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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파벨만스’, 카메라 너머의 불온한 것들

필름 카메라는 한 방향을 바라볼 수밖에 없기에, 시선의 반대편에는 언제나 누락된 것들이 남겨진다. 영화를 보는 체험도 비슷할 것이다. 어느 한 장면에 깊이 몰입한 관객은 영화에 담긴 다른 것들을 놓치곤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 도입부에서 어린 시절의 새미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그들이 함께 보는 <지상 최대의 쇼>에서 선로 위를 달리는 기차는 장애물과 부딪히고 탈선해 다른 객차를 모두 부순다. 어린 소년을 한순간에 사로잡고 잊지 못할 경험으로 각인되는 것은, 새미의 부모가 장담한 서커스와 광대와 곡예사가 나오는 아름다운 꿈이 아니라 경로를 벗어나 폭주하는 기차가 주변에 있는 것들을 파괴하는 장면이다.

이 순간은 역설적이다. 영화가 전하는 강렬하고 원초적인 체험은 어린아이 새미를 순식간에 스크린에 몰입하게 만들고 그를 위대한 영화감독으로 거듭나게 하는 단초가 된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히면서 새미는 두번 다시 영화를 보는 일에 이만큼 몰두하지 못한다. <파벨만스>에는 새미가 연출한 작품을 상영하는 몇 차례의 장면이 묘사되는데, 어느 순간부터 새미는 스크린을 집중해서 바라보지 못한다. 영화에 몰입해서 관람하는 관객의 경험과는 다르게 필름을 자르고 붙이며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영화 제작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그의 시선 바깥에 있는 것들을 끌어들인다.

스필버그가 시도하지 않았던 것들

스티븐 스필버그를 투영한 자전적 인물인 새미는 모형 기차 세트가 충돌하는 모습을 8mm 홈비디오로 촬영한 이래로 수많은 영상을 필름에 담아내고 그것을 영화로 완성한다. 집 안에서 조악한 공포물을 만들던 유년기를 지나쳐 고등학생이 되면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흉내낸 서부영화와 2차 세계대전을 모티브로 삼은 전쟁영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파벨만스>에서 가장 중요하게 묘사되는 새미의 작업은 두 편의 기록 필름이다. 하나는 모든 가족과 아버지의 친구인 베니가 동행한 캠프장에서의 홈비디오이고, 다른 하나는 졸업생들이 해변으로 놀러간 ‘땡땡이의 날’을 담아낸 여행 영화다. 기록 필름, 달리 표현하자면 홈비디오, 혹은 다큐멘터리. 스필버그가 필모그래피에서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영화의 방법론.

새미(가브리엘 라벨)는 아버지 버트(폴 다노)의 요청을 받고, 할머니의 죽음으로 우울해하는 어머니 미치(미셸 윌리엄스)를 위해 캠프장에서 촬영한 홈비디오를 편집한다. 문이 닫힌 벽장에서 릴을 돌리던 새미는 필름에 기록된 뜻밖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필름 안에서 베니(세스 로건)를 바라보는 미치의 눈빛을 목격한다. 미치와 베니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서로를 바라보는 것을 마주한다. 피아니스트인 미치가 다른 방에서 연주하는 선율은 방문을 타고 틈입해 새미가 바라본 필름 속 장면의 고통스러운 배음이 된다. 필름을 이어 붙이는 손과 피아노를 연주하는 손은 그렇게 불균형한 위치에서 서로를 만난다.

