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실장, 홍보 마케팅, 영업, 재무회계, 비서. 한 사람이 이 많은 업무를 다 소화할 수 있나 싶지만 <노무사 노무진> 속 희주(설인아)는 이 모든 일을 거뜬히 해낸다. 희주의 여러 직무에 반드시 동반하는 필수템이 있다면 그건 호통일 것이다. 외국인노동자를 착취하는 공장주에게, 현장실습 도중 사고를 당한 학생을 나 몰라라 하는 교사에게 희주는 우레와 같은 불호령을 내리며 무뢰한들의 양심을 일깨운다. 희주의 영업력, 결단력은 배우 설인아의 야무진 어조와 만나 살아 숨 쉬고, 설인아 특유의 공간을 가득 울리는 저음은 희주의 선의에 힘입어 시청자의 마음에 메아리친다.
- 처음 <노무사 노무진> 대본을 읽고 받은 인상은.임순례 감독님과 김보통 작가님의 작품이라고 하니 참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 캐릭터를 봐야 하지 않나. 대본 속 희주의 매력이 상당했다. 단순한 듯 단순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문제 속으로 쳐들어가다가도 기가 막히게 빠져나온다.
- <비상선언> <우리 사랑이 향기로 남을 때> 등 영화 촬영 경험이 없지는 않지만 영화감독의 첫 시리즈 연출작에 함께했다. 임순례 감독의 현장이 지닌 특별함이 있던가.
“여러 번 해도 괜찮아,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아.” 감독님이 늘 배우들에게 건네는 디렉션이다. 배우들이 강아지처럼 현장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풀어놓아주신다. 테이크는 세번 미만으로 가는 대신 리허설을 자주 가지며 캐릭터를 체화한 현장이다. 감독님이 주지하는 요소 중 하나가 일상성이다. 개별 캐릭터가 저마다 개성이 넘치더라도 그들의 궤적에 꼭 일상이 묻어 있기를 강조하셨다. 드라마는 워낙에 인물들이 옷을 자주 갈아입지 않나. (웃음) 그런데 <노무사 노무진>에선 대부분의 배우가 같은 옷을 여러 차례 입고 나온다. 상의 네벌, 하의 네벌을 두고 믹스매치하는 식이다. 그리고 <리틀 포레스트>를 연출하신 분답게 음식을 프레이밍하는 디테일이 남다르시다. 종종 등장하는 식탁 숏을 보면 음식을 담은 그릇부터 다른 작품과는 다를 것이다.
- 희주는 앞뒤 재지 않고 불도저처럼 프로젝트에 돌진하고 언니와 껄끄러운 사이인 형부 무진(정경호)에게도 붙임성 있게 다가간다. 희주가 없다면 노무진 노무사 사무실이 굴러갈까 싶다.
성격이 급하고 화끈한 캐릭터라 일단 말의 속도를 높였다. 이전까지는 연기할 때 내가 지닌 속성을 끄집어내 캐릭터의 장점을 특출나게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그런데 희주의 독특함을 구현하자니 나 하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방식으로 캐릭터를 분석했다. 희주의 대담함을 표현하기 위해 나 이외의 레퍼런스를 찾은 것이다. 희주를 연기할 땐 아는 언니를 참조했다. 언니를 장기간 집중해 관찰한 후 언니의 모습을 희주에게 입혔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연기해보긴 처음인데, 언니가 <노무사 노무진>을 본다면 바로 자기인 줄 알 것이다. (웃음)
- 이전에도 <사내맞선>이나 <오아시스> 등에서 누굴 만나도 기 죽지 않고 제 할 말을 속 시원히 뱉는, 속칭 사이다 캐릭터를 연기했다. 대본에 쓰인 대사 이상으로 시청자들에게 쾌감을 선사할 수 있는 설인아만의 노하우가 있다면.
큰 에너지를 요하는 캐릭터들이긴 한데, 내가 워낙 기운이 넘쳐서. (웃음) 그래서 나의 강한 에너지가 자칫 튀어 보이지 않는지 항상 고민한다. 튀는 것과 강한 것은 종이 한장 차이라 그 선을 늘 고민한다. 감독님이나 동료 배우들에게도 곧잘 내가 넘치진 않는지 물어보는데, 이번 현장에서도 오빠들이 막판에 이르러서는 잘하고 있으니 그만 좀 물어보라고 하더라. 대사가 “가자”라면, [카자]가 아닌 [가자]로 발음하되 그 안에 희주의 자신감이 배길 바랐다.
- 공식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를 보니 ‘주짓수 유단자’라는 설정이 있던데. 다양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주짓수를 배우는 모습을 보여준 터라 희주의 액션이 기대된다.
근래에 예능프로그램 <무쇠소녀단>에도 출연하다 보니 이미지가 굳어졌는데, 이 기회에 해명하고 싶다. 나는 운동 전반을 두루 좋아할 뿐이다. 주짓수는 정말 잠깐 배웠다. (웃음)
- 작품을 촬영하며 유독 마음이 쓰인 에피소드나 대사가 있나.
5, 6부에 대학교 청소 노동자 귀신이 등장한다. 그 에피소드를 찍는 내내 화가 나더라. 부모님 생각도 자연히 하게 됐다. 내 대사도 좋지만 무진의 말들이 참 좋다. 매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무진이 전체 과정을 정리하며 가해자들에게 잘못을 일러줄 때의 대사들이 기가 막히다. 그 말을 들을 때면 저절로 희주의 마음이 된다. 속이 다 시원하고, 형부를 잘 보필해 그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 올해로 배우 데뷔 10년차다. 학생보다도 사회인 캐릭터를 훨씬 자주 맡는 연차가 됐다.
신인 때의 연기를 다시 보면 아쉽다. 긴장의 연속 속에 현장으로 출근했고, 분명 최선을 다했지만 카메라 앞에서 준비한 것 이상으로 펼쳐 보이지도 못했다. 그 시절을 거치며 과정과 결과가 늘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교훈을 얻기도 했다. 아직 연기를 한마디로 정의할 단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신인 때보다는 확실히 유연해졌고 여유가 생겼다.
- 그렇게 10년을 보낸 후 <노무사 노무진>을 만났다. 이 작품이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갔으면 하나.
<노무사 노무진>을 통해 팀워크를 배웠다. 무진스의 컴퍼스인 경호 오빠가 한축에서 중심을 잡아주면 세 배우가 합심해 완전한 원을 그릴 수 있었으니까. 피해자들의 사연이 주를 이루다 보니 우리 작품을 무겁게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더 많은 시청자와 함께 호흡하기 위해 코미디도 열심히 넣었고 작품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이야기에 온기를 배가하기 위해 힘썼다. 작품을 볼 땐 TV 앞에서 즐겁게 웃고, TV 전원을 끈 후엔 마음 한구석에 사유 하나를 남기는 작품으로 남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