친구 왈테르(다비드 아얄라)는 제레미를 뱅상 몰래 기꺼이 집 안으로 들이지만, 제레미가 갑자기 자신의 속옷을 입고 유혹의 몸짓을 보이자 벌건 얼굴로 그를 쫓아내며 급기야 총을 겨눈다. 예상치 못하게 끼어든 욕망과 그 욕망을 두려워하며 좌절시키려는 이 대목의 과잉된 반응은 이후 언제 그랬냐는 듯 제레미의 방문에 다시 친밀하게 응하는 왈테르의 모습으로 사그라지고 둘 사이의 육체적 긴장감은 미약하게나마 되살아난다.
<미세리코르디아>의 서스펜스는 제레미의 범행이 발각될 시점을 지켜보는 초조함보다는 그와 마침내 섹스 장면을 장식할 대상을 추측해보는 호기심에 더 닿아 있다. 살인 혹은 실종을 둘러싼 성적인 긴장감을 큰 마찰 없이 그러나 끈질기게 지속하되, 그 욕망의 현현을 모호한 상태로 미룸으로써 서스펜스를 생성하는 것이다. 요컨대 제레미가 몰래 자기 집으로 도망치려던 한밤의 장면을 떠올려보자. 어떻게 알고 나왔는지 필리프는 제레미의 차를 멈춰 세우고, 사제관에 가서 술을 먹자고 제안한다.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던 순간, 저 멀리서 마르틴이 다급히 모습을 드러내더니 안도하며 제레미를 집 방향으로 이끌고, 필리프는 순순히 수긍하며 다시 홀로 성당으로 향한다. 필리프의 말대로 제레미를 “사랑하니까 곁에 두려는” 두 사람이 제레미를 중심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기이한 삼각구도, 어찌 되었든 제레미를 이 마을에 붙잡아두는 느슨하지만 견고한 동선은 영화의 결말 무렵에도 세 사람 사이에서 반복된다.
이 영화에서 살인이 벌어지는 장면의 밀도와 서사적 기능은 그러므로 단순히 스릴러의 맥락에서가 아니라 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여지가 있다. 숲에서 뱅상과 제레미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벌이는 격투는 처음에는 섹스 장면을 장난스럽게 대체하는 난장처럼 보이다가, 점차 격렬한 폭력으로 돌변하고 싸움을 시작한 뱅상의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 그런데 둘의 마지막 결전 장면에서 제레미의 행동은 마을을 떠나라는 뱅상의 집요한 요구와 위협에 대한 방어로서는 다분히 과도한 구석이 있다. 제레미는 몸싸움을 넘어 단단한 나무 막대로 뱅상을 가격한 뒤, 엎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그의 뒤통수를 커다란 돌로 내리찍는다. 그저 우발적인 분노의 표출이라고 하기에는 치밀하게 사악하다는 인상을 주며, 그가 어둠 속에서 주변을 살피며 시신을 나무 아래에 묻고, 매일 그곳을 찾아 살피고, 뱅상의 행방을 묻는 이들에게 거짓에 거짓을 더하는 모습은 간교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뱅상의 불평처럼, 사람들 모두 제레미를 좋아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을 그들은 모르기 때문일까. 단지 그 때문일까.
기로디의 세계에서 죽음이 개입하는 상황을 이례적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죽음은 성적인 욕망과 직접적으로 결부된 것(<호수의 이방인> <스테잉 버티컬>)도, 사회구조적인 것(<노바디즈 히어로>)도 아니다. 더욱이 의아한 건 영화가 제레미의 살인 장면을 ‘사건’으로서 세세하게 공들여 재현한 데 비해 막상 뱅상이 사라진 세계의 상태에는 별다른 물결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인상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뱅상의 실종에 관심을 표하지만 심리적으로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들의 실종보다 제레미가 행여 떠날 사태에 더 민감하게 구는 마르틴의 태도나, 범인의 정체를 알면서도 사랑과 용서의 가치를 앞세워 이를 묵인하겠다는 사제의 결단은 아무래도 희한하기만 하다.
