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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프랭크 시내트라부터 비욘세, 위켄드까지

일단 전체적인 느낌은 들어보기 전에 무작정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몽환적이고 어두운 질감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간혹 리듬감 있는 트랙이 섞여 있을지언정 경쾌하고 밝은 음악은 보이지 않는다. 소설로 유추할 수 있는 영화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질 법한 선곡이다. 또 <Ana and Christian>처럼 제목에서 이미 두 주인공의 이름을 담고 있는 트랙의 경우, 영화의 특정 장면에서 핵심 무드로 쓰였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기도 하다.

음반 전체를 통틀어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은 아무래도 위켄드다. 위켄드는 캐나다 출신의 1990년생 알앤비(R&B) 보컬리스트다. 2011년경부터 무료로 공개한 몇몇 믹스테이프가 주목을 받으며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지금은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위켄드와 관련해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그가 알앤비의 서브 장르이자 최근 몇년 사이 가장 두드러진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는 ‘피비알앤비’(PBR&B)의 대표주자라는 사실이다.

피비알앤비란 쉽게 말해 정통 알앤비보다 한층 더 몽환적이고 전자음이 가미된 알앤비의 한 경향인데, 결론적으로 위켄드와 이 영화의 만남은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이라고 말하고 싶다. 대충 엮는 게 아니다. 수많은 피비알앤비 뮤지션 중에서도 위켄드가 단연코 이 영화와 가장 잘 어울린다. 위켄드 특유의 사운드 스타일과 영화 분위기가 맞아떨어짐은 물론, 위켄드가 그동안 선보여온 음울하고 퇴폐적이며 때로는 도착적인 가사가 영화 주제와 완벽하게 부합하기 때문이다. 비록 <Earned It>은 이런 기대(?)보다는 조금 얌전한 감도 있지만 뮤직비디오를 본다면 또 생각이 달라지리라 확신한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이름은 역시 비욘세다. 거두절미하고, <Crazy in Love>가 이렇게 리믹스되어 재탄생할 줄 누가 예상했을까? <Crazy in Love>는 모두가 아는 비욘세 최고의 히트곡으로서, 흥행 성적 말고도 음악적인 의미를 논할 수 있는 곡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기승전결이라는 용어가 무색하게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터뜨리는’ 이 곡의 폭발력은 당시로서는 그 구성의 맥락에서 어떤 ‘상징성’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앞 문장이 무색하게 <Crazy in Love(2014 Remix)>는 원곡을 완전히 해체한 후 다시 만들어버렸다. 흡사 위켄드의 정체성처럼 피비알앤비 스타일로 거듭난 것이다. 사운드가 완전히 바뀜에 따라 가사 역시 새로운 맥락에서 또 다른 의미를 담게 되었고, 더 나아가 영화 장면들과 결합하며 더 극적인 효과가 가능하게 되었다. 완전한 리믹스, 혹은 그냥 별개의 새로운 노래. 어느 쪽으로 불러도 좋다. 이 음반의 베스트 트랙으로 꼽고 싶다. 이 밖에도 음반에는 롤링스톤스나 프랭크 시내트라 같은 옛 이름도 보이고, 에미넴과의 작업으로 유명해진 스카일라 그레이의 음악도 담겨 있다. 영화와 함께 감상하는 것이 정석이라지만 음반만 따로 즐겨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