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와 ‘아름다움’을 결합할 수 있을까? 부당하기 짝이 없는 질문 같지만 바보처럼 답변의 과정을 일일이 캐묻기로 하자. 두 단어를 함께 거론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정당성은 어떻게 입증될 것이며, 불가능하다면 그 금기는 무엇을 근거로 주장할 수 있을까? 후자의 견해를 따른다면 우리는 상식적이고 단호한 결론에 도달한다. 아우슈비츠의 참극은 반인륜적인 집단 학살로, 인류 역사의 깊은 블랙홀이다. 그곳에서 발생한 것은 “삶과 죽음의 바깥(한나 아렌트)”에 있는 영역이며 침묵조차 버겁게 만드는 육중한 사태다. 수용소의 재앙이 사고와 언어, 표상의 일대 위기를 가져왔다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언급은 전후의 서구 예술 체계가 직면한 문제의식을 집약한다. 이를 ‘아름다움’이라는 공허한 미적 언어와 연관 짓는 것은 비열한 상상이자 포르노그래피적 극화라는 것이다.
평균적인 교양과 의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기는 어렵다. 차마 반론을 제기할 수나 있을까? 타인의 죽음을 미학으로 다루려는 작업이 얼마나 끔찍한지 짚어낸 명제에 대해서? 그러나 이미지의 재현과 표상에 제한을 두는 관점을 영화에 관한 실천적 명제로 설정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우리는 끔찍한 순간을 떠올리고 마주하는 데 언제나 곤혹스러움을 느끼지만, 영상은 결코 금지를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끔찍한 이미지는 언제든지 출현한다. 지금이 아니라면 다음에 되돌아올 것이다. “증명할 수 없지만 아우슈비츠는 필름카메라에 담겼다”라고 말하는 장 뤽 고다르의 확증 없는 확신은 이런 맥락에서 주의 깊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언젠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추한’ 표상과의 잠정적인 대면을 준비하는 저항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아우슈비츠와 영화를 둘러싼 역설이 발생한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모든 표상과 기록을 말소하고 금지하려던 기획이지만, 카메라는 대상이 무엇이든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매체이다. 그러므로 표상의 금기라는 맹목적 진단에 균열을 일으키는 영화작가들이 출현한다.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 1A 파트에선 조지 스티븐슨의 <젊은이의 양지>에 나오는 두 남녀가 호수에서 애정을 나누는 장면을 홀로코스트 학살 이미지와 결합하는 대목이 있다. 고다르는 2차 대전 시기에 미군 종군 사진사였던 조지 스티븐슨이 강제수용소에서 16mm 천연색 필름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행복을 촬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학살은 할리우드 멜로드라마가 표현하는 행복과 연결된다. 또 다른 작가는 하룬 파로키다. 그는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의 한 장면에서 강제수용소에서 촬영된 한 장의 사진에 담긴 유대인 여성의 표정을 포착하면서 당혹스럽게도 이것이 남성의 시선에 대응하는 매력적인 여인의 반응이라고 말한다.
파로키는 카메라를 향해 돌아보는 사진 속 여인의 시선을 이렇게 규정한다. “이 시선을 통해 그녀는 자신을 다른 장소에 옮겨놓는다. 가로수, 신사, 상점의 쇼윈도가 있는, 이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말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찍힌 희생자의 기록을 거리에서 눈짓을 교환하는 평범한 남녀의 상황과 연결하는 파로키의 논리를 선뜻 이해하기는 힘들다. 여인의 시선을 촬영한 주체는 나치 친위대일 것이다. 이 사진은 수용소에 끌려온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학살하는 과정에서 남긴 피사체의 마지막 기록이다. 그런 이미지를 평온한 일상과 연결 짓는 상상의 근거가 무엇인지, 둘의 결합이 어떤 의미를 산출하는지 즉각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또한 사진 속 여성이 짓는 잠깐의 표정이 특정한 의미로 작용하는지도 분명치 않다. 필름 사진에 우연히 나타난 얼굴에서 남성적 시선에 대응하는 여성의 매혹적인 면모를 읽어내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처럼 느껴진다. 표상 장치인 영화의 역량을 과장스럽게 역설하기 위함이라 해도, 학살의 현장과 일상의 광경을 같은 이미지에 투영하는 논리는 깊은 의문을 안겨준다.
