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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나는 너를 잊어도 넌 나를 잊지마

<나만 바라봐>(태양, 2008)

가끔 어릴 적 친구들이 했던 터무니없는 거짓말들이 생각나곤 한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자신이 이건희의 숨겨둔 손녀딸이라고 고백한 친구와 자신이 슈퍼주니어의 한 멤버와 비밀 연애 중이라고 밝혔던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런 종류의 거짓말들은 분명 병적인 망상의 징후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허언이 마냥 음습하거나 징그럽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아무리 허술해도 자기가 만든 환상 속에서만 숨 쉴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흔히들 K팝 문화를 ‘환상을 사고파는 일’에 비유한다. K팝은 나의 현실인데 왜 환상이라고 하는 건지. 당장 얄밉게 대꾸하고 싶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만큼 K팝을 관통하는 비유가 또 없다. 먼저 아이돌 멤버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자. 그들은 콘서트에서, 공개방송에서, ‘버블’에서 ‘팬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는다. 하지만 어떻게 한명의 개인이 얼굴도 사연도 모르는 ‘여러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겠는가? 인터넷에서 아이돌은 교주, 팬들은 신도라고 비아냥대는 반응을 보곤 하는데 그들은 틀렸다. 다시 생각해보라. 밤낮으로 실체 없는 대상을 향해 ‘사랑합니다’를 외치는 쪽이 오히려 신도의 모습과 가깝지 않겠나.

아이돌을 향한 팬의 사랑 역시 환상이다. 그것은 ‘아이돌’(Idol)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찾아본다면 굳이 부연할 필요도 없는 하나의 사실이다. 한 중년 여성이 두눈을 꼭 감고, “다른 팬클럽에서 스카우트가 와도, 절대 거들떠보지 않겠습니다”라고 외치는 방송의 한 장면이 K팝의 고전 밈이 된 것처럼 K팝 팬들은 아이돌을 향해 사랑과 영원을 맹세하고, 그 행위를 즐기며 커뮤니티를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맹세 속에 애정, 질투, 집착, 광기에 이르는 갖가지 감정들을 쏟아부은 뒤, 그것을 멋대로 배합해 오직 자신만 이해하는 사랑의 법칙을 만든다. 최애가 혐오 발언을 일삼을 땐 잠시 타일러 훈방 조치를 하지만, 연애 정황이 포착되는 순간 즉시 사형선고를 내리는 그런 비범한 율법 말이다.

‘환상을 사고파는 일’은 거짓말로 유지된다. 아이돌과 팬은 ‘우린 서로 사랑하고,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피상적인 합의 위에서 관계를 맺는다. K팝 팬의 대다수는 이 합의를 전적으로 믿고 따르지만, 그들 중 일부는 ‘우리’, ‘사랑’, ‘거리’를 제멋대로 해석해 두 진영 사이의 균열을 파고들길 원한다. K팝의 이러한 상반된 기제는 음악 자체로 구현되기도 하는데, 콘서트 마지막 순간에 눈물로 떼창을 유도하는 일명 ‘팬송’이 아이돌과 팬이 맺은 ‘합의’의 노래라면, 태양의 <나만 바라봐>는 그 합의를 의도적으로 깨고 선을 넘는 ‘균열’의 노래인 것이다.

2008년, 이 곡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한 강사가 수업에서 했던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이런 마초적인 발상의 노래를, 이렇게 귀엽게 생긴 남자가 부르다니. 이건 분명 가부장제의 술수예요.” 당시 이 곡의 부도덕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나만 바라봐>는 신에게 바치는 고해성사”라는 음모론을 주변 사람들에게 퍼트리고 다녔다. (애절한 록발라드가 사실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만든 노래였다는 비화도 있지 않나.) 하루에도 몇번씩 널 보면 웃어 난… 수백번 말했잖아 You’re the love of my life… 거짓된 세상 속 불안한 내 맘속, 오직 나 믿는 건 너 하나뿐이라고….

하지만 <나만 바라봐>는 가부장제의 술수, 하나님에 대한 사랑보다 아이돌과 팬의 관점에서 해석될 때, 진정한 파괴력을 갖는 곡이다. 밤을 지새우며 오빠가 변한 것 같다고 말하는 빠순이, 그런 빠순이를 향해 네가 없이는 너무 힘들 것 같지만, 때론 너로 인해 숨이 막힌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오빠. 그 오빠는 기나긴 한숨 끝에 내가 기댈 곳은 빠순이들뿐이란 걸 깨닫고, 그들을 귀찮아하는 스스로를 미워하며 자신을 점점 잃어간다…. 아이돌들이 가질 만한 ‘빠혐’ (빠순이 혐오)과, 염치없는 말을 들어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팬의 마음을 이보다 잘 표현한 노래가 또 있을까? 축축한 욕망과 날 선 권태가 이토록 펄펄 끓고 있는데, 대체 아이돌과 팬이 어떻게 서로를 건강하게 응원한단 말인가? “내가 바람펴도 너는 절대 피지마” 같은 파격의 문장이야말로, 그들이 가진 감정을 가장 정직하게 표현한 것일지 모른다.

내 안에서 K팝은 밤, 과거, 어둠, 지하, 골목, 염증, 곰팡이 같은 것들과 함께 잔다. 악담처럼 보이겠지만, 이것은 모두 내가 좋아하는 단어이자 K팝이 가진 성질에 관한 키워드다. ‘버닝썬’ 이후의 K팝 팬덤 안에서 나는 배신감, 죄책감, 무력감의 사이클을 반복하며 한동안 내 사랑을 무결한 환상 속에 가두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내 트라우마는 나와 비슷한 상처를 갖고 있는 이들과 서로의 마음을 헤집으며 해소되기 시작했다. K팝은 사랑과 집착, 믿음과 맹신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음악이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허공이니 우리는 늘 조심스럽고 예민해진다. 그러니 이제 우리,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생긴 K팝의 헐고 닳은 구멍에서 만나자. 서로 얼마나 오염됐는지,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말하며 서로의 뺨을 갈기자. 그렇게 맷집을 불려 양지화를 시도하는 세력으로부터 우리의 음습하고 징그러운 K팝을 지켜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