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난 인연의 재회는 일종의 시간 여행이다. 오늘 네 눈에 비친 나는 과거의 나와 얼마큼 멀어졌을까. 여태 벗지 못한 허물은 또 얼마나 못나 보일까. 걱정을 삼키며 그 시절의 우리를 마주하다 보면 알게 된다. 과거에 바랐던 현재는 이런 꼴이 아니었다고. 그러나 낙담하고 떠나기엔 잠시 들른 관광지의 경치가 너무 근사하다. 고봉수 감독의 신작 <귤레귤레>는 그 행운을 붙잡아 음미하고, 다시 걸음을 떼기 위해 마음의 근육을 주무르자고 제안한다. 지난 사랑을 잊지 못하는 대식(이희준), 지금 사랑을 믿지 못하는 정화(서예화)는 그렇게 튀르키예 카파도키아를 함께 둘러본다. 풍광을 만끽하던 그들의 시선이 자기 내면으로 향할 수 있도록 안내한 고봉수 감독을 만났다.
- 아내 이주예 감독(<보조바퀴>)이 <귤레귤레>의 공동 각본가로 이름을 올렸더라.
지금까지 멜로와 관계없는 영화를 찍어왔는데 이희준 배우가 <펀치 드렁크 러브> 같은 멜로를 찍고 싶다고 해서 아내 이주예 감독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주예 감독이 멜로 마니아다. 이 장르의 핵심이 간질간질함이니 아내와 상의하며 그런 느낌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펀치 드렁크 러브>의 주인공이 아마존처럼 눅눅한 숲에서 젖은 모포를 덮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과 달리 우리 영화의 주인공 대식은 그것과 반대로 버석버석하게 건조한 인상이길 바랐다. 그게 아내와 여행했던 카파도키아의 풍경과도 어울려 배경을 그렇게 정했다.
- 희뿌연 필터를 씌운 것처럼 보이는 화면도 카파도키아의 분위기로부터 영향 받은 건가.
그렇다. 요즘은 4K, 8K와 같이 워낙 쨍한 화면이 많아서 일부러 화질을 저하시키는 작업을 했다. 거기에 따른 호불호가 있기는 하나 관객에게 튀르키예와 어울리는 필름룩을 보여드리고 싶어 과감하게 결정했다.
- 이희준 배우와는 <습도 다소 높음> 이후 두 번째로 함께했다. 그와 쌓은 시간이 대식이라는 캐릭터에 색을 더해줬나.
그렇다기보다 그에 대한 막연한 믿음으로 그런 캐릭터를 만들었다. 어떤 역할을 줘도 그가 잘해낼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는 안 해본 연기에 도전하는 행보를 추구한다. 나 또한 독특한 캐릭터를 좋아하는 연출자다보니 합이 잘 맞는다. 만날 때마다 ‘앞으로도 재밌는 작업 해보자’라는 말을 주고받는다.
- 동굴 신은 해프닝처럼 지나가지만 대식이라는 인물을 잘 설명해준다. 가이드는 5분이면 동굴을 빠져나올 수 있다고 말하는데 대식은 그러지 못하고 방황한다. 대학 시절 상처를 30대가 지나도록 떨치지 못하는 그의 상태를 은유한 것 같다.
그렇게까지 생각지는 못했는데! (웃음) 그 장면을 영화적으로 재밌게 만들고 싶어서 대식이 환청을 듣고 환상도 보는 식으로 찍어두긴 했다. 이희준 배우도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서 우리가 현지 코디네이터의 도움을 받아 정육점에서 동물 뼈를 공수해오기도 했고.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일단 장르를 뒤섞어 재밌게 촬영해보고 싶은 의도가 우선이었다. 편집 과정에서 일부를 자를 수밖에 없었던 게 아쉽다.
- 대식과 정화가 과거에 어떤 사이였는지는 영화 중후반부에 나온다. 사전 정보 없이 극장에 들어간 관객은 의아할 법하다. 그 시점에서야 사실이 밝혀져야 한다고 여긴 까닭은.
대식은 말을 안 하고 속에 담아두는데, 술을 마셔야만 입이 터지는 사람이다. 그래서 술을 잘 안 먹지만 여행 중 어쩌다 술을 먹게 돼 빵 하고 터진다. 그 이후부터 대식은 완전히 달라진다. 정화와 데이트를 하면서는 말도 많이 한다. 그 차이를 후반부에서야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극단적인 설정을 넣었다.
- 덕분에 정화가 그렇게 해사하게 웃을 수 있는 여자라는 걸 마지막에야 알게 되었다. 정화는 조용할 때조차 분노를 품고 있지만 대식과 시간을 보내면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는 것 같다. 서예화 배우와는 어떤 대화를 나눴나.
서예화 배우는 이희준 배우가 추천했다. 연극을 함께했는데 연기를 감각적으로 잘하는 배우라고 하더라. 아니나 다를까, 비전문 배우와 함께하는 현장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며 아이디어도 많이 내주셨다. 정화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지팔지꼰’을 얘기했다. (웃음) 문제가 있어 이혼해놓고 굳이 재결합하려는 심리가 무엇일지에 대해서. 이 영화가 그런 마음을 과감하게 끊어내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트리트먼트만 준비한 후 배우들의 애드리브를 적극 수용한 전작들과 달리 이번에는 시나리오 작업을 철저히 했다고 알고 있다. 튀르키예 올로케라는 조건 때문이었나.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영화진흥위원회 제작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시나리오가 필요했다. 워낙 준비를 철저히 하는 스타일인 아내와 작업하다보니 대사까지 다 준비해버린 것도 있다. 대신 배우들에게 대사 그대로 연기할 필요는 없다고 전했다. 이렇게 시나리오를 마련해두니 현장에서 배우들과 소통하기 쉬워지더라. 예전에는 배우들이 혼란스러워할 때마다 일일이 설명해줘야 했는데 내비게이션이 생기니 좋았다. 차기작에서는 과거부터 반복해오던 연출법에서 벗어나 콘티가 완벽하게 짜인 영화를 만들어보려는 계획도 세워보는 중이다.
- 라스트 신 또한 처음부터 염두에 뒀다고 들었다. 대식이 튀르키예어로 ‘웃으며 안녕’을 뜻하는 인사말 “귤레귤레”를 외치다 특정 대사를 소리 없이 웅얼거리는 것도 계획한 이미지였나.
이희준 배우가 ‘귤레귤레’를 다양한 버전으로 외쳐볼 테니 골라서 써달라고 했다. 그중 대식의 지질함이 가장 잘 드러나는 버전을 썼다. 이희준 배우가 열기구 위에서 정말이지 목이 쉬도록 외치더라.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속삭이듯이 입만 뻥긋거리며 ‘행복하게 살아야 돼’, ‘사랑했었다’ 하는 대사들을 애드리브로 했다. 현장에서 그걸 보자마자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후회하기보다는 ‘귤레귤레’ 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