<하룬 파로키-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전시 포스터.
주목할 것은 영화가 선택한 이미지의 이중적인 면모다. 파로키는 시선을 훔치면서 보존하는 카메라의 속성에 주목한다. 여인이 촬영된 사진은 그녀의 생명을 파괴하는 과정의 한 부분이면서 대상의 표상을 보존해낸 순간의 기록이다. 파괴와 보존이라는 모순적 효과가 일정한 시차를 두고 이미지의 표면에 새겨진다. “이미지는 두 개의 관점이 세 번째 관점의 시선과 마주할 때 전제되는 복합성에 따라 펼쳐진다”라고 지적한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문장을 빌리자면 이 장면에는 서로를 마주하는 두 개의 시선과 그들을 교차하는 세 번째 시선이 발생한다. 유대인 여성을 담아낸 카메라의 시선과 카메라를 향해 돌아보는 여성의 시선, 그리고 그 사이에 걸친 파로키의 시선이 이미지의 표면 위에서 접속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한 장의 사진 이미지는 찍는 자와 찍히는 자의 관계 바깥으로 탈출해 원래의 맥락에서 벗어난 해석에 노출된다.
이미지에 붙들린 의미의 불확실함은 이 장면에만 귀속된 것은 아니다.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에서 강제수용소 여성의 사진은 몇 차례 반복되는데, 이와 유사한 빈도로 다뤄지는 이미지가 1944년 연합군의 항공사진에 찍힌 아우슈비츠의 기록이다. 파로키에 따르면 누구도 이 범상한 사진에 주목하지 않았지만, 촬영된 지 수십 년이 지난 뒤 CIA의 연구를 통해 사진에 찍힌 대상이 강제수용소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고다르의 주장은 예시적이었다. 아우슈비츠는 필름에 담겨 있었다. 우리가 발견하지 않았고, 영화적 표상 체계로 정립하지 않는 이중의 실패를 치렀을 뿐이다. 이 사진이 선명하게 드러내는 건 이미지에 남겨진 시대착오적인 잔상이다. 하룬 파로키는 카메라가 관측했지만 발견하지 못한 대상, 공간 내부에 잠재해 있었지만 인식하지 못한 기록을 영화 내부로 침투시킨다. 그러므로 그가 반복해서 실행하는 이미지의 변주는 지워진 기억을 되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지에 고착되어 있는 고정된 맥락을 수정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표상을 둘러싸고 있는 의미작용이 중단되는 사태에 저항하기 위해 나타나는 것이다.
특정한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이미지는 상이한 몽타주의 회로를 통과한다. 파로키는 수용소에서 촬영된 여성의 사진을 일상의 상황과 연결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 존재하는 여성들의 초상과 결합한다. 그 대상은 알제리 여성의 얼굴이다. 영화는 알제리 여성들의 얼굴이 사진으로 기록된 맥락을 설명하고(프랑스는 식민지 신분등록을 위해 베일을 벗은 맨얼굴의 여성들을 카메라 앞에 세웠다고 한다.) 파로키의 손을 빌려 그녀들의 사진 일부를 가린다. 촬영하는 자의 손은 사진 속 여성들의 입을 가리고 눈을 보여주는데, 이때 다음과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의 입은 시선에 익숙하지 않지만, 그들의 눈은 낯선 시선을 마주하는 데 익숙할 것이다.”
