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센티멘탈 밸류> 내가 사는 집

<센티멘탈 밸류>

비극은 구스타브(스텔란 스카르스가르드)가 어머니의 죽음과 간발의 차로 동행했기 때문에 생겼다. 어느 오후에 집을 나섰을 때, 소년은 두고 온 물건이 생각나 다시 현관문을 두드렸고 어머니가 문을 열어주었다. 소년은 어머니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윽고 다시 일과를 향해 나아갔고 어머니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가 자살했다. 이후 소년의 삶은, 인간이 다 볼 수 없는 것 너머를 담아내는 카메라의 전지적시점에 집착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아들을 보내고 어머니가 어떤 눈빛으로 복도를 걸었는지, 닫힌 문 너머에서 어떻게 목을 맸는지 내면의 카메라로 수없이 찍고 또 찍었기 때문에 그는 영화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운 좋게도 남들에게 예술가라 불리게 됐다. 타인의 입장을 상상하고 허구의 장면을 짓는 일. 남자는 그 속에서만 멀쩡히 살았으므로 거기가 남자의 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센티멘탈 밸류>의 도입부엔 연민을 부르는 구스타브보다 한결 담백한 얼굴로 예술의 명령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 묘사된다. 공연 직전, 무대공포증이 극심한 배우 노라(레나테 레인스베)가 명치를 짓누르는 실크 드레스를 찢어버릴 기세로 도망친다. 일순간 상황을 파악한 조연출과 의상디자이너가 각자의 모서리에서 치고 들어와 찢긴 드레스를 순식간에 덕트테이프로 봉합하고 공황에 빠진 배우를 무대 위로 밀어넣는다. 한쪽이 찢을 때 한쪽은 이어 붙이는 동작이 제각기 너무도 단호한 나머지 하나의 안무처럼 보일 지경이다. 제작진은 일말의 망설임이 없고 배우는 몸부림치면서도 자신의 숙명을 아는 눈치다. 이토록 북구 영화다운 무표정의 유머에 도리 없이 항복하는 동안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인간이 저마다의 삶에서 최우선으로 삼은 명제란 때로 얼마나 위압적인가. 이날 밤 오슬로 국립극장에서 열린 <갈매기>의 백스테이지를 지배한 명제는 다음과 같았다. “무대는 계속 되어야 한다.”(The Show must go on)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 가족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아버지 구스타브가 이렇다 할 용서도 구하지 않고 대뜸 시나리오부터 내밀자 딸 노라는 동요한다. 연극을 깔보는 편협한 영화인의 초상까진 견뎌냈건만, 아버지로서의 과오마저 우회하는 뻔뻔함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동시에 이 순간 공기를 지배하는 힘이 부녀의 해묵은 감정만은 아닌 듯싶다. 은밀히 꿈틀거리는 기류는 동족 혐오이자 (어쩌면) 동류애다. 예술의 ‘진정성’이 갖는 강력한 위용을 경력 안에서 흡수했을 노라는 본능적으로 높디높은 내면의 담장 한쪽이 허물어질 위험을 감지한다. 평생 거리를 두고 장막을 치면서 보존해왔던 고통의 정원이 새로이 경작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노라를 불안하게 만든다(장례식에서 아버지를 만난 뒤 동생에게 털어놓는 대사, “이제 와서 아버지 노릇 하려는 건 아니겠지?”). 오프닝의 강력한 증상이 은유하듯이 아버지와의 조우가 일으키는 감정은 분노라기보다 두려움이다. 얼마 뒤 노라는 공교롭게 한시에 집을 찾은 아버지를 피해 정원을 가로질러 달아난다. 이전까지는 별반 신경 쓴 적 없었던 낡은 화병 하나, 잊었던 ‘정서적 가치’를 품에 안은 채.

부녀의 갈등이 처음 표면에 떠오른 레스토랑 장면의 전환점도 흥미롭다. 노라의 매몰찬 거절에 상심한 구스타브가 레스토랑 창가에 몸을 기대면 화면이 암전된다. 그러자 갑자기 낯선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치를 피해 도주하는 어린 남매가 보이고 그중 누나 혼자만 달리는 기차 위에 올라타 살아남는다. 창밖에서 붙잡힌 동생의 모습을 발견했지만 외면해야만 하는 소녀의 눈물을 향해 카메라가 천천히 다가간다. 다시 컷이 바뀌면 극장에 앉아 몹시 감화된 듯한 구스타브가 보인다. 자기 영화를 보고 반쯤 환희에 차 넋 나간 남자의 표정은 <센티멘탈 밸류>가 끝내 풀지 않는 암호다. 직전에 구스타브는 장녀 노라에게 자전적 가족사를 담은 영화의 주인공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바 있고 막 상영이 끝난 영화는 오래전 둘째딸 아그네스가 주연했던 작품이다. 감독인 아버지가 배우인 딸을 캐스팅하려던 현실은 맥없이 상처받은 얼굴로 끝났으나, 감독인 아버지가 배우인 또 다른 딸과 만들어낸 픽션은 고양감에 물든 얼굴을 불러내는 아이러니다. 보기에 따라 이 병치를 마치 현실보다 예술의 역량이 탁월하다는 진술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어떤 불가역성의 고백처럼 다가왔다. 한 개인이 자신의 향수와 원망이 고루 섞인 과거를 특정 대상에 붙잡아둘 때 생기는 힘을 센티멘탈 밸류라 부른다면, 그 힘을 매개(Medium)로서의 예술에 투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구원인지 집착인지 분간할 수 없는 채로 오직 그 매개를 통해서만 소생하는 슬픈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자조 말이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저마다 마음 안에 닫힌 문 하나를 가지고 산다. 그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아서 문 너머를 잇는 매개가 필요한데 그 형태의 차이가 구스타브를 영화감독으로, 노라를 연극배우로 만든다.

<센티멘탈 밸류>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 관객의 모든 관심이 구스타브와 노라의 긴장 사이로 향해 있을 때 혼자 집을 돌보고 가족의 추억이 깃든 물건들을 가지런히 놓아두는 인물이 있다. 어린 시절 배우를 졸업하고 역사학자로 성장한 노라의 동생 아그네스(잉가 입스도테르 릴레오스)다. 어슬렁거리며 뒤늦게 나타난 노라가 필요한 것만 갖고 나머지는 버리라고 무심하게 말하는 순간에 아그네스가 자매를 향해 대답한다. “정말? 괜찮은 물건이 꽤 많아. 우리 추억이 깃든 것들 말이야. 한번 봐. 나는 이 꽃병에 맘이 가더라고. (…) 내 말은, 같이 살펴보고 정리하자는 거야.”

무대에 서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곁에서 오래된 서류와 꽃병을 가만히 정리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 모두를 한데 묶어 우리는 가족이라 부르는데 실은 저마다의 집에서 산다. 벽돌과 타일, 창과 지붕이 어떤 부분은 비슷하고 어떤 부분은 첨예하리만치 다르게 생긴 집이다. 영화감독 구스타브가 스크린을 방패로 진실을 마주한다면, 나치 시절 레지스탕스였던 어머니 카린은 진실에 의하여 죽기를 택했었다. 배우인 노라가 무대 위에서 진실의 혼돈을 표출한다면, 역사학자인 아그네스는 그 진실을 정렬해보려 한다. 분명한 접점은 예술과 비예술의 위계 없이 그들이 최선의 방식으로 각자의 닫힌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 문 앞에서 서로의 인기척을 느낄 때 가족은 잠시 위무했다가 또 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