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창간 30주년 특별 연재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의 네 번째 키워드는 ‘생태 변이’다. ‘20세기의 기억’, ‘인간의 조건’, ‘통과하는 공간’에 이어 21세기 전후로 영화산업과 비평의 생태계 곳곳에서 나타난 변화를 정리하고자 한다. 영화 매체 안팎의 환경이란 시대에 따라 변모하기 마련이고, 종종 모종의 돌연변이를 배출하기도 한다. 이에 조지훈 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머는 21세기 국제영화제의 구조적 변이를 짚었고, 전문적 불평분자 gkd는 ‘트롤링으로서 영화비평’으로 작금 한국 비평계의 공허한 변질을 지적했다. 이어서 김병규 영화평론가는 20세기적 스튜디오 시스템과 장르의 울타리가 무너진 21세기의 영화 작가들이 어떠한 터전을 새로이 찾으려 했는지, 그 변모의 현황을 살펴봤다. 홈 무비와 집단 제작 그룹의 맥락에서다. 영화 안팎의 생태는 항시 유기적 변이를 요구한다. 만드는 이들, 트는 이들, 보는 이들, 비평하는 이들 등 모두가 이 생태 변이에 가담하는 주체로서 연재에 동승해주길 바란다.
열린 문틈에서
화가 탄생하는 곳: 홈 무비에서 집단 제작 그룹까지
“혁명을 실천한다는 것은 아주 오래된 것들을 회복시킨다는 의미다.” - 장마리 스트로브
<시칠리아!>를 편집하는 장마리 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예 부부의 작업을 기록한 페드로 코스타의 <당신의 숨겨진 미소는 어디에?>(2001)에서는 한 가지 특이한 움직임이 나온다. 테이블에 앉아 필름 릴을 편집하는 위예의 옆에서 반쯤 열린 편집실 문 사이로 들락거리며 말을 거는 스트로브의 산만한 움직임이다. 카메라는 좁은 방 안에 머물러 있고 어두워야 마땅한 편집실의 문은 이상하게도 언제나 바깥을 향해 열려 있다. 그렇게 열린 문 사이로 스트로브의 발걸음과 목소리가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그의 몸짓은 편집실 안쪽에 머무르지도 않고 바깥으로 나가지도 않으며 장면이 끝날 때까지 화면을 자극하는 신호로 주어진다. 스트로브의 걸음에 맞춰 영화는 어둠 속에서 약간의 빛을 불러들이며 안과 밖의 경계에 선다.
자크 타티의 슬랩스틱코미디에 나오는 어설픈 몸짓, 혹은 특유의 습관을 영원히 반복하는 시트콤의 캐릭터처럼 스트로브는 엇비슷한 행동을 영화 내내 되풀이해 위예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다. 편집 중인 필름은 위예의 손과 스트로브의 산만한 움직임 사이에서 미묘하게 뉘앙스가 바뀐다. 영화평론가 마크 페란슨은 이 영화에서 스트로브와 위예의 관계에는 하워드 호크스의 스크루볼코미디적인 요소가 있다고 지적한다. 손에 도구를 든 여자는 침묵한 채 앉아 있고 남자는 빈손으로 주변을 서성거리며 말을 건다. 위예는 참다못해 이제 그만 닥치라고 소리친다. 두 사람이 작업하는 편집의 문제는 끝없이 유예되지만, 장면은 소란스러운 활력으로 다시 태어난다. 페드로 코스타는 영화 속 스트로브의 말을 인용해 숏에는 언제나 불꽃이 타올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을 따라 코스타는 쉬지 않고 문을 드나들며 의견을 말하는 스트로브의 신체 코미디를 질료로 삼아 숏 안에 불을 붙인다.
코스타는 스트로브가 오가는 저 작은 문을 중대한 가능성의 장소로 바라본다. “편집실에서 문을 바라보게 되기까지만 한달이 걸렸다. 문을 드나드는 장마리의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가능성과 픽션을, 벽 뒤에 있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한다. 그의 증언처럼 <당신의 숨겨진 미소는 어디에?>에서 문을 드나드는 움직임은 픽션의 가능성을 품은 행위로 펼쳐진다. 열린 문안으로 걸어간다는 것, 그 내밀한 장소를 방문한다는 것은 크든 작든 얼마간의 불안을 동반한 탐색이자 아직 밝혀지지 않은 비밀에 근접하는 몸짓이기 때문이다. 스트로브는 지극히 익숙하고 평범한 편집실 문 안팎에서 마치 낯선 장소를 방문하는 사람처럼 서성거린다. 잠시 안으로 들어갔다가 계속 머물 수 없다는 듯이 밖으로 나온다. 그는 타인의 집을 방문하는 존재처럼 편집실에 들어선다.