손으로 사진 속 여성의 입을 가리는 파로키의 액션은 이름이 없고 표상으로 가시화되지 않는 주변적인 존재들에게 ‘정당한’ 얼굴을 되돌려주는 시도가 아니다. 촬영한 자에게 배타적으로 권리가 주어지는 이미지의 법과 규범에 맞서 촬영된 이들에게 이미지의 기억을 건네주려는 제스처도 아니다. 파로키의 손짓은 오히려 지금껏 영화가 구성한 몽타주의 논리를 갱신하려 드는 해체적 몸짓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찍힌 여성의 표정과 알제리 여성들의 얼굴을 병치하고, 그들의 얼굴을 다시 눈과 입으로 나누어 몽타주가 산출하는 의미를 재발명하는 것이다. 이처럼 파로키가 창안하는 몽타주는 확정적인 의미에 안착하지 않고 친밀함과 낯섦, 가시성과 잠정적인 비가시성의 영역이 혼합된 형태를 이룬다. 파로키에게 두 이미지의 몽타주란 연결과 절단을 종합하는 역설적인 원리로 연출된다.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는 서로 연관 없이 멀리 떨어진 ‘여기’와 ‘저기’의 장면들이 마주치고 흩어지는 구조적 과정으로 전개된다. 영화에서 특별히 반복되는 몇 가지 시퀀스에 공통된 요소들이 있다. 모델의 얼굴에 화장을 덧칠하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손, 피사체를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리는 손, 현미경으로 대상을 관측하는 연구원들의 눈, 사진 이미지를 관측하는 파로키의 눈의 활동이 그런 요소들이다. ‘저기’에 카메라 렌즈에 무심코 노출된 타인의 얼굴과 몸이 있다면, ‘여기’엔 그것들을 관찰하고 분리하고 조정하는 우리의 눈과 손이 있다. 두 영역의 간극과 변형과 변주 사이에서 하룬 파로키는 인간 신체와 기계장치의 반복하는 운동으로 영화적 세계를 재구축한다.
서로 다른 층위에 놓인 이미지의 흔적과 관찰자의 몸짓을 하나의 통합적이고 충돌적인 관계로 엮어낸다는 점에서 하룬 파로키의 몽타주는 지극히 역사적인 제스처에 속한다. 이것이 이 영화가 관측하는 이미지의 비가시성이 겨냥하는 측면이다. 파로키는 화면 내부에 존재하지만 시각적으로 각인되지 않는 대상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외화면 영역에 존재하는 몽타주의 가능성을 인식의 내부로 끌어들인다. 이때 프레임 내부에 집중하는 시선의 탐구와 프레임 바깥 세계의 이미지를 향한 관측이라는 두 방향의 시각적 지향이 함께 발생한다.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이 진정 ‘두 눈’의 사려 깊은 관찰을 요구한다면 이런 이유에서다.
조각난 쇼트의 형태는 시각의 분리적 조건을 상기시킨다. 손의 개입을 통해 얼굴은 눈과 입의 형태로 나뉘고, 가장 멀리서 본 것(항공촬영으로 포착한 아우슈비츠 수용소)과 가장 가까이서 본 것(자신의 손을 뷰파인더 삼아 수용소에서 촬영된 여성의 표정을 확대해서 보는 파로키의 시선)이 접속한다. 이 영화가 서구 시각의 역사를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응시의 맹점을 뚜렷하게 고찰(크리스타 블륌링거)”하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포커스 아웃된 형체로 먼저 제시되지만, 후반부의 같은 장면에 도달했을 때 선명한 윤곽으로 관측되는 흑인 모델의 몸을 마주하는 경험처럼 분할된 시야의 체계는 이미 우리가 머무는 세계 내부에 잠재해 있다. 복수형으로 분리되는 시각은 영화 매체의 근본적인 조건, 수평과 수직이라는 프레임의 규격에 대한 교정으로 확대된다.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은 영화의 수평선(인간의 시각이 바라보는 ‘Land’로서의 지리적 조건)과 수직선(항공 촬영의 시각이 관측하는 ‘Fly vision’으로서의 광학적 조건)을 가로지르며 시공간의 물리적 연속성으로 수렴되지 않는 구조적 몽타주의 논리를 발명한다.
