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배창호 울주세계산악영화제 집행위원장, "산악 문화의 확산과 함께 지속 가능한 영화제를 꿈꾼다"

“영화감독이 신작을 가지고 인터뷰 해야지.” 몇해 전, 추석영화 흥행사와 관련된 특집 기사를 준비하다가 배창호 감독을 섭외할 일이 있었는데 그는 과거 영화에 대해 다시 얘기하는 걸 한사코 거절했다. 배 감독은 자신이 만든 영화를 “한번도 마음 편히 본 적 없다”고도 말했다. 5년 전, 그와 함께 필리핀 다바오에 동남아시아 영화 학도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출장간 적 있는데 그때 배창호 감독은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고만 귀띔해주었다. 전작 <여행>(2009) 이후 내놓는 오랜만의 신작이 어떤 이야기일지 무척 궁금했지만 그는 말을 아꼈다. 그런 그가 신작 대신 제3회 울주세계산악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반가움 반, 놀람 반의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산 좋아하는 사람치고 낭만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없듯이 배창호 감독 같은 낭만을 아는 사람에게 산악영화제라니, 무척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터뷰를 요청하기 위해 오랜만에 전화 통화를 한 그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씩씩하게 말했다. “하하. 김 기자, 밥 먼저 먹고 인터뷰하자고.”

-영화제 준비는 다 끝났나.

=막바지 준비를 정신없이 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영화제를 알리는 게 최우선이라 스탭 모두 홍보에 주력하고 있다.

-긴장도 많이 되겠다.

=데뷔작 개봉을 앞둔 신인감독의 심정이다.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1982) 개봉했을 때 기억이 나나.

=되게 더운 여름날에 시사회가 열렸다. 극장이 사람들로 꽉 찼다. 극장 안도 더웠고, 몸이 긴장된 탓에 안경알에 김이 서려 수십번 닦았다가 넣었다가 했다. 이제는 나이를 먹어서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영화제 개막을 담담하게 기다리고 있다. 준비한 만큼 결과가 나오겠지.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 반갑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당장 작품에 들어갈 수도 없고,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또 산악영화제가 가진 컨셉이 신선했다. 잘할 수 있겠다 싶어 선뜻 맡기로 했다. 집행위원장이라는 경험도 하고 싶었다.

-산을 좋아하나.

=40대였던 1992년, 체중이 95kg가 넘어가면서 뛰는 것조차 불편해 건강을 관리해야겠다 싶었다. 당시 살던 집 근처에 야트막한 산이 있어 그곳을 올랐다. 그런데 그 산조차 오르기 힘들어 열몇번씩 쉬었다가 올랐고, 줄넘기도 열심히 했다. 계속 하다보니 재미가 붙었고 결국 체중을 감량하는 데 성공했다. 산을 타면서 고통의 즐거움을 알았달까. 올라갈 때는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내려올 때는 성취감이 아주 컸다. 이후 혼자서 내장산에 가서 단풍을 구경하고, 강원도의 설악산, 충청도의 월악산을 두루두루 다녔고 건강도 덩달아 좋아졌다. 딸이 어릴 때 서울 구의동으로 이사왔는데 딸을 데리고 근처 아차산을 종종 올랐다. 산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그렇게 동화 같을 수 없었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라고 한번 안 타면 산에 계속 안 가듯이, 요즘은 등산을 하지 않는데 영화제가 끝나면 ‘영남알프스’의 멋진 산들을 한번 올라가봐야겠다 싶다.

-산의 어떤 점이 매력적이던가.

=보약 한첩을 먹은 것 같다고나 할까. 정신이 맑아지고 육체가 가벼워진다. 그런데 산에 가기까지가 너무너무 귀찮다. (웃음) 아내(배우 김유미. 배창호·김유미 부부의 자전적 이야기였던 <러브 스토리>(1996), <정>(1999), <여행>에 출연)도 산을 좋아하냐고? 그럼, 데이트를 신청할 때 “지리산 밑에까지만 갑시다”라고 해서 복장을 맞춰 입고 데이트한 적 있다.

-하산 길에 막걸리도 마시나. (웃음)

=산만 가면 맥주, 소주 생각이 안 나고 오로지 막걸리만 생각난다. 금주한 지 꽤 됐지만 막걸리를 매우 좋아했다.

-‘새로운 도전’이라는 슬로건에 맞게 올해가 법인 출범 원년인 울주세계산악영화제가 더 확장됐다.

=지난 4월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됐는데 섹션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섹션 하나하나가 만족스러웠다. 산악영화뿐만 아니라 인간 한계에 도전하거나 자연과 환경을 소재로 다룬 영화들도 함께 모았다. 가족이 와서 볼 수 있는 ‘움프 투게더 섹션’도 마련했다. 산악영화제로서 정체성을 지키되 스펙트럼을 좀더 넓혀가려 했다.