현장에선 누구도 목격하지 못했지만, 카메라에는 감춰진 진실이 찍혀버린다. 진실은 찍는 자의 의도를 초과해 필름의 한 단면에 새겨진다. 미치의 불륜을 알아챈 새미는 그 장면이 찍혀 있는 필름을 삭제한다. 역설적으로, 편집된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동한 미치는 새미에게 “넌 정말로 나를 바라보는구나”라고 말해준다. 새미는 카메라를 들어 미치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아름다움을 담아낼 수 있었다. 춤을 추는 그녀의 신체를 빛으로 위무하고 슬로모션으로 찬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 새미의 카메라는 그녀의 비밀을 포착하고 가족의 비극을 가속하는 불화의 원인이 된다. 스필버그가 마련한 영화의 장소엔 아름다움과 고통이 혼재되어 있다. 새미를 둘러싼 현실의 공동체는 그가 만들어낸 필름 속의 낙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스필버그는 겉면에 드러난 이미지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면서, 그것의 표면 아래 잠복한 외설스러운 비밀, 잔혹한 기록, 불안과 두려움을 동반하며 다가오는 유지되는 감정의 시간을 받아들인다. 아름다운 것을 담아내기 위해선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카메라로 바라본 시선에는 언제나 불온한 것들이 함께 찍힌다. 이 단순한 역설은 새미를 감싸고 있는 많은 것을 무너뜨릴 것이다. 미치와 버트가 이혼을 고백하고 다른 가족들이 소리치며 격정적으로 반응할 때 새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본다. 그 순간, 거울 속에서 이 상황을 카메라로 촬영하는 자신의 환상이 떠오른다. 호기심과 흥분을 간직한 소년은 카메라를 들고 내밀한 감정을 착취해 필름에 담아낸다. 철로를 이탈한 기차가 주변에 있는 것들을 파괴하던 영화의 장면처럼 새미는 비극적인 순간에서 영화적 흥분을 발견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여인이 눈물을 흘린다. 이뤄지지 못한 사랑에 고통스러워하는 진심을 털어놓는다. 미치는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이혼을 선언하며 남편이 아닌 베니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사랑에 눈물 흘리는 여인을 전면에 내세운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내의 눈물을? 엇비슷한 장면을 거론할 순 있어도, 이 영화의 미치처럼 강렬한 사랑의 정념을 드러내는 사례는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사랑의 충동은 가족이 공유하는 규율을 훼손하기 때문에 스필버그는 언제나 이 감정 앞에서 머뭇거렸었다. <파벨만스>에서 새미, 혹은 스필버그가 미치를 위해 마련한 장면들은 그가 유일하게 만든 여성 멜로드라마의 장면처럼 보인다. 스필버그는 자전적 기억을 영화에 도입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영화에 드러나지 않던 표현을 하나씩 가져온다.

숨겨진 진실, 가장된 거짓

<파벨만스>에서 스필버그가 시도하지 않았던 양식은 기록영화의 외양과 금지된 사랑에 눈물짓는 여성 멜로드라마의 정념이라는 두 축으로 존재한다. 필름에 적힌 진실과 대면한 새미의 눈과 손은 다른 한편으로 최선을 다해 거짓에 임한다. 캠프장에서 찍은 홈비디오엔 그가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진실이 담겨 있기에, 새미는 ‘땡땡이의 날’의 필름을 거짓의 힘으로 완성한다. 졸업 무도회 중간에 ‘땡땡이의 날’ 영화를 학교 친구들에게 상영하는 장면에서, 새미는 영화에 몰입하는 관객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된다. 그는 영화를 제작해 불특정 다수의 관객 집단에 환호와 놀라움을 안겨주는 연출자로 거듭나지만, 또한 현실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린다. 그는 환호하는 로건(샘 레히너)을 묘사하면서 슬픔에 사로잡히고, 닫힌 벽장의 그늘 안에서 태양빛의 영광을 마주 보며, 불화 속에서 위대한 영웅을 그려낸다. 새미는 우울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거짓된 터치로 만들어진 영화가 사람들에게 환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곱씹는다.

반대로 로건은 새미가 연출한 영화에서 영웅처럼 묘사된 화면 속 자신의 모습에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새미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근육질에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는 그는 새미의 영화에서 압도적이고 역동적인 신체 능력을 발휘해 승리를 쟁취한다. 그는 필름에 묘사된 영웅적 면모를 통해 학급 친구들의 환호를 얻는다. 하지만 로건은 아무도 없는 복도에 좌절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새미에게 다가와 분노하며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새미가 묘사한 영화 속 영웅은 자신이 아니고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영화 속 로건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영웅적 이미지와 그것을 생산하는 거짓된 조건에 굴복한다.

