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의 시애틀에도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는 두 연인이 있다. 레즈비언 커플 안젤라(켈리 마리 트란)와 리(릴리 글래드스턴)는 임신에 또 한번 실패한다. 둘에겐 시험관시술을 재시도할 경제적, 심리적 여유가 없다. 게이 커플 크리스(보웬 양)와 민(한기찬)은 관계의 지속을 고민한다. 한국인 유학생 민은 크리스에게 청혼하지만 크리스는 제도의 안정성 안에서 관계를 이어갈 자신이 없다. 안젤라와 민은 혈연 가족에 대한 고민까지 머리에 이고 있다. 안젤라는 앨라이 캠페인(차별을 겪지 않는 비당사자가 차별 당사자를 후원, 지지하는 운동.-편집자)을 펼치는 엄마 메이(조앤 첸)가 부담스럽다. 민은 할머니 자영(윤여정)으로부터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가업을 승계할 것을 압박받는다. 이때 민이 안젤라에게 위장결혼을 제안한다. 민과 안젤라가 서류상 부부가 된다면, 민은 보수적인 한국 원가정에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히지 않고도 영주권을 얻어 미국에서 크리스와 살 수 있다. 안젤라와 리는 결혼의 대가로 민 가문의 경제력을 일부 지원받아 다시 임신을 준비할 수 있다. 네 남녀가 그렇게 혼돈을 일단락하려는 찰나, 자영이 혼사를 직접 관장한다며 미국을 찾자 상황이 복잡해진다.
<결혼 피로연>은 리안 감독의 1993년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인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했다. <스파나잇> <파이어 아일랜드> 등 퀴어 무비로 자기만의 인장을 새긴 앤드루 안 감독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고, 원작의 각본가인 제임스 샤머스가 이번 영화에도 원안 제공을 넘어 공동 각본가로 참여했다. 원작 속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무용담을 두 퀴어 커플의 내러티브로 분화하고, 배경을 뉴욕에서 시애틀로 옮기는 등 구조 변화가 가시적이지만 이번 <결혼 피로연>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원작으로부터의 시차(時差)다. 2025년은 (적어도 미국에선) 동성애자의 사랑할 권리가 보편화됐다. 무엇보다 2025년은 미국 50개 주 전역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지 10주년을 맞이한 해다. <결혼 피로연>은 그 시차가 진보시킨 퀴어 커뮤니티 외, 내부의 인식 변화를 각색에 효과적으로 반영한다. 이를테면 두 커플 중 가짜 이성 결혼식이 굳이 필요한 쪽은 민뿐이고, 동성혼이든 이성혼이든 결혼이 필요한 인물 또한 민뿐이다. 국제기업 총수의 손자인 민은 이성 결혼을 해야 집안으로부터 계속 지원을 받을 수 있을뿐더러 그게 누구든 미국인과 결혼해야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결혼 피로연> 속 가짜 이성 결혼식을 둘러싼 야단법석은 플롯의 대수가 아니다. 영화는 오히려 네 남녀가 결혼을 위장하면서까지 사랑과 관계를 지속하려는 심리적 동인을 코미디의 주재료로 삼는다. 여기에 계급 차, 이민자의 사회 편입, 여전히 남아 있는 동성애 혐오 시선, 사회복지의 범위 등 소수자의 포용적 사회통합에 필요한 요건을 교차시키며 이야기의 레이어를 한층 풍성하게 만든다. 끝으로 <결혼 피로연>은 <미나리>에 이어 ‘윤여정풍 할리우드 할머니’의 또 다른 진수를 만날 수 있는 영화다. 자기 연민 없이 주어진 상황을 다부지게 돌파해나가고, 자신의 수비 범위 안에서만 손자와 미래세대를 염려하되 변화 중인 세상에 토 달지 않고 산뜻하게 발맞춰나가려는 자영은 이제 전 세계 모두가 아는 배우 윤여정의 페르소나에 힘입어 등장마다 분량 이상의 존재감으로 살아 숨 쉰다.
close-up
자영의 시애틀 급습으로 인해 두 커플은 각자의 집을(한집이지만 본채와 별채에 나누어 동거한다) ‘게이 프리 하우스’로 탈바꿈한다. 원작 영화에도 있는 장면이지만 등장인물이 늘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게이스러움’의 메타포가 보다 다양해진 점이 흥미롭다. 엘리엇 페이지의 자서전 <페이지보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반쪽의 이야기> 포스터와 블루레이…. 온갖 물건을 처분하다 지친 안젤라는 이윽고 외친다. “집구석 전체가 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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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케이지> 감독 마이크 니컬스, 1996
앤드루 안 감독은 <결혼 피로연>과 함께 보면 좋을 영화로 <라 카지 오 폴>(1978), <말라 노체>(1986) 그리고 <버드케이지>를 들었다. 언급한 <라 카지 오 폴>을 리메이크한 <버드케이지>는 게이 커플이 자신들의 아들을 보수적인 상원의원의 집에 장가 보내려는 소동을 다룬다. 앤드루 안 감독은 <버드케이지>를 특별 언급하며 인간관계의 역학에 기반을 둔 코미디의 중요성을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