산만하고 불안정한 몸짓을 타고 스트로브-위예와 코스타의 영화는 편집실에서 안정적으로 만들어지는 대신 열린 문틈을 통해 일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진다. 피사체가 거의 보이지 않는 암실 속에서(스트로브-위예는 페드로 코스타의 촬영은 허가했지만 조명을 사용하지 않는 조건을 내걸었다고 한다) 픽션은 문틈 사이로 드는 빛과 발걸음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 특수한 픽션을 실어나르는 당사자인 스트로브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 안에 자기 자신을 낯선 방문객으로 설정한다. 방문객은 비밀에 접근하고 작은 픽션의 비밀을 공유한 뒤 문밖으로 나온다.
페드로 코스타가 포착한 것은 떨림과 불안을 간직하며 픽션의 가능성을 무한히 열어두는 스트로브의 걸음이다. 코스타는 이 창조적인 몸짓을 극영화에 기입해 <행진하는 청춘>에서 문과 문 사이로 걸어가는 벤투라의 발걸음으로 재구축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아내가 도망간 뒤로 벤투라는 오랜 시간 살아온 집에서 나와 실제 혈연관계로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자식들”의 집 문을 열고 드나든다. 노련한 손짓으로 필름 릴을 되감고 자르는 다니엘 위예나 익숙한 솜씨로 마약을 말아 피우던 <반다의 방>의 반다 두아르트와 달리 스트로브와 벤투라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빈손으로 열린 문틈 사이를 배회한다. 병든 몸으로 이곳저곳을 오가는 벤투라는 <수색자>의 존 웨인처럼 가족 모두가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혼자 문밖에 남아 황야로 떠나는 웨스턴의 영웅이 아니다. <게르트루드>의 여인이 선보이는 마지막 몸짓처럼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 방문을 닫고 문 뒤로 사라지는 멜로드라마의 주인공도 아니다. 작은 사물에 인간과 세계가 공유하는 거대한 믿음을 투사한 20세기 영화의 위대한 장면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반복하지만 그들의 픽션은 문틈 사이의 미약한 결속으로 중간에 걸쳐 있다.
포드와 드레이어의 영화는 페드로 코스타가 경애하는 걸작이지만 <행진하는 청춘>의 문은 20세기 영화가 묘사한 문처럼 인물이 머무는 구역과 의미를 분명하게 나누는 장치가 아니다. 벤투라는 문에서 다른 문으로, 이쪽 방에서 저쪽 방으로 이동하는 “방랑자이자 순례자”(톰 앤더슨)이며 현재 시점의 삶과 과거의 그림자를 동시에 품은 역사의 방문객이다. 그의 발걸음에 맞춰 <행진하는 청춘>의 화면에는 과거와 현재의 상흔이 뒤섞이고 죽은 자와 산 자가 한 공간에 공존하게 된다. 벤투라의 몸에 새겨진 경험은 그가 간직한 고유의 기억이면서 20세기 이민자와 하층계급에 새겨진 공통의 기억이다. 그는 현실과 역사의 경계면에서 원형의 발걸음으로 영원히 문과 문 사이를 떠돈다. 벤투라의 발자국은 너무 많은 기억과 정체성의 중력을 짊어진다. 그의 걸음이 동반하는 과거는 결코 화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그가 바라보는 시선과 내뱉는 말을 통해 노출됨으로써 현재 시점을 위태롭게 흔든다. 스트로브의 걸음에서 무한히 열린 픽션을 발견하는 것처럼, <행진하는 청춘>에서 코스타는 벤투라의 걸음을 통해 무한히 흔들리는 과거와 현재의 중첩을 바라본다.
허구적 세계를 창조하는 위상과 역량이 훼손되면서 영화는 거주할 수 있다고 약속된 장소를 잃어버리고 만다. 장르의 고전적 질서 내부로 통제되지 않는 현실의 단면이 개입하고, 이미지를 통합하는 지배력의 약화로 장면의 시각적 체계는 분산되며, 대사와 제스처는 부자연스러운 침묵에 가로막힌다. 21세기 영화는 그렇게 부서진 역사와 뒤틀리는 형식으로 분열하는 얼굴과 신체를 지켜보는 증언의 형식이다. 페드로 코스타가 두편의 영화에서 실천한 것처럼 정해진 거주지 없이 열린 문틈 사이를 오가는 주변부의 피사체를 담아내는 유일한 21세기 영화의 형식은 홈 무비다. <당신의 숨겨진 미소는 어디에?>와 <행진하는 청춘>은 각각 부부와 (벤투라가 “자식들”이라 부르는) 가족의 무료한 시간을 기록한 홈 무비이다. 홈 무비는 집에 보관된 세계와 가족공동체, 추방자의 귀환과 방문객의 기다림, 숨겨진 비밀과 역사의 기원을 무의미하고 파편적인 시간 위에서 포착하는 하나뿐인 영화의 장소다.