새미가 제작한 두편의 기록 필름에서 영화는 숨겨진 진실이자 가장된 거짓을 가리킨다. 영화는 미치와 베니의 불륜을 포착하는 시선이면서, 로건을 ‘그리스 영웅’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허구적인 연출이다. 그것은 현실과 너무 가깝거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캠프장의 기록처럼 실제의 삶이 간직한 비밀과 너무 가까워 현실에 파열을 일으키거나, ‘땡땡이의 날’의 필름처럼 실제의 모습과 너무 멀기에 현실과의 간극을 가져온다. 미치와 로건은 새미가 제작한 영화의 모순적인 표면에 붙잡힌다. 의미심장하게도 그들은 이 영화에서 새미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무성영화 시대의 촬영감독이자 새미의 외할아버지인 보리스(저드 허슈)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고등학생 새미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가족과 예술은 너를 둘로 찢어놓을 것이다. 일견 뻔하게 들리는 그의 말은 <파벨만스>에 새겨진 기록을 통해 한층 공교로운 언급으로 거듭난다. 영화를 이루는 요소들은 둘로 찢길 것이다. 현실의 잔혹한 기록과 필름 속의 아름다운 매혹으로, 새미가 일상에서 바라보는 세계와 카메라를 든 새미의 눈에 보이는 세계로, 그리고 영화와 현실로 나뉘는 새미의 두 가지 삶의 표상으로 분리될 것이다. 스필버그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헌정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 대한 글(‘<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지하, 뉴욕, 그리고 미국이라는 시공간에 대하여’)에서 나는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 가운데 가장 순수하고 근원적인 영화의 매혹에 몰두하는 작업이면서, 동시에 영화가 구축해온 ‘순수한’ 매혹이 얼마나 미심쩍고 추한 것들로 이루어졌는지 되돌아보는 성찰의 영화이기도 하다”라고 적었다. <파벨만스>에서도 이 질문은 유효하다. 순수한 매혹과 불순한 시선은 영화가 생산하는 결과물에 동반되는 것들이다. 카메라를 들고 필름을 이어 붙이며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낸 손짓은 가족을 분열시키고 친밀한 관계를 해체하는 힘을 발휘한다.

새미의 영화 상영과 미치의 피아노 연주는 가족들의 집에 모인 이들에게 같은 것을 보고 듣게 하는 시청각적 무대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그 경험은 희미해지고 있다. 미치가 이혼을 고백하는 순간에 가족은 마지막으로 같은 자리에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은 더는 가족이 함께 있을 수 없다는 통보다. 이것이 <파벨만스>에서 이들이 모여 있는 마지막 장면이다. 가족을 한곳에 머물게 하는 공통의 기반은 사라질 것이다. 그들은 찢어질 것이고 이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새미의 영화는 양가적인 가치를 성취한다. 그것은 가족을 분열시킨 원인이지만, 또한 흩어진 가족의 기록을 돌아보게 만드는 유일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미치와 버트가 네 남매에게 이혼 사실을 통보하던 날 밤, 여동생 레지(버디 보리아)는 ‘땡땡이의 날’ 영화를 편집하고 있는 새미에게 “조각난 가족 중에서 엄마와 가장 닮은 사람은 너”라고 말한다. 레지는 가족이 해체되는 비참한 순간에도 영화를 편집하는 데 몰두하는 새미를 이기적이라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새미는 문밖으로 나가는 레지를 멈춰 세우고 편집하던 영화를 보여준다. 그들은 같은 영화를 본다. 이 순간, 미치의 비밀을 폭로하고 가족의 균열을 일으킨 영화는, 조각나서 흩어지게 될 가족 구성원이 일시적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도록 하는 장치로 되돌아온다. 영화가 전달하는 삶의 회의주의적 중단과 부정은 그러므로 우리의 관계가 깨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게 하는 기제이기도 하다.