서치라이트의 빛이 너무 강렬하다면, 온갖 기계장치들의 소음이 너무 과도하다면 리얼리티는 잠식되어버린다. 이것이 아우슈비츠에서 탈출한 두 명의 생존자들이 가스실의 존재를 고발했음에도 수용소의 이미지가 영상의 규범에 포착되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므로 리얼리티를 초과하는 결합과 상상이 필요하다. 이는 표상에 덧입혀지는 두 가지 삶의 형태, 현실의 삶과 이미지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환기한다. 아우슈비츠를 촬영한 항공사진과 유대인 여성의 표정을 붙잡은 스틸샷은 현실의 조건에서 삭제되었지만, 이미지의 조건에서 몇 번이고 우리를 재구성할 것이다. 파로키가 배치하는 이미지의 계열에는 미적인 추체험과 정치적 저항이 한 몸으로 격돌하고 있다. 들뢰즈의 말을 빌려 질서를 구성하는 미디어의 이미지와 정보에 반대하는 것, 그것이 파로키의 영화가 수행하는 작업이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는 ‘진정한 동시대성은 시대착오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하룬 파로키가 조직한 미결정적인 이미지는 연속된 장면의 논리 안에서 시차를 발생시키며 시각적 성찰을 제공한다. 1944년에 촬영되었지만, 그동안 우리가 전혀 인지하지 못하던 수용소 이미지의 각인은 얼마나 선행적이었는가. 혹은 반대로 우리가 뒤늦게 확인한 이미지의 현전은 얼마나 회고적인가. 시차가 있음으로 그동안 드러나지 않던 이미지의 외곽이 표상의 체계에 진입한다. 그러니 우리는 아우슈비츠에서 촬영된 여성의 표정을 일상의 광경과 연결 짓는 몽타주가 끔찍한 상상이거나 주관적인 해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이미지 바깥으로 탈출할 수 있는 시차적 현존의 가능성이 이미지 안에 성립하고 있(었)음을 노출하는 영상의 긁힌 자국이다.
카메라는 눈앞에 놓인 대상을 약탈하면서 보존하고, 비가시적인 형태로 사라진 이미지는 뒤늦게 되돌아온다.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의 궤적은 단지 고정된 시각과 의미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영상의 근본적인 조건으로부터 탈출하는 경로를 꿈꾼다.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스크린을 바라보는 주체의 부동성을 조건으로 삼는다. 레프 마노비치가 영사 장치에 대해 논의한 대로 “뒤러의 원근법 기계, 카메라 옵스큐라, 사진, 영화와 같은 스크린 기반 장치에서 주체는 움직이지 않는다.” 영화는 세계를 고정하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감금을 수반한다.
파로키가 구성한 이미지의 동선은 감금된 조건을 넘어선다.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은 아우슈비츠에서 탈출한 두 포로의 행적을 언급하면서, 그들을 수용소의 사진을 뒤늦게 확인한 두 명의 CIA 연구원들과 결합하고, 로베르 브레송의 <사형수 탈옥하다>에서 탈출에 성공하는 두 명의 탈옥수 이미지를 상상케 한다. 2000년에 제작된 <교도소 이미지>에서 하룬 파로키는 <사형수 탈옥하다>를 장 주네의 <사랑의 노래>와 함께 인용하며 말한다. “시네마는 언제나 교도소에 매력에 빠져 있었다. (...) 주네와 브레송의 영화에서 발췌한 장면에서는 교도소가 성적 위반의 장소, 또는 인간이 자신을 사람이자 노동자로 만들어야 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사형수 탈옥하다>의 주인공은 구금의 장치를 탈옥의 도구로 바꾼다”. 영화의 뒤늦은 지각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는 언제나 출구를 모색해왔다. 영화와 역사와 표상이 비어 있는 자리에 파로키는 서로 다른 시간대에 놓인 이미지들의 교환을 채워넣는다. 그들은 프레임의 닫힌 어둠에서 벗어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카메라는 도입부에 나온 인공 수로에 돌아온다. 도입부에서 파로키는 이런 내레이션을 들려준 바 있다. “불규칙하지만 분명한 규칙이 존재하는 수로의 움직임은 우리의 눈을 가두면서 시선을 속박하지 않고 사고를 자유롭게 한다.” 불규칙하면서도 규칙이 관측되고, 관찰자의 시선을 가두면서도 그들을 속박에서 해방하는 모순적 조건의 틈새에서, 모든 것을 무릅쓰고 영화는 되돌아올 것이다. 감금된 공간에서 탈출하는 영화의 역량은 파괴되지 않고 돌아올 것이다. 이미지라는 무한정한 (불)가능성의 몸을 빌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