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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시간을 살다, 오진우 평론가의 <레슨> <여름이 지나가면>

김태양 감독의 장편 데뷔작 <미망>은 거대한 중력이 작용이라도 한 듯 인물들이 종로 일대로 모인다. <미망>은 스침의 영화이자 서울이란 도시의 영화다. “12시에서 12시.” 시계에 빗댄 인상적인 대사에 비춰보면 영화 속 인물들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지 않다. 각도를 달리하여 더 멀고 긴 시간을 떨어졌다가 아주 짧게 만나고 헤어진다. 여기 두편의 흥미로운 장편 데뷔작에서도 시간에 따른 변화를 다룬다. 공간이 부각된 <미망>과 달리 <레슨>과 <여름이 지나가면>은 좀더 시간에 집중한다. 김경래 감독의 <레슨>은 시간 그 자체를 보여준다. 어느새 싹둑 썰린 시간의 단면을 바라보며 우리는 사라진 시간을 상상하게 된다. 장병기 감독의 <여름이 지나가면>은 여름방학 전 짧지만, 누군가에게 너무나도 긴 그 시간을 함께 겪게 만드는 영화다.

출발점으로 데려가다

<레슨>

나선형을 그리는 <레슨>은 끝에서 모든 사건의 출발점에 우리를 데려다놓는다. 거기서 영화는 다시 시작한다. 그렇게 다시 영화를 보면 이미 시작부터 무언가 어긋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꿈에서 출발한다. 꿈에서 영어 과외 강사 경민(정승민)은 자전거를 타고 한강에 도착한다. 한강 변에 많은 사람들이 누워 있다. 경민도 따라서 눕는다. 그가 눕는 동시에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사라진다. 여기서 그의 모습이 의아하다. 떠나는 사람들을 바라볼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그는 평온히 잠을 잔다. 그리고 영화는 커피숍에서 자고 있는 경민의 모습을 다음 장면으로 연결한다. 몽중몽(夢中夢).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처럼 <레슨>은 그렇게 뫼비우스의 띠를 그리며 무한 반복하는 영화이자 경민의 어느 한 시기를 담은 기억의 총체다. 단순히 자고 깨어나는 과정이 아니라 몽중몽을 넣음으로써 영화는 어떤 틈새를 벌려놓는다. 이를 통해 영화는 선형적으로 시간이 흐르다 어느새 뒤섞이며 기억이나 꿈으로 미끄러지는 순간으로 도약한다.

경민은 이 시간을 곱씹으며 후회라는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다. 경민은 애인 선희(전한나)와 3년째 연애 중이다. 하지만 경민은 과외 학생에게 연애를 하고 있지 않다고 거짓말을 한다. 선희와 달리 경민은 결혼 생각이 없다. 그는 다소 미온적인 태도로 관계를 유지해나간다. 그는 과외 학생이 소개해준 또 다른 과외 학생인 영원(이유하)을 만나며 선희와의 관계에 금이 더 가기 시작한다. 피아노를 가르치는 영원은 경민에게 레슨을 교환하자고 제안한다. 이 교환 과정이 상당히 흥미롭다. 교환이 일어나지 않는 교환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공평한 물물교환이 아니라 한쪽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레슨을 빌미로 경민은 영원에게 끌린다. 좋게 표현하면 사랑의 디졸브, 즉 경민이 선희에게서 영원으로 마음이 바뀌는 이행의 과정을 그린다. 공공장소인 커피숍에서 진행하는 영어 레슨과 달리 피아노 레슨은 영원의 집에서 진행된다. 사적이고 내밀한 둘만의 서사가 켜켜이 쌓여간다.

촉각적인 관능을 최대한 살리며 영화는 두 사람을 포갠다. 특히 다 먹은 자두 씨를 뱉는 과정은 특별하다. 창피함과 관대함이 오가며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쪽은 친밀해지고, 한쪽은 서먹해지며 경민의 마음의 시소는 점차 영원에게로 쏠린다. 하지만 관계의 키를 쥔 것은 영원이었다.

<레슨>은 존재했던 시간을 순서대로 배치하지 않는다. 이 시간은 경민의 불완전한 기억의 형태에 가깝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온전히 현실이라 말할 수 없는 순간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배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메타적으로 바라볼 때 가능하다. 영화에서 경민은 그러질 못한다. 그저 어리둥절하게 그 상황을 지켜볼 뿐이다. 경민이 바라보는 것은 자전거다. 자전거는 영화에 세번 등장한다. 경민이 길몽이라 여긴 꿈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후 자전거라는 기호는 현실로 침투한다. 경민은 선희와 여행을 가서 한적한 산책로를 거닐다 자전거를 발견한다. 경민은 자전거를 타고 선희 주위를 뱅뱅 돈다. 마치 선희를 중심으로 공전하듯이 말이다. 동일한 상황은 경민과 영원에게도 일어난다. 이때는 반대로 경민을 가운데 두고 영원이 자전거를 타고 빙빙 돈다. 둘을 잇는 중력은 어느새 사라지고 각각의 관계는 붕괴한다. 그렇게 모두가 떨어져나가 혼자 남겨진 내면의 풍경이 우리가 <레슨>을 보며 처음 목격했던 그 장면이다.

