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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뒤틀린 두뇌 게임, 더 난해한 인간, <폭탄>

취기가 남았는지 헤실헤실, 둥글둥글한 얼굴에 공손한 말투. 한밤중 슈퍼에서 난동을 부리다 연행된 스즈키 다고사쿠(사토 지로)는 평범한 취객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남자가 대뜸 자신은 촉이 좋다며 곧 도쿄 한복판에서 폭발이 일어날 거라고 예언한다. 토도로키 형사(소메타니 쇼타)는 헛소리라 여기지만 곧 동료가 취조실로 뛰어들어와 폭발 사건이 발생했다고 전한다. 혼란스러워하는 토도로키를 향해 스즈키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한다. “이제부터 세번. 다음 폭발은 1시간 후입니다.”

재일 교포 작가 오승호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폭탄>은 용의자와 형사가 마주 앉아 벌이는 두뇌 싸움을 치열하게 펼친다. 제한된 시간 안에 스즈키의 말 속에서 폭탄이 숨겨진 장소를 찾아내지 못하면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긴장감을 한층 끌어올린다. 스즈키가 진짜 범인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대리인에 불과한지 추리하는 과정 역시 흥미롭다. 영화는 설계자이자 전능자 위치에 있는 스즈키를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로 설정해 서스펜스를 유지한다. 그는 선택지 바깥에 놓인 존재다. 휴대전화도 없고 신원도 불분명하며 기억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뜬금없이 과거의 단편을 꺼내거나 시 한 구절을 읊는 화법은 대화를 번번이 엇나가게 만든다. 예고한 폭발 시각이 점점 다가오는데도 뚜렷한 단서가 보이지 않으니 형사와 관객의 머릿속엔 ‘펑’ 소리와 함께 초토화된 도심의 풍경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한 공간에서의 대화가 전부인 단순한 구조 속에서 <폭탄>은 ‘선수 교체’라는 카드를 꺼낸다. 취조 방식과 성격은 물론 헤어스타일과 의상까지 전혀 다른 형사들을 차례로 스즈키 앞에 앉히며 이야기의 구획을 나눈다. 첫 번째 형사 토도로키가 침착한 태도로 날뛰는 상대를 관조하는 쪽이라면 두 번째 형사 키요미야(와타베 아쓰로)는 스즈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원하는 걸 얻어내는 엘리트형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루이케 형사(야마다 유키)는 젊은 기세로 스즈키를 도발하며 후반부의 임팩트를 책임진다. 형사별로 세 파트로 나누었을 때 ‘아홉개의 꼬리’ 게임이 펼쳐지는 두 번째 파트가 압도적이다. 스즈키가 아홉개의 질문을 던지면 키요미야는 답해야 하는 이 심리전은 좀처럼 예측할 수 없다. 어린 시절 개에 물린 적이 있느냐는 사소한 질문에서 시작해 경찰 조직 내에서 금기시되는 이름이 거론되기도 한다. 답변자 역할에 충실하던 키요미야가 돌연 매서운 질문으로 판을 뒤흔드는 순간마다 취조실이 흔들리는 것만 같다.

<폭탄>이 잔혹한 게임을 통해 던지는 질문들은 하나같이 쉽지 않다. 폭탄이 어린이집이 아닌 노숙자들이 모인 공원에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조금이라도 안도했다면 생명에는 등급이 있다고 인정하는 걸까. 사회의 온갖 모순과 부조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 영화는 인간에 대한 기대가 없는 것처럼 시작하나 갈수록 진심은 그와 반대처럼 느껴진다. 어떻게든 사건을 막으려고 노력하는 형사들과 서로의 빈틈을 메우며 함께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무게중심을 두는 선택에서 그래도 인간을 믿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새어나온다. 제49회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을 포함한 총 12개 부문을 휩쓸었다.

close-up

<폭탄>을 보고 스즈키 역을 맡은 사토 지로가 누구인지 검색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천진난만함과 광기를 오가는 연기를 보면 왜 ‘일본판 조커’라는 평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가 캐스팅되어야만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다는 제작진의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토 지로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이 흡인력 있으나 스즈키의 대국민 메시지 영상이 압권이다. 그 많은 대사를 어떻게 소화했는지도 놀랍거니와 완급을 조절하는 솜씨가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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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 감독 이시카와 게이, 2022

을 보고 <한 남자>가 떠오른 건 이 영화 역시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키도(쓰마부키 사토시)를 재일 교포, 변호사, 남편, 아버지라 부를 수 있지만 그 모든 이름을 합쳐도 그를 말하기엔 부족하다. 이런 혼란은 스즈키를 이야기할 때도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