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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J 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 백현진, '연기와 예술이 연동되는 즐거움'

백현진은 배우이자 화가, 음악가, 현대미술가다. 박찬욱 감독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백현진과 장영규 음악감독의 어어부 프로젝트가 보여준 독창성에 찬사를 보냈고, 설치미술가로서 그는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등의 작품에서 백현진을 배우로 처음 인식한 사람들은 그가 천재적인 신 스틸러라고 생각한다. 전주국제영화제(이하 전주영화제) 올해의 프로그래머로 선정된 백현진루이스 부뉴엘 만년 3부작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 <자유의 환영>(1974)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 그리고 그가 출연한 <뽀삐>(2002) <경주>(2014)를 선택했다. 백현진의 연출작 <디 엔드>(2009) <영원한 농담>(2011)도 관객을 만난다. 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서울 연남동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을 찾아 루이스 부뉴엘과 그의 연기 경력, 경계를 넘어 확장되고 있는 백현진의 예술 작업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 배우 류현경, 연상호 감독에 이어 올해의 프로그래머로 선정됐다. 문석 프로그래머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 바로 수락했다고 들었다. 루이스 부뉴엘의 만년 삼부작이 단번에 생각난 이유는 무엇인가. 출연작 중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뽀삐>와 <경주>를 고른 배경도 궁금하다.

= 젊었을 때 루이스 부뉴엘 감독이 죽기 전 찍었던 세 편의 영화를 너무너무 재미있게 봤다. 굉장히 지혜로운 할아버지가 인류의 문명, 역사, 감정처럼 복잡한 이야기들을 무척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는 것 같아 놀라운 작품들이다. 그중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친구들 영화제에서 봤지만 나머지 두 편은 극장에서 보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세 편 모두 극장에서 몰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고른 작품들이다. 출연작 가운데 박찬욱, 김지운, 류승완, 홍상수 등 쟁쟁한 감독들의 작품이 많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덜 본 영화를 선택해서 보여주고 싶었다. 배우들 사이에서 내 연기가 회자되기 시작한 작품이 <경주>다. “백현진 영화 봤어? 연기를 진짜 이상하게 해.” 장률 감독님이 중국에서 만든 영화들을 특히 좋아하기도 해서 이번 영화제에서 감독님 작품을 틀고 싶었다. 장영규 음악감독이 김지현 감독의 영화를 계속 작업했는데, 당시 그 감독의 영화가 무척 재미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뽀삐>를 골랐다.

- 연출작 <디 엔드> <영원한 농담>은 영화제에서도 상영된 적이 많지 않은 작품들이다.

=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하거나 해외 미술관에서 전시한 것 외에는 보기 어려웠던 작품들이다. 그래서 <뽀삐>와 함께 상영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현대 미술에서는 비디오라고 부르고 영화 쪽에서는 단편 영화라고 칭하고 나는 배우나 스태프들에게 동영상이라고 표현한다. 내가 현대 미술 쪽에서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이름도 가져가야겠다는 마음으로 만든 건 전혀 아니었다. 어떤 영감이 떠오를 때 음악으로 풀릴 때도 연기로 소화할 때도 그림으로 그릴 때도 있는데 내가 그동안 다뤘던 매체로는 풀리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러다 내가 판단했을 때 훈련이 잘된 배우들과 동영상으로 작업하면 머릿속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들을 추적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동영상이라는 매체를 선택했다. <디 엔드>의 채수진 프로듀서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오래 일했는데, 편집이 끝난 후 자신의 네트워크가 있는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이 작품을 소개했다고 한다. 그래서 공식 초청을 받을 수 있었는데, 당시 개인적인 이유로 심한 우울증을 앓아서 작품을 그냥 묵히게 됐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영화에 참여한 스태프와 배우들, 김우형 촬영 감독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좀더 적극적으로 작품을 선보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다 작년에 어떤 인상적인 하루를 경험했다. 이것을 동영상으로 찍으면 <디 엔드> <영원한 농담>에 이은 ‘끝 삼부작’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연출할 영화의 제목은 <하루 끝의 끝>이다.

