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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의 아주 사소한 사회학] 감히! 내게?

김치찌개만 보면 친구 아무개가 생각난다. 그는 인사동으로 나를 불러내더니 김치찌개 집으로 다짜고짜 끌고 갔다. 평범한 가게였다. 그는 평범할수록 숨은 맛집인 경우가 많다는 걸 강조했다.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자신이 이 집과 어떤 추억이 있었는지를 장황하게 말하는데 그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무슨 대꾸를 하기도 어려웠다. 뚝배기가 나오자 감탄사는 절정에 이른다. 이야, 이야. 으허, 으허. 그런데 그는 너무 김치찌개에 취했나보다. 내가 숟가락을 들기만 했을 뿐인데 이런다. “어때? 끝내주지?”

친한 사이였으니,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그어진 선이 없으니 한바탕 웃으며 넘어갔다. 아직 먹지도 않았다는 뜻을 담아 내가 귀엽게 눈을 찡그려주니 친구는 그제야 자신의 성급함을 알고 미안함을 전한다. 그러면서 너도 나처럼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면서 일방적으로 기울었던 대화의 균형을 겨우 맞췄다. 누구에게나 종종 있을 만한 일일 거다. 자기가 좋아하는 건 친구도 경험해봐야 한다는 지인 한명쯤은 곁에 있을 거니까.

하지만 인생이란 친구하고만 음식을 먹는 게 아닐 터니, 이야기가 다르게 흘러가기도 한다. 서로의 묘한 관계, 그러니까 선이 그어졌냐에 따라 괴상한 추임새를 들을 때도 있다. 생전 처음 본 디저트를 낯설어하는 사람의 면전에서 뉴욕에 안 가봤냐면서, 그곳에선 유명한데 몰랐냐고 하면 어찌 민망하지 않겠는가. 여기까진 내 미각이 촌스럽다며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타인의 혀를 윤리적으로 재단해 도덕적으로 평가하면 황당하다. 유명 사찰에서 직접 전수받아 만들었다는 산채비빔밥을 먹는 자리에서 좀 싱겁다는 내게 누구는 대뜸 이런다. “가공음식 좋아하는 사람들 입맛엔 안 맞을지도 몰라요.”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는 건 취해서다. 음식에 반했다는 게 아니다. 뉴요커의 취향을 잘 알 정도로 해외를 누볐던 자신에게, 나물이라고 같은 나물이 아니라는 걸 이해할 정도로 건강에 진심인 자신에게 취해서다. 그리고 주취자가 그렇듯, 평범한 반응에도 날카롭게 대응한다. 뉴욕도 안 가본 인간이 자신의 호의를 무시한 게 기분이 나쁘다. 건강에 무지한 인간이 정갈한 음식 앞에서 맛을 평가하는 게 한심하다. 그러니 무례하다.

오래전, 강연 시간이 많이 남아 어쩔 수 없이 들어갔던 한 커피 전문점이 떠오른다. 가게명에 자기 이름이 있고, 커피는 오직 핸드드립으로만 내리는 그런 집 말이다. 가격도 비쌌고 설명도 복잡했다. 원산지를 소개한 글귀 아래의 바디감, 산미 어쩌고가 적힌 육각형 그림은 내게 현란하게 보였다. 그런 비전문가가 아메리카노 없냐고 무뚝뚝하게 말한 게 바리스타에겐 짜증이었을까. 그는 그런 커피는 안 판다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아무거나 추천해 달라고 하니, 아무거나라는 메뉴는 없다며 커피를 모르면 기초부터 배워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말다툼을 할 상황은 아닌지라 이름이 신비로워 보이는 과테말라안티과를 골랐다. 안티과가 도시 이름인 줄 전혀 몰랐는데, 이게 또 싫었나 보다. 주인은 커피콩을 핸드 밀에 넣고 손잡이를 빙빙 돌리면서, 사람들이 자신이 마시는 커피가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는 게 안타깝다면서 툴툴댄다. 장사를 하겠다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였지만, 커피에 취한 사람임은 분명했다. 이쯤이면 눈치껏 내가 입을 다물었어야 했는데, 어색함을 풀겠다고 나는 맛이 괜찮다는 표현을 스타벅스에 비유하고 말았다. 정말로 스타벅스 아메리카노의 고소함과 비슷해서였지만, 나는 그게 실례인 줄 전혀 몰랐다. (지금도 모른다.) 그가 읊조렸다. “감히 스타벅스 따위를 제 커피와 비교하시면 안되죠.”

이런 구별짓기의 언어가 가능하려면 세상을 수직적으로 보아야만 한다. 기준선을 하나 긋고 자신을 한참 위에, 상대를 한참 아래에 두면 된다. 나는 노력해서 여기에 이른 사람이고 저 사람은 이르지 못한 걸로 규정하면, 자신의 성취감은 쉽게 타인을 향한 혐오감의 연료가 된다. 이 시한폭탄이, 자기효능감이 가득한 한국인에게 어찌 없겠는가. 자기효능감은 거칠게 요약하면 해낼 수 있다고 스스로 믿는 정도인데, 한국에선 ‘성공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소개되기 바빴다. 바람직한 부모라면 자녀가 어린 시절부터 자기효능감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조언이 넘쳐났다. 어떻게? 작은 것에서부터 성취감을 맛보게 해야 한다면서. 칭찬하고 또 칭찬하라는 말이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잘하고 있다는 짜릿함에 취하며 효능감 중독자로 성장했다. 그리고 기어코 사람 사이에 선을 긋고 위아래로 비교한다.

명문대 합격이라는 대견함, 대기업 입사라는 짜릿함, 초고속 승진의 희열, 아파트값 상승의 기쁨, 체중 감량의 뿌듯함 등등의 한국적 성취감은 평소에는 자신을 격려하는 용도로 무난하게 사용되지만 특정 상황에선 돌변한다. 선 아래의 아무개가 주제 파악도 않고 설친다고 여길 때 말이다. 감히! 지방대 주제에. 감히! 중소기업 주제에. 감히! 연봉도 얼마 안되는 주제에. 감히! 내 집 장만도 못한 주제에. 감히! 뚱뚱한 주제에. 응용하면 무궁무진할 건데, 정리하면 두 마디다. 감히! 내게? 내가 경험한 무례도 비슷했을 거다. 뉴욕에 가보지도 못한 인간이 감히 맛을 따지고, 건강한 식습관도 없는 인간이 감히 간이 안 맞니 어쩌고라고 했으니 말이다. 장인의 커피를 감히 스타벅스에 비교한 내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리라.

영화 <기생충>에서 박 사장은 이 선에 예민하다. 저 아래 사람일지라도 선만 넘지 않으면 충분히 예우한다. 하지만 감히 운전사 주제에, 집안일 못한다는 아내 험담 늘어놓는 자신에게 “그래도 사랑하시죠?”라며 되묻는 건 용납될 수가 없다. 그러니 웃는다. 사랑 안 하면 당신이 어쩔 건데라는 표정으로. 시키는 대로 하고 돈만 받으면 되는 신분이, 민망해도 아이 생일이니 이벤트 좀 해보자는 고용주의 제안에 “애 많이 쓰시네요”라면서 투덜거리니 기가 찬다. 감히 저 아래의 인간이 위를 향해 애를 쓰니 마네를 언급한다는 건 당치도 않으니 말이다. 박 사장뿐이겠는가. 감히라는 말은 지금도 내 목구멍 바로 앞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 당신 목구멍에도 숨어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