21세기 영화가 거주할 장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제를 예민하게 자각한 작가들이 홈 무비의 양식과 조건을 영화적 실천의 무대로 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21세기의 영화는 국가 공동체를 통합하는 정신적 역량과 그것을 가능케 한 스튜디오 시스템과 장르의 견고한 작동이 무너진 공간이다. 그러니 이 시기에 카메라를 든 이들의 과업은 무엇보다 영화가 다시 머물 수 있는 ‘집’을 고안하는 것이다. 샹탈 아케르만의 <저기>에서 카메라를 든 연출자는 대학교 강연을 위해 방문한 이스라엘 텔아비브 아파트에 갇혀 블라인드가 내려진 창문 틈 사이로 세계를 바라본다. 물리적으로 멀리 떠나왔는데도 아케르만의 영화는 집 안에 감금되어 있다. 아케르만은 얼마 전에 발생한 테러의 두려움 때문에 밖에 나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두려움의 정체는 아케르만의 유대인 정체성을 감싸고 있는 내면적 죄의식이기도 하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미세한 틈으로 세계를 바라보면서 20세기 역사의 유산과 부채를 감싸안는다. 아케르만은 가장 작은 영화의 단위(집 안에서 촬영한 홈 무비)로 가장 거대한 영화의 유산(20세기의 전쟁과 학살)과 만난다. 아케르만의 카메라는 집 안에 고립된 영화의 상태를 환기하면서 홈 무비가 역사의 비밀을 공유하고 ‘나’와 과거가 만날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을 역설한다.
말년의 장뤼크 고다르는 고립을 자처하면서 자신이 거주하는 집을 영화의 장소로 삼는다. 그는 홈 무비와 자화상이 머무는 내밀한 공간에 거대한 스튜디오의 빛과 역사의 상흔을 끌어들이는 역설적인 실천에 돌입했다. <영화의 역사(들)>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역사의 아름다움과 끔찍함을 돌아보던 그는 홈 무비의 조건과 더불어 현재에 거주하기 시작한다. <언어와의 작별>은 고다르가 자신이 거주하는 집 근처에서 그의 반려견과 함께 제작한 3D영화다. 거친 질감의 조악한 동영상으로 포착된 연인들은 집 안의 침실과 화장실, 집 주변의 호수와 숲길과 같은 평범한 장소에서 그 순간마다 벌어지는 작고 미세한 상황을 공유한다. <언어와의 작별>은 20세기 고다르 영화의 주요한 과업이었던 헤어지고 재회하는 연인의 시간 사이로 풍경, 동물, 예술과 역사라는 세계의 변수를 채운다. 이 영화가 일으키는 3D 효과는 홈 무비의 안과 밖에, 눈과 눈 사이에 걸쳐 있는 시각의 교란을 향해 있다. 고다르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어느 연인의 범용한 일상과 겹겹이 쌓인 영화의 역사를 동시에 파고드는 모순적인 경험을 뜻한다. 스트로브가 편집실 문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다르는 홈 무비라는 집의 주인이자 그곳에 끊임없이 침입하는 과거의 방문객이다.
그러나 영화에 주어진 곤경을 감싸안고 돌파하려는 시도가 홈 무비의 고립된 장소에 머무는 형태로만 표상되는 것은 아니다. 홈 무비에는 또 다른 형식이 존재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언급한 영화들과는 반대로 정해진 장소를 이탈해 무규정적인 낯선 장소 위에 픽션의 친밀함을 이식하는 방식이다. 여행과 독립, 결혼과 졸업으로 인한 가족의 해체, 그리고 마침내 집을 벗어나는 사건 또한 홈 무비의 한 단락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이론가이자 감독인 피터 월런은 픽션과 다큐멘터리와 에세이영화 같은 분류로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는 영화들을 일컬어 ‘여권 없는 영화’라는 용어를 제시한 바 있다. 고다르가 스스로를 공항이 아닌 비행기에 비유한 것처럼 주어진 장소의 범위를 이탈해 여권 없는 영화의 실천을 따르는 이들이 21세기 영화의 지도에 나타나고 있다.
고정된 장소를 벗어나 픽션이라는 가상의 집에 거주하려는 실천을 말할 때 아르헨티나의 엘 팜페로는 그 탁월한 예시에 속한다. 마리아노 이나스, 라우라 시타레야, 알레호 모기얀스키 등의 연출자와 프로듀서로 구성된 엘 팜페로는 자신들의 작업 방식을 밴드의 연주에 빗대는 공동 제작 집단이다. 그들은 한두명의 이름 있는 작가의 영향력 아래서 활동하는 대신 서로가 그들 영화의 제작자이자 각본가이자 프로듀서이자 배우로 움직이고 역할을 병행한다. 엘 팜페로는 언제나 집단으로 의논하고 창작하고 제작하며 픽션을 점유한다. 그들이 건축하는 픽션의 집은 누구도 주인을 자처하지 않고 누구나 방문객으로 들어오고 나갈 수 있는 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