-특별히 좋아하는 산악영화가 있나.

=1978년 현대종합상사 케냐 지사장으로 간 적 있다(그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현대종합상사에 입사해 회사 생활을 하다가 사표를 내고 1981년 이장호 감독의 <어둠의 자식들>(1981) 조감독을 맡았다. 당시 배 감독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을 인용하면, “전공 과목이 경영학인 내가 해외근무까지 하면서도 영화감독이 되고픈 꿈 때문에 귀국한 걸 보고 친구들은 괴짜라고 했다. 샐러리맨인 내가 직장 근무보다 영화감상에 시간을 보냈고 나름대로 영화를 하겠다고 좋은 직장을 그만두었으니 동료들은 이해를 못했다.”-편집자) 그곳 국립공원을 갔는데 설산을 배경으로 들소 떼들이 물을 찾아 우르르 이동하는 광경을 보고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의 사막, <닥터 지바고>(1978)의 설원, <해바라기>(1970)의 해바라기밭 등 자연 풍경이 스토리에 잘 녹아든 영화를 좋아한다.

-<클리프 행어>(1993) 같은 역동적인 산악영화를 꼽을 줄 알았는데.

=산악영화라면 초등학생 때 봤던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의 <산>(1956)을 좋아한다. 이 영화는 형제이야기다. 형 재커리는 베테랑 등반 가이드로 활약하다가 사고를 당한 뒤 더이상 산을 오르지 않는다. 그에게는 하나뿐인 가족인 동생 크리스가 있다. 그들이 사는 에베레스트에 비행기가 추락하자 크리스는 산을 오르려고 하고 , 재커리는 마지못해 동생과 동행한다. 기억이 오래 남는 영화라 프로그래머에게 상영해달라고 요청했고, 고전영화들을 선정한 ‘움프 클래식 섹션’에서 상영된다.

-‘여성 그리고 산’이라는 주제로 꾸린 ‘울주 비전 섹션’이 눈에 띈다.

=용기 있고 멋진 여성 등반가들을 그린 중·단편 13편을 준비했다. 한국에도 여성 등반가가 많다. 1963년부터 2018년까지 히말라야를 오른 모든 등 반대와의 인터뷰를 기록한 엘리자베스 홀리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히말라야의 기록자-엘리자베스 홀리>도 이 섹션에 포함됐다. 산악영화에 다큐멘터리가 많은데 스턴트맨과 CG 없는 스릴 만점의 장르라고나 할까.

-좀더 많은 지역 주민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고민도 하고 있을 것 같다.

=‘움프씨네콘서트’라는 행사를 준비했다. 김훈 작가, 정호승·이동순 시인의 강연이 진행된다. <히말라야>(2015) 상영이 끝난 뒤 영화 속 삽입곡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를 부른 김창완 밴드의 공연과 <리틀 포레스트>(2018) 상영이 끝난 뒤 가수 조동희·장필순·권진원의 공연, <걷기왕>(2016) 상영이 끝난 뒤 여행스케치의 공연이 각각 펼쳐진다. 가족과 함께 텐트 치고 누워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자리도 있다.

-영화제가 개최 2회 만에 국제산악영화협회에 정회원으로 가입했고, 아시아영화진흥기구에도 가입돼 넷팩상을 신설했다. 영화제가 산업적 기능까지 갖춘 셈인데 이와 관련해 어떤 구상을 하고 있나.

=지속 가능한 영화제가 되려면 산악 문화가 확대돼 산악영화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커져야 한다. 등산 인구가 천만명이 넘고, 주말마다 등산복을 입고 산을 오르며, 국토의 70%가 산인 만큼 우리 삶은 산과 떼려야 뗄 수 없는데 산악 문화는 그만큼 발전하지 않은 것 같다. 전국의 산악인들이 배낭을 메고 울주에 와서 영화도 보고 영남알프스의 빼어난 경치도 감상했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질문을 하자면, 신작을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세한 얘기를 할 수 없지만 예수의 일대기를 그린 이야기로 프리 프로덕션을 진행하고 있다. <황진이>(1986)를 찍을 때부터 구상했던 아이템인데 ‘언젠가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소망만 가지고 있다가 산업 규모가 커지면서 ‘이제는 할 수 있겠다’ 싶다. 10여년 넘게 준비하다가 수면장애를 겪기도 했지만 지금은 극복하고 시나리오를 틈틈이 수정하고 있다. 투자자를 알아보고 있다.

-요즘에도 한국영화를 많이 챙겨보나.

