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그를 ‘브라더 송’이라고 부른다. 브라더 송은 제주도 강정마을과 경기도 양평을 오가며 ‘개척자들’이라는 작은 평화 단체를 이끈다. 얼마 전, 반년 넘게 매진한 드라마 촬영이 끝나 비로소 마음에 여유가 생겨 그를 만나러 양평에 다녀왔다. 너무 존경하는 어른인데도 불구하고 꽤 오래 인사를 드리지 못한 터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브라더 송은 여전했다. 환갑이 넘은 나이가 무색하게 여느 젊은이보다 탄탄한 몸과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그의 한결같은 성실함과 활동성을 증명하고 있었으니. 아프가니스탄, 동티모르, 아이티, 파키스탄 등 세계의 분쟁지역에 파견되어 평생을 인류의 평화에 헌신한 그의 마지막 숙원은 ‘공평해 항해’다. 함께 공(共), 평화 평(平), 바다 해(海). 모든 생명이 함께 평화롭게 사는 바다를 항해하자는 것. 선언이라기엔 너무 소박하고, 구호라기엔 너무 깊은, 그러나 작은 요트 한척이 실제로 건넌 바다의 이름이다.
동중국해는 제주도 남쪽 해안부터 대만과 일본의 오키나와를 품은 바다의 이름이다. 이 바다는 여러 나라가 다툼을 벌이고 있으니 지정학적으로 여간 중요한 곳이 아니다. 오키나와는 미군의 오랜 전초기지고, 대만은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와 같고, 제주도마저 군사기지가 들어섰으니, 브라더 송은 이 분쟁의 바다를 ‘공평해’라고 고쳐 부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 바다를 요트로 항해하자고. 2023년 6월1일, 제주 강정마을 포구에서 길이 9m의 무동력 세일링 요트 ‘요나스 웨일’이 닻을 올렸다. 비로소 성사된 공평해 항해였다. 브라더 송을 비롯한 5명의 크루는 제주에서 출발해 대마도, 후쿠오카, 오키나와의 작은 섬들을 지나 대만의 화련까지, 그리고 다시 이어도를 거쳐 강정으로 돌아오기까지 107일 동안 5,000킬로미터를 항해했다. 엔진으로 가는 배가 아니니 바람이 불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했고, 몇번의 태풍을 만났을 때는 생과 사를 넘나들며 배를 건사해야 했다. 항로에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의 강압으로 300명의 주민이 집단 자결한 사건이 있었던 도카시키섬, 조선인 징용 노동자들이 해저 탄광에서 죽어간 하시마섬, 대만의 국민당 독재 시절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악명 높은 뤼다오섬 등 요나스 웨일은 그저 바다를 항해한 것이 아니라, 바다가 기억하는 상처 위를 지나갔다. 제주도, 오키나와, 대만은 각각 전쟁으로 인한 대학살의 역사가 있고, 지금도 군사기지가 들어선 공통점을 가진 섬들이다. 이 섬들이 평화의 이름으로 연대하지 않으면 아픈 역사는 반복될 것이라고 브라더 송은 말한다. 공평해 항해는 바다 위에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었다. 그 씨앗 중 하나가 ‘해초’라는 활동가다. 20대의 젊은 활동가 해초는 개척자들에게서 항해를 배웠고, 107일을 함께 바다 위에 머문 강인하고 용감한 여성이다. 그녀는 공평해 항해 후에 지중해로 향했다. ‘천개의 마들린’ 연합 선단에 합류하기 위해.
가자 해역에서 활동한 최초의 팔레스타인 여성 어부, 마들린 쿨랍의 이름에서 따온 천개의 마들린 프로젝트는 요트 1천 척을 모아 봉쇄된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구호 물품을 전달하기 위한 프로젝트다. 2025년 가을, 전세계에서 모인 100여명의 활동가를 태운 10척의 배가 먼저 가자 지구를 향해 출항했다. 그러나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공해상에서 이스라엘 군대는 선단을 나포했고 모든 활동가는 수감된 끝에 추방됐다. 해초도 물론 어느 사막의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튀르키예로 빠져나왔다. 그녀는 공평해에서 배운 것을 가자의 바다에 실천하러 간 것이었다. 배는 끝내 목적지에 닿지 못했지만 나포 장면은 SNS를 타고 전세계로 전파되었고, 가자 지구 봉쇄의 실상은 다시 한번 세계에 드러났다. 공평해를 항해하는 요나스 웨일이 동중국해의 군사적 긴장감을 가시화했듯, 마들린 선단은 팔레스타인의 봉쇄를 가시화했다. 방법은 같았다. 작은 배로 거대한 권력 앞에 몸을 내놓는 것.
공평해 항해와 천개의 마들린 선단에 영감을 준 것은 ‘골든 룰’이라는 역사적인 요트였다. 미국이 마셜 군도에서 핵실험을 하던 20세기 중반, 퀘이커 교도 선원들이 골든 룰이라는 이름의 요트에 올라 핵실험 구역을 향해 항해했다. 인류에 가해지는 핵실험의 위해를 온몸으로 막아세우기 위해. 하지만 선원들은 끝내 마셜 군도에 닿지 못하고 미 해군에 나포돼 투옥됐다. 그 소식은 전 세계의 신문을 뒤덮었고, 분노한 여론이 들끓었으며, 5년 뒤 부분적으로나마 핵실험 금지조약이 체결됐다. 골든 룰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역사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것은 후대의 평화 활동에 두고두고 영향을 주는 사건이었다. 오래전 태평양의 반핵운동이 동중국해의 평화운동으로, 지중해의 구호 활동으로 명맥이 이어졌으니까.
브라더 송이 공평해로 바다 이름을 바꾸자는 것은, 바다는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니라는 선언이고, 바다 위에서 전쟁을 준비하는 대신 함께 항해하자는 초대이며, 바다가 기억하는 상처들을 외면하지 말자는 다짐이다. 지도에 쓰인 바다 이름 하나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이름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실제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일은, 세상을 조금씩 바꾼다. 골든 룰의 선원들, 요나스 웨일의 항해자들, 마들린 선단의 활동가들이 남긴 항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바다가 기억할 것이니까. 그리고 기억은 평화를 항해하는 다음 사람을 불러낼 것이다.
공평해 항해를 매년 이어가는 것이 브라더 송의 바람이지만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비용도 만만치 않고 몸을 던지듯 나서야 하는 항해여서 사람도 귀한 탓이다. 나는 수년간 항해를 준비하고 도왔지만 정작 첫 번째 항해에 함께하지는 못했다. 당시에 영화를 하나 준비하고 있었는데, 촬영자로서 내 코가 석자라 어렵사리 얻은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다. 대신에 요나스 웨일에 작은 카메라를 매달고 6시간마다 한장의 사진을 찍게 세팅해두었다. 몸은 함께하지 못하지만, 마음만이라도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항해하는 동안 소식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하도 써서 그런지 카메라를 회수해 사진을 펼쳐 보았을 땐 정말로 함께 항해한 기억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그렇다고 아쉬운 마음이 다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 다음번 공평해 항해가 뚜렷한 기약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엔 일정이 잘 맞아 일부 구간만이라도 참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부디 그때까지 이 지면을 가진 필자로 살아남아 다시 한번 항해기를 전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