- 신작은 영화제에서 공개될 가능성이 높은가.

= 일단은 그렇게 하려고 생각 중이다. 짐 자무쉬가 미국 <SNL>(Saturday Night Live)에서 연출했던 에피소드를 묶어 장편 영화로 만든 <커피와 담배> 같은 형식이 되지 않을까 싶다. <디 엔드>는 류승범, 박해일, 엄지원, 문소리가 출연하는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고 <영원한 농담>은 박해일, 오광록의 듀엣 쇼다. 어떤 죽음과 이별을 다루는 이번 작품은 여성 배우들이 중심이 될 것 같다. <디 엔드> <영원한 농담>에 이어 <하루 끝의 끝>도 김우형 촬영감독이 찍어주기로 했다.

- 연출자로서 루이스 부뉴엘에게 받은 영향도 있나. 이번에 상영하는 <디 엔드> <영원한 농담>에서 부뉴엘스러운 요소를 찾아볼 수 있을까.

= 부뉴엘을 생각하며 만들지는 않았다. 어떤 매체든 레퍼런스 없이 작업한다. 오히려 20대 초반부터 교류했던 홍상수 감독을 피해 가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어어부가 <강원도의 힘>의 엔딩곡에 참여하게 되면서 영화를 미리 봤는데, 내가 기존에 알던 영화와 너무 달라서 깜짝 놀랐다. 그때부터 ‘홍빠’가 됐다. 계속 신작을 내놓은 어마어마한 예술가와 언어도 지역도 같고 가끔 물리적으로 볼 수도 있고 같이 술도 마시다 보니 알게 모르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디 엔드> 때는 횟집에서 너스레를 떨며 일부러 술이 아닌 사이다를 마시는 장면을 넣는 식으로 홍상수 감독과 유사한 요소를 의도적으로 삭제했다.

- <경주> 상영 후 배우 박해일과 1시간 정도 토크 시간을 갖는다. 박해일과는 언제부터 인연이 있었나.

= <디 엔드>에 출연한 배우들은 그동안 나와 함께 작업했던 감독들이 섭외해 줬다. 홍상수 감독, 김지운 감독이 다른 주연 배우들을 연결준 후 박찬욱 감독에게는 박해일을 섭외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나한테 왜 제일 어려운 사람을 시키냐. 박해일은 누구 말도 안 듣는다”고 하는 거다. (웃음) 예전부터 너무 좋아했던 배우라며 해일이에게 연락하자 마침 어어부의 팬이었다며 함께 작품을 하게 됐다.

- 배우이자 화가, 설치미술가, 행위예술가, 음악가이기도 하다. 각각의 정체성이 다른 영역의 창작에 주는 영향도 있나.

= 완전 있다. 최근에 더 체감하고 있다. 서로 연동되면서 긍정적으로 확장된다. 음악가와 미술가는 기본적으로 혼자 하는 일이다. 평소 사교 활동을 열심히 하는 편이 아니라 모임도 전혀 안 다닌다. 오죽하면 오늘 회사 회식도 안 간다고 했겠나. (웃음) 그러다 현장에 연기하러 가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일시적인 소속감을 느끼게 된다. 혼자 계속 고립된 것보다는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보컬리스트나 음악가, 미술가로서 즉흥에 훈련이 됐기 때문에 현장에서도 테이크마다 다른 연기를 할 수 있다. 사나운 빌런이나 성격이 순한 아저씨를 연기하면 그 캐릭터의 성격이 다음 날 그림을 그릴 때 묻어나기도 한다. 점점 OS(운영체제)가 안정화되고, 나는 유저로서 이를 운용하는 능력이 점점 늘어가는 단계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참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