=많이 본다. 메인스트림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을 보면 기술적인 완성도가 놀라울 정도다. 특히 프로덕션 디자인이나 시각특수효과(VFX) 기술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한 것 같다. 하지만 흥행이 최우선 목표다보니 소재가 한정적이고 스토리가 작위적이며, 흥행 강박증이 걸린 사람인 양 자극적인 표현에 매달리는 영화가 많다. 인간을 좀더 깊이 있게 다룰 수 있음에도 선과 악으로 도식화시키고. 영화는 삶을 비추고, 영화 작가로서 태도가 중요한 매체라는 점에서 아쉬운 작품도 많다. 흥행에 성공하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하는 건 이해가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도 흥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 좋겠다.

-산업의 헤게모니가 자본으로 넘어간 지 오래됐는데 이러한 풍경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나.

=산업이 갈수록 양극화되는 것 같다. 제작비 규모를 좀더 줄여도 될 텐데 말이다. 과거에도 제작비에 대한 압박은 컸다. 압박이 큰 만큼 비용을 절감하는 훈련도 됐다. 컷 수를 줄이고, 시나리오를 압축시켰으며, 머릿속에서 편집하며 찍었다. 볼거리가 중요한 장면을 원하는 대로 찍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말이다.

-신작을 찍는다면 함께하고 싶은 배우가 있나.

=영화가 들어가야 누가 어떤 배역을 하는지가 정해지겠지. 지금은 대답 못한다. 활동 중인 배우들은 연기가 상당히 현실적이다. 깊이 있는 시나리오가 있다면 그들은 인간의 깊은 면모까지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작업한 동료 중에서 누가 가장 많이 생각나나.

=두 사람이 있다. 일단 안성기씨. 만든 영화 17편 중에서 13편을 함께했으니까 얼굴이 많이 떠오른다. 또 다른 한명은 정광석 촬영감독(<꼬방동네 사람들>부터 <적도의 꽃>(1983), <고래사냥>(1984),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 <깊고 푸른 밤>(1984) 등 배창호 감독과 콤비를 이뤄 만든 작품들이 연달아 히트했다.-편집자), 강원도만 가면 생각나. <고래사냥>도, <꿈>도 거기서 찍었으니까. 잉마르 베리만 감독이 스벤 닉비스트 촬영감독과 작업을 많이 했다. 한 인터뷰에서 잉마르 베리만 감독이 “영화를 다시 찍고 싶지 않은데 스벤 닉비스트와 호흡을 맞추면서 작업하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다”고 말한 적 있다. 그 말처럼 나 또한 정광석 촬영감독과 호흡이 잘 맞았고, 그로부터 많은 걸 배웠다. <꼬방동네 사람들>이 흥행한 뒤 함께 술을 마셨는데 그가 “배 감독, 세 작품까지 성공해라”고 조언해주었다. 세 작품 연달아 성공한 뒤 다시 함께 술을 마시는데 그가 “다섯 작품까지 성공해”라고 말했다. 다섯 작품을 성공한 뒤 술을 마셨는데 정 촬영감독이 “열 작품까지 성공해”라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그는 내가 들뜨지 않게 바로 잡아준 선배였다.

-지금까지 만든 영화 중에서 최근 들어 가장 많이 생각나는 작품은 뭔가.

=<꼬방동네 사람들>은 디지털로 복원돼 블루레이로 나왔고, 해외에서도 가끔 상영돼 재조명을 받곤 한다. <꿈>은 최근 프랑스에서 소개됐다. <정>(1999)은 유튜브에서 스페인 관객이 스페인어 자막을 입혀 올렸는데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본 횟수가 무려 190만건에 이르렀다. 시간이 지나도 조명을 받는 건 반가운 일이다. 사람들이 내 영화를 오랫동안 기억해주는 거니까.

-지난 7월 열린 충무로뮤지컬영화제에서 조직위 위원을 맡기도 했는데, 최근 대외 활동이 많아 좋아 보인다. (웃음)

=그건 사수이자 충무로뮤지컬영화제 조직위원장인 이장호 감독이 시켜서 했다. (웃음) 물론 충무로라는 이름에 대한 애정도 있었지만 말이다.

-JTBC <전체관람가>를 통해 단편영화를 만든 이명세 감독처럼, 기회가 주어진다면 단편영화를 만들 생각도 있나.

=장편과 단편 가리지 않고 도전하고 싶다. 좋은 이야기가 있다면 단편도 좋다.

-영화제 개막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 어떤가.

=지난 몇 개월 동안 집행위원장 업무를 하면서 여러가지를 배웠다. 앞으로 일을 하면서 더 많이 배울 것 같다. 영화제에 푹 젖어서 영화 일도 열심히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