존 포드의 구도와 스필버그의 실천

<파벨만스>가 스필버그 필모그래피의 최상단에 속하는 영화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평생을 영화산업의 상징적인 이름이자 능수능란한 시스템의 장인으로 살아온 스필버그의 사적인 고백이 담긴 걸작이라고 말하기에도 조금은 망설여진다.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스필버그 자신이 여전히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유머러스하고 감동적인 마무리라고 언급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스필버그가 현실과 영화의 경계면에서 결말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 방송국 면접을 보러간 새미는 우연히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인 존 포드를 만나 짧은 조언을 듣는다. “지평선이 바닥에 있으면 흥미롭고, 지평선이 맨 위에 있으면 흥미롭고, 지평선이 중앙에 있다면 지랄맞게 지루해.” <파벨만스>의 마지막 장면은 걸어가는 새미의 뒷모습을 보여주던 카메라가 슬쩍 움직여 지평선을 바닥에 맞추는 스필버그식 ‘실천’으로 끝난다. 분명 뭉클하고 귀여운 엔딩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수색자>에 출연한 배우 헨리 브랜든은 회고한다. “촬영을 마쳤을 때 우리는 거의 존 포드를 교수형에 처하고 싶었다. 그런데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았더니 그가 우리를 실제보다 더 대단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쩐지 로건이 새미에게 건네는 말을 닮은 브랜든의 회고는 투박하지만 분명하게 포드의 구도가 연출하는 효과를 증언한다. 바닥에 있거나 맨 위에 있는 지평선은 인물을 거대하거나 위태롭게 보여줄 것이다. 포드의 구도 속에서 인물들은 현실에서보다 고귀하거나 야만적으로 보이며 ‘흥미롭게’ 대단해진다. 이는 물론 스필버그에게도 중요한 전언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말은 <파벨만스>에서 실현된 기록영화, 여성 멜로드라마와 더불어 스필버그가 아직 시도하지 않은 세 번째 장르의 양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서부극이다. 그는 웨스턴의 지평선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문제 앞에서 영원히 망설이는 영화감독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화면을 장식하는 ‘흥미로운’ 지평선의 구도보다 흥미로운 것은 포드가 말한 구도의 효과를 <파벨만스>가 온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데 있다.

포드가 말하는 구도는 인물을 “실제보다 더 대단하게” 만드는 왜곡된 효과이다. 그런데 반복해서 말하지만, <파벨만스>에서 실제보다 아름답고 위대하게 묘사되는 필름의 기록은 현실 속 인물들의 환부와 연결되어 있다. 포드에게는 단지 흥미로운 조건으로 여겨지는 구도의 법칙이 스필버그에게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불가피한 상처와 결부된다. 이 절차를 통과한 <파벨만스>는 존 포드의 조언을 아무런 불편함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미치와 로건이 그랬듯이, 지평선을 조정하는 흥미로운 구도 속에서 누군가는 현실의 고통을 떠올릴 것이다. <파벨만스>는 포드의 지평선을 따르는 대신 그 왜곡된 지평선 속에서 들려오는 나약한 인간들의 목소리를 듣는 영화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으로 목격하는 것은 포드의 조언을 귀담은 스필버그의 ‘실천’이 다른 누구도 아닌 새미의 뒷모습을 비추는 순간이다. <파벨만스>는 새미가 다른 이들을 만나 지평선의 위치를 조정하며 영화를 만들거나, 혹은 가족이나 친구와 재회하며 성장을 이뤄낸 순간을 보여주는 대신 혼자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끝난다. 새미는 누구도 개입하지 않은 화면 안에서 고립된 채로 멀리 떠날 뿐이다. 그렇게 <파벨만스>는 프레임 속의 새미를 왜곡하면서 영화를 마친다. 이 장면은 상쾌한 깨달음이나 완성된 결론이 아니라 여전히 현실과 영화의 윤리적 관계를 탐색하고 있는 스필버그의 미세한 변주로 다가온다. <파벨만스>에서도 스필버그의 인물은 불안과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작은 인간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새미는 영화의 모든 순간을 통틀어 가장 작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