살인(실종)이 제대로 사건화되지 않는 이 마을의 기류와 관련해 몇 대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뱅상을 묻은 숲속 나무 아래에서 버섯을 따던 제레미는 마르틴의 집에서 그를 취조하던 경찰들과 재회한다. 경찰들의 거듭된 물음이 제레미를 궁지로 몰아넣을 무렵, 어디선가 필리프가 나타나 다짜고짜 뱅상이 사라진 날 제레미의 알리바이를 대는데, 그 내용은 무려 제레미가 사제관을 찾아와 옷을 벗었고 자신도 그를 원했다는 것이다. 이 대범한 가짜 고백보다 기상천외한 건 경찰의 반응(“욕망의 힘이군요”)과 한술 더 뜬 신부의 대답(“그 힘을 얕보면 안돼요”), 그리고 경찰의 담백한 마무리다(“좋아요. 두분의 행복을 빌죠”). 이 말들의 주인공이 공권력의 주체인 경찰과 금욕의 주체인 사제이며 이들이 자리한 곳이 죽음의 장소라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더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의 투명함과 주저하지 않는 흐름은 이 장면을 평안한 감동으로 감싼다. 그들은 마치 미리 짠 것처럼 어느새 숲속에 나타나고, 미리 준비해둔 것처럼, 기묘한 대화를 평범하게 나눈다. 욕망의 단순하지만 강력한 찬가 속에 사건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제레미는 죽음의 그림자에서 구해지는 것이다. 그가 결국 사건에 대한 죄책감과 불안감을 안고 절벽 끝에 위태롭게 서는 대목에서도 등 뒤에 슬며시 나타나 그를 삶으로 당기는 존재 역시 필리프다. 필리프가 제레미의 자살을 막기 위해 동원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수사에 대단한 철학이 있다거나 명징한 설득력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중 가장 알쏭달쏭한 말은 사람은 결국 누구나 죽으므로 우리에게는 뜻밖의 죽음이, 사고가, 살인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사랑에 눈이 먼 사제가 되는 대로 내뱉은 말이 아니라면, 이건 대체 무슨 뜻일까.
우선 영화 초반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뱅상의 아버지이자 마르틴의 남편, 고인이 된 장 피에르(세르주 리샤르)의 얼굴에 가만히 머물던 영화는 곧장 장례식 장면으로 이동한다. 사제가 사람들을 향해 말한다. “장 피에르는 여러분을 사랑해요, 현재형으로. 죽음은 끝이 아니죠.” 그러고는 마치 장 피에르의 영혼을 향해 말하듯 기도한다. “우리 공동체를 위해 중재해주세요. 우리에겐 사랑이 필요해요.” 장 피에르의 관 위로 사람들이 던진 붉은 꽃잎이 떨어지며 장례식 장면은 끝난다. 이 장면을 처음 볼 때는 사제의 말이 평범한 추도사로 들릴 뿐이었으나 돌이켜보니, 장차 제레미를 구하게 될 ‘그’ 사제가 사랑, 무엇보다도 공동체를 언급한다는 사실이 더이상 범상치만은 않다.
제레미는 마르틴의 집과 왈테르의 집, 숲길과 숲속, 성당 정도를 오갈 뿐이고, 그가 만나는 인물의 수도 몇 안되지만 이 공동체의 분위기를 짐작해볼 수는 있다. 장 피에르가 운영하던 오래된 빵집은 폐업했고 뱅상에 따르면 주민들은 더이상 동네 빵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뱅상은 새벽부터 일을 나간다고 말하곤 하지만 불시에 여기저기서 나타나며, 영화도 그의 일터에 동행한 적은 없다. 이 마을에서 노동 현장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숲속에서 버섯을 캔다. 버섯의 괴이한 형체나 숲의 기운, 그걸 채취하고 들여다보는 이들의 행태를 보건대 이 식물은 식용을 위해서만은 아닌 듯한, 어쩐지 야릇한 인상을 풍긴다(숲에 유령처럼 출몰하는 사제는 버섯이 나는 곳을 제일 잘 안다). 숲이나 거리나 인적 없는 이곳은 한적하다. 달리 표현하면 권태롭다. 이 영화의 서사에서 사뭇 잉여로 보이는 왈테르가 이 공동체의 속성을 얼마간 대변할 것이다. 그는 단명하는 가계의 자손이며, 여자가 어려워 결혼은 하지 않고 큰 집에서 혼자 산다. 휴가도 안 가고 집세도 안 내므로 돈이 별로 필요하지 않아 농장 일도 그만뒀다. “현대화하다가”는 바보처럼 일만 하고 빚만 질 뿐이라고 생각한다. 왈테르는 딱히 불행해 보이지 않아도 그가 고집스레 자족하는 정체된 삶은 변화의 생기, 생산의 활기를 거부한다. 바꿔 말해, 이 공동체에 결핍된 것은 변화의 생기, 생산의 활기이며, 지금 이곳에 절실한 것은 버섯이 아니라, 사제의 추도사를 환기하자면 사랑의 파동이다. 사랑이라는 말로 순화된 욕망이다.
