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고봉수 감독의 신작 <귤레귤레>가 한달 만에 전국 극장에서 개봉한다. 튀르키예어로 ‘웃으며 안녕’이라는 뜻이 담긴 작별 인사를 제목 삼았듯이 영화는 튀르키예 올로케이션을 지향했다. 그 배경이 되는 지역은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이자 <스타워즈> 시리즈의 우주 지형에 영감을 준 것으로도 알려진 카파도키아. 고봉수 감독의 카메라는 카파도키아 패키지 투어에 참가한 군상의 뒤를 따르다가 오랜 인연을 간직한 두 남녀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중 한 사람은 대식(이희준). 극 중 이름보다 ‘이 대리’라는 호칭으로 더 자주 불리는 그는 자동차 부품을 다루는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다. 상사 원창(정춘)과 튀르키예까지 출장 와서 계약도 성사시켰지만 여정이 개운치만은 않은 인상이다. 눈치 없이 말만 많은 원창을 보필하느라 기운을 빼앗긴 것 같기도, 지금 하고 있는 일 자체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공허하던 대식의 시선이 한 여자에게 꽂힌다. 그 상대는 전남편 병선(신민재)과 재결합을 타진할 수 있을지 시험해보고자 비행기를 탄 정화(서예화). 낯선 풍경을 뒤로하고도 병선과 익숙한 언쟁을 거듭하는 정화는 점차 인내심을 잃어가고, 마침 자신을 향하고 있는 대식의 눈을 의식한다. 상사와 부하 직원, 전남편과 전 부인 외에도 세 모녀가 패키지에 동행한다. 방방 뛰며 브이로그를 찍는 중년 여성(김수진)과 그런 엄마와 살짝 떨어져 움직이는 두딸(박은영, 최수민)이 그들이다. 경상도 사투리에도 능한 현지인 가이드 이스마일은 투어를 무사히 마치기 위해 그 모두를 다독여가며 깃발을 든다.
<델타 보이즈>(2016)로 출발해 <튼튼이의 모험>(2017), <습도 다소 높음>(2020), <빚가리>(2022) 등을 지표 삼아 고봉수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유랑해온 관객에게 <귤레귤레>는 ‘아는 맛’에 진한 풍미를 더한 코스 요리처럼 다가올 것이다. 특유의 재치가 흩뿌려진 스크루볼코미디 신들에 웃다보면 웃지 못할 상황에 놓인 인물들이 눈에 밟힌다. 그들이 서로를 만나 잠시 시름을 내려놓고 밝은 내일을 기대했다가, 그게 그리 쉽지 않다는 걸 알아채며 실망도 한다. 다만 고봉수 감독은 여느 때처럼 희망을 붙잡는다. 어쩐지 더 간절해서 차분한 태도가 이번 영화에 있다. 지금 나아진 게 아무것도 없더라도, 우선 지난날과 그때의 사람들에게 안녕이라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긍정하는 것이다. 이때 패키지 투어라는 형식은 감정이 진척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걸으며 주의를 환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타인들과 어울리며 그 과정을 함께해야 한다는 조건이 인물들을 묶어준다. 고봉수 감독은 실제로 카파도키아를 대표하는 관광 코스인 ‘그린 투어’ 코스를 거치며 주요 장면을 촬영했다고 한다. 그 일원이 된 기분으로 영화를 감상하다보면 끝내 자신의 그림자를 향해 “귤레귤레”라 외치고 싶어질 것이다.
close-up
두개의 삽입곡이 관광지의 소음을 잠재우고 인물의 마음에 귀 기울이게 한다. 대식과 정화가 낙타를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는 최유리의 <동그라미>가, 그들이 열기구와 어우러질 때는 허회경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흐른다. “매일 이렇게 살아가는 게 가끔은 너무 서러워”라고 읊조리는 가사를 비롯한 두곡의 한마디 한마디가 꼭 대식과 정화의 속내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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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드렁크 러브> 감독 폴 토머스 앤더스, 2002
연이은 악역 소화에 자신의 눈빛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 이희준 배우는 <습도 다소 높음>을 함께한 고봉수 감독에게 말했단다. <펀치 드렁크 러브> 같은 멜로를 한번 찍어보자고. 그 요구에 응답한 고봉수 감독이 대식이라는 남자를 창조해 튀르키예에 데려갔다. <귤레귤레>에 불을 붙인 영화답게 <펀치 드렁크 러브>의 주인공 배리(애덤 샌들러)에게서 대식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