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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민의 클로징] 폭탄보다 고요하게

지난 주말에는 얼마 전 개봉한 <센티멘탈 밸류>를 보러 가려다 모종의 이유로 실패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고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의 이전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라우더 댄 밤즈>를 한번 더 보기로 했다. 마음이 혼란하거나 갈피를 못 잡을 때 종종 이 영화를 부러 시청하곤 했다. ‘폭탄보다도 시끄러운’ 고요의 높은 밀도가 어쩌면 불안한 내 몸을 꽉 안아주는 것처럼 느꼈던지도 모르겠다. 공황발작이 찾아올 때 즉각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요법 중 하나는 스스로 자기 몸을 힘주어 안는 자가 포옹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같이 본 이는 마치 질식할 것 같은 공포에 질릴 것만 같다고 했다. 어쨌거나 영화가 관객에게 발휘하는 ‘압력’에 대해서는 둘 다 동의한 셈이다. 이번 신작은 두 자매와 아버지의 이야기라는데, <라우더 댄 밤즈>는 두 형제와 아버지의 이야기다. 제목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듯 실제로 이 영화는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소란하지 않다. ‘폭탄’은 종군기자로 일하다 죽은 어머니의 것인데, 그녀의 죽음이 비로소 남은 가족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므로 ‘폭탄보다 소란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잠잠하다 못해 지나친 고요함의 긴장으로 곧 터질 것 같은 유가족들의 마음이다. 영화의 시선이 그녀의 죽음 이후에 남겨진 세 남자를 비추고 그에 따라 서로 다른 세개의 시선으로 이자벨의 모습이 그려진다. 영화의 목적은 그녀의 ‘진짜’ 혹은 ‘정확한’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세 남자 모두가 각자의 시선으로 그녀를 받아들이는 상황에 집중한다. 이자벨은 한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세명의 이자벨로 나타나고, 그리하여 남은 이들은 한 사람에 대한 상실이 아니라 각자의 이자벨에 대한 상실을 경험한다. 이것이 영화의 문제 상황이다. 세 남자가 경험하는 상실의 주인공이 저마다 다른 ‘이자벨’이라는 것이 문제다. 애초에 막내 콘라드는 엄마가 자살로 죽은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세 사람이 사랑했던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닌)의 대상,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그들에게 부착되며 만든 트라우마들의 변주는 극히 제한된 대사를 통해 팽팽한 긴장감 위에서 오고 간다. 인물의 표정, 제스처, 카메라의 느린 움직임은 단 일초도 상처로부터 눈을 떼지 않는다. 강박에 가까운 시선의 집요함은 광기 어린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쩔 텐가, 고통은 피하면 피할수록 고리대금처럼 불어나고 다른 방식으로 찾아온다는 걸 세 남자도, 영화도 모두 알고 있다. 아이러니는 제목뿐 아니라 트라우마의 서사 안에서도 발견된다. 갈등의 주요 축인 아버지 진과 콘라드의 관계는 끝에서 다소 화해의 국면을 낙관하게 하지만, 영화 전체를 놓고 보자면 상처의 ‘총량’은 그대로다. 아버지와 막내가 웃을 때, 장남 조나는 웃을 수 없다. 그의 상처는 엔딩크레딧이 오르는 순간부터 시작할 것이다.두 남자의 마음의 무게가 덜어질 때, 다른 한 남자가 추락하듯 괴로워지는 것은 다소 잔인하다. 하지만 삶이 죽음을, 에로스가 타나토스를 추동한다면 트라우마 역시도 항상적으로 이 세계 안에 잔존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저기로, 나에게서 너에게로 잠시 옮겨갈 뿐이다. 이를 통해 영화가 말하는 것은 하나다. 당신이 이 아픔으로부터 놓여나고 싶거든, 먼저 ‘고통’의 이름부터 제대로 말하라. 미국과 이란간 전쟁으로 하루하루 가슴 졸이는 최근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이것의 이름이 다른 그 무엇이 아닌 고통과 전쟁이라고 말해야 옳다. 그외에는 방도가 없다. 이것이 <라우더 댄 밤즈>의 마지막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