<미세리코르디아>의 도입부는 제레미의 차가 도로를 달려 마을에 진입하는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만으로 거의 5분 가까이 진행된다. 차가 멈추는 곳에 시신이 되어 기다리는 장 피에르가 제레미의 오랜 짝사랑이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마르틴의 입을 빌려 전해진다. 그러나 영화는 지난 사랑을 아련히 곱씹고 추억하는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 장 피에르의 옷을 걸치고, 사진 속 해변에서 수영복을 입은 피에르의 몸을 거듭 바라보며, 미망인 마르틴과 독신인 친구 왈테르를 맴도는 제레미의 모호한 현재성을 응시한다. 지금 이 공동체에는 죽어서도 주민들을 사랑할, 시간을 초월한 장 피에르의 고결한 영혼이 아니라, 욕망을 잠재한 육체성이 필요하다는 것일까. 제레미가 죽은 장 피에르의 집 문을 두드려 마르틴이 활짝 연 문으로 들어서는 장면은 그 육체성이 공동체에 발을 내딛는 첫 순간이다. 마을에 사랑을 전파하고 소멸한 장 피에르의 빈자리에 그보다 모험적인 ‘욕망’의 가능성이 입장하는 순간이다. 기로디는 이 낯선 인간형의 행동 패턴이나 내면, 그와 관계 맺는 인물들의 속내를 판단하는 대신, 제레미라는 ‘빛과 어둠’의 물질성을 이 공동체 안에서 영원히 활동하게 하는 길을 택한다.
이런 장면을 상기해볼 만하다. 마르틴은 경찰의 난입에 겁먹은 제레미를 안심시키려고 현관문을 안에서 잠가버린다. 물론 그 행위는 제레미의 탈출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므로, 그는 경찰과 마르틴 사이에 어정쩡하게 갇힌 셈이다. 그러나 그 밤, 어찌 된 영문인지 경찰이 문을 따고 들어오는데, 몰래 숨어 있던 제레미에게 경찰이 열어둔 문은 도망칠 절호의 기회가 된다. 사제관에 도착한 제레미가 경찰이 따라올 테니 문을 잠가야 하지 않냐고 묻자, 사제가 여유롭게 말한다. “들어오게 둬요.” 이윽고 그 문으로 들어온 경찰이 앞서 언급했듯 침실 안 제이미와 벌거벗은 사제를 발견한다. 제레미는 말하자면 문을 여닫을 주도권을 쥔 자가 될 수는 없으나, 신기하게도 공동체의 문을 개방하는 존재다. 그 문으로 사람과 감정과 욕망이 들락날락하는 동안, 금기와 제도는 유연해지고 규정하거나 범주화하기 어려운, 솔직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세계의 어떤 표정이 드러난다.
욕망을 잠재한 육체성. 그러나 그건 그저 신비롭기만 한 지평이 아니다. 사제가 ‘사랑’으로 부르는 그것은 절대 선이 아니다.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다. 제레미가 개방한 문으로는 사랑만이 아니라 죄도 넘나든다. 이 점이 중요하다. <미세리코르디아>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은 이 세계가 불러들인 사랑이 극한의 폭력을 동반하고 마는 상황을 설정하고 직면하는 데 있다. 이 사랑은 안전하지 않다. 폭력성을 내재한, 혹은 발현한 사랑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견딜 것인가. 제레미의 범행을 대하는 사제의 태도가 종종 괴상하게 보이는 건, 그의 논리가, <미세리코르디아>라는 세계가 그 궁지를 자문하며 시도해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뜻밖의 살인’이 필요하다는 사제의 일견 섬뜩한 말과 뱅상의 느닷없는 죽음은 그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뱅상은 사제와 마르틴, 심지어 왈테르마저 일찍이 문 열어 은밀히 환대한, 공동체를 찾아온 새로운 육체성을 감각하지 못하고 쫓아내야 할 침입자로 여긴다. 공동체를 원래의 질서로 되돌리려던 그가 실종된 후, 누구도 별반 애타하지 않는 현상은 의미심장하다.
비약과 과장을 무릅써보자면, 죽은 뱅상은 이 공동체에 욕망의 활기를 회복시키는 희생물인지도 모른다. 필리프는 깜깜한 숲속에서 뱅상의 시신을 꺼내 순교자 다루듯 그의 얼굴을 정성스레 어루만지고, 혼자 힘으로 들고 안아 성당 묘지로 향한다. 처음으로 묘지의 “문을 닫아줘요”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사랑과 욕망을 위해 살인사건을 외면한 사제가 온전히 홀로 결연하게 치를 죽음의 의례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묘지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는 이 희생제의의 불가피함과 부정함을 오롯이 감수하며 어둠 속으로 퇴장한다. 그리고 아들이 매장될 그 시각, 마르틴은 묘지 밖에서 발견한 제레미를 집으로 데려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천진하게 한 침대에 눕는다. 사랑과 욕망의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은 온당한가’를 묻는 도덕의 진술은 이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다. ‘모든 인간, 심지어 살인자에게도 자비를’이라는 관용의 메시지는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 <미세리코르디아>는 말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희망도 절망도 없는 세계에, 부디 욕망을 일으켜라. 하나 그 욕망이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을 저지르고, 거짓을 일삼고, 후회 속에서도 감각과 관능을 체념하지 못하며 결국 혼란 안에서 빚어진 활력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범인의 정체와 행각을 낱낱이 아는 사제는 자신을 걸고 그 욕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킨 다음, 책임지기로 한다. 과연 당신은 그 욕망의 맹목적인 가치를 맨몸으로 긍정하던 신부만큼 생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민낯의 물음이 우리 앞에 매섭게 던져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