“당신에 대해서 말해보세요.”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사다. 경민은 저 질문으로 과외를 시작한다. 정작 경민 자신에게는 물어보지 않았던 질문이다.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결국 기억이다. 경민이 외면했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레슨>은 기억의 형태로 재구성하여 보여준 셈이다. 우리는 경민의 기억을 훑고 난 뒤에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와 위의 대사를 다르게 바꿔 생각해봐야 한다.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혹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레슨>

경민은 옛날 비디오테이프를 디지털로 변환하여 어머니와 함께 시청한다. 해외여행을 가서 찍었던 영상 속 돌아가신 아버지의 멋졌던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예전에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다고 아들에게 처음 고백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잘생겨서 그랬던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이미지와 실체 사이의 간극. 이는 경민도 극복할 수 없는 숙제였다. 그는 갈수록 빠져나가려는 영원을 구속하려고 든다. 하지만 영원은 경민의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는다.

경민은 영원과의 첫 레슨을 추억한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영원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찍어뒀던 영상을 꺼내 본다. 스마트폰은 건반 위의 손을 찍다가 은근슬쩍 영원의 얼굴로 향한다. 그때의 그러한 설렘은 어느새 집착으로 바뀐다. 반대로 영원이 경민을 기억하는 방식은 향수다. 그녀는 경민과 달리 관계를 깊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심하게 말해서 향수로 자신의 영역을 표시한 것뿐이었다. 향수를 바꿨다는 건 경민과 선희가 이별했다는 것이다.

경민이 영원에게 질척거리기 시작하면서 영원은 자신의 집에 다른 사람을 들인다. 그것에 분노해 경민은 향수를 영원의 집 앞에 던져버린다. 경민은 그렇게 냄새를 벗겨내고, 긴 머리도 다듬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선보이는 몽타주는 놀랍다. 이별 후 기분 전환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과외 학생으로 선희를 처음 만나러 가기 전, 다시 말해 과거의 모습이기도 하다.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듯하다. 시간은 그렇게 뒤섞이면서 마치 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경민의 욕망처럼 비추기도 한다. 시간 속에서 경민은 무엇을 배웠을까? 마치 게임을 다시 시작하듯이 경민은 선희와의 첫 수업을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레슨>이 시간의 미로에 갇힌 인상을 준다면 <여름이 지나가면>은 빛이 보이지 않는 시간의 터널을 통과한다. 그것을 표현이라도 하듯 영화는 블랙아웃된 화면에서 사운드를 드러내며 시작한다. 아들의 전학에 대해 부부가 통화를 한다. 어딘가로 이동하는 자동차. 그 안에 모자가 있다. 엄마(고서희)는 아들 기준(이재준)을 농어촌특별전형을 위해 시골의 한 초등학교로 전학시킨다. 미래에 저당 잡힌 현재를 살아가는 이 모자에게 현재라는 시간은 무엇일까? <여름이 지나가면>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미래의 특정 시점을 향한다. 영화 속 인물들이 처한 현재는 벗어나고 싶은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모자를 기다리는 건 동네를 사실상 지배하는 영문(최현진)이다. 그는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동생 영준(최우록)과 함께 살아간다. 형제는 부모 없이 살아간다. 동네 사람들은 형제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다. 하지만 사실상 방치한 상태이며 동네 사람들은 형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형제와 엮인 아이들만이 진실을 알고 있다. 형제에게 도둑질은 일상이다. 이것은 생존의 몸짓이지만 스릴 넘치는 놀이이기도 하다. 영문은 영준의 친구들의 돈을 갈취하고, 영준은 동네 식당에서 밥을 얻어먹고 다닌다. 형제는 자신들의 딱한 처지를 일면 악용한다. 염치라는 것이 상당 부분 사라진 상태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안면몰수와 거짓말은 패시브 스킬이 됐다. 신고식처럼, 기준의 엄마는 반에 햄버거를 돌린다. 영준은 햄버거를 하나 더 먹기 위해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한다. 이를 본 기준의 엄마는 영준에게 햄버거 하나를 준다. 이때 영준의 경계하는 태도와 햄버거를 빠르게 채가는 버르장머리 없는 제스처에서 그간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렇듯 <여름이 지나가면>에서도 일종의 교환이 일어난다. 아이들은 영문에게 돈을 상납하고 안전을 보장받는다. 말이 안전이지 영문의 통제하에 아이들이 관리되는 세계였다. 그곳으로 외지인인 기준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아이들이 줄 수 없었던 것들이 오가기 시작한다. 영화 시작부터 기준은 자신의 운동화를 도둑맞는다. 영화 전체가 이 사건에 신경 쓰는 양상을 보인다. 없어도 될 플래시백이 그것이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이 플래시백이 목에 가시처럼 거슬리며 잔상을 남긴다. 왜 굳이 친절하게 플래시백을 넣었을까?

제자리를 찾아가다

<여름이 지나가면>

<여름이 지나가면>은 제자리를 찾아가는 영화다.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무언가를 잃어버려야 한다. 그것이 서사의 기본 원칙일 것이다. 첫 번째 플래시백은 식당에서 기준의 엄마가 영준의 이름을 들었을 때다. 그녀는 선생님이 다른 학생들에게 영준이 어디 있냐고 묻는 장면을 떠올린다. 두 번째 플래시백은 새 신발은 어떠냐고 물어보는 엄마의 물음에 기준은 낮에 굴다리에서 같은 신발을 신은 영문을 떠올린다. 세 번째 플래시백은 CCTV다. 이것은 객관적인 기계의 시선으로 기록된 데이터다. 전학을 왔기에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그냥 묻어두려고 했던 판도라의 상자인 CCTV를 기준의 엄마는 기어코 연다. 불완전하지만 복구된 데이터 속 열화된 이미지에 파란색 칼라 티셔츠를 입은 영준이가 있다. 다른 학생도 있지만 식별 가능한 사람은 오직 영준이뿐이다. 영화에서 영준은 시종일관 파란색 칼라 티셔츠만 입고 있다. 축구 대회 때를 제외하곤 영준은 오직 그 옷만 입는다. 범인의 이름, 도둑맞은 신발 그리고 그것을 훔쳐간 범인의 인상착의. 그날의 기억은 어쩌면 저 옷으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지난여름을 기억의 형태로 엮어내고 있다. 여름이 지나고 어느 미래에 모든 것이 점차 옅어진 그때 그 ‘파란색’ 옷 입은 녀석으로 시작될 기준의 기억 말이다.

영화에서 운동화만큼 중요한 것은 게임기다. 기준은 자신을 위해 복수를 해준 영문에게 게임기를 갖다바친다. 영문에게 무언가를 주면 돌려받지 못한다고 한 친구는 경고했다. 이 세계의 게임의 규칙은 깨지기 마련이다. 기준이 영문에게 준 것들은 이미 사라졌다. 게임기는 부서졌고 운동화의 주인을 알게 된 영문은 도둑질해서 둘 다 새것으로 장만한다. 그렇게 기준에게 다시 돌려준다. 그것은 단지 표면적인 교환이다. 물건들이 돌아왔다고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은 것은 아니다. 실질적인 교환이라면 그동안 가려졌던 얼굴을 살짝 드러낸 것이다. 여태껏 도둑질했어도 들키지 않아서 무뎌진 영문의 감각은 기준네가 등장함으로써 되살아난다. 영문은 양심의 가책과 수치심을 오랜만에 느꼈고 그 때문에 그가 일군 세계의 규칙은 잠시 깨진다. 기준은 영문을 만나서 물이 들었다고 보지 않는다. 기준네 가족이 시골에 도착하면서 도시와 비슷하다고 말했듯이 내면의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단지 발현되지 않았을 뿐이다. 영준을 배신했을 때, 영문 앞에서 말을 돌릴 때 기준의 비겁함은 오히려 도시적인 것은 아닐까? 부모의 통제 밖, 영문의 통제하에서 기준은 좀더 풀어헤쳐져 극단에 놓인 자신의 본모습을 본 것이다.

그렇게 기준네는 도시로 다시 떠나고 남겨진 형제는 그들이 버린 게임기를 들고 오토바이에 탄다. 이때 영준은 다른 옷을 입고 있다. 이때부터 영화는 기준의 기억이 아니다. 기준의 시점으로 영화가 시작했다면 끝에선 시점은 분리돼 형제의 것이 된다. 하지만 영화는 블랙아웃이 되고 형제의 오토바이 소리만 들린다. 이는 기준의 미래보다는 형제의 미래를 상상하게끔 유도한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영화의 관성 때문에 형제의 오토바이는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배회할 것이다. 혹은 그 소리와 함께 기억의 저편으로 형제는 잊히는 것은 아닐까? 검은 화면에 울려 퍼지는 오토바이 소리가 섬뜩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여름이 지나가면>은 마지막에서 관객을 일종의 윤리의 시험대에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