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헷갈린다. 과잉된 신체 노출과 자극적인 성적 대상화, 남성적 판타지의 실현. 많은 여성들이 오랫동안 저항하며 싸워온 것들을 도리어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여자들은 진정 내 편일까. 과연 자매애나 연대의식 같은 단어로 우리 모두가 나란히, 동등하게 묶일 수 있을까. <애마> 속 신주애(방효린)는 카메라 앞에서 옷을 벗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1980년대, 스포츠, 섹스, 스크린 등 ‘3S 정책’으로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을 돌리려던 정부 전략에 따라 극장가는 본격적으로 성애영화를 쏟아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위로 네명의 오빠들의 팬티를 빨던 신주애는 생각했다. 오직 연기만이 자신의 피난처가 될 거라고. 지긋지긋한 감옥을 빠져나갈 비상구는 그곳이 유일하다고. 으레 야망을 품은 인물을 다루는 작품은 주인공의 ‘그럴 수밖에 없는 가여운 사정’에 몰두하지만 독특하게도 <애마>는 그렇지 않다. 주애의 선택을 처절하고 애틋하게 그리기보다 낯서리만치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그린다. “저는 카메라 앞에서 벗을 수 있어요. 연기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백번도 벗어요.” 그리고 주애의 이 태도에는 오랫동안 우리를 의심하게 한 ‘의도된 불편함’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일종의 클리셰가 없다. <애마부인>이 개봉한 뒤 그의 머리채를 잡고 고향으로 내려가자는 아버지가 등장하지도 않고(돈을 보내달라는 오빠의 전화는 있으나 그게 전부다), 친한 친구들로부터 그 흔한 “창녀”라는 소리도 듣지 않는다(처음엔 언짢아하지만 오히려 야한 게 자기 취향이라는 것을 깨달았단다). 그에게 돌팔매질하는 대중이 등장하지도, 터무니없는 계약 농간으로 금전 사기를 당하지도 않는다. 그로써 주애가 직면해야 할 알맹이는 간단명료해진다. <애마부인>을 찍을 것인가 말 것인가. 자신을 정부 관계자의 술자리에 내보낸 구중호(진선규)와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 쌍년 중 쌍년 정희란(이하늬)의 손을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 성적 대상화를 당한 여성이 ‘겪어야만’ 한다고 착각했던 곁가지를 말끔히 제거하니 이야기는 진짜 집중할 곳을 정확히 찾아 몸을 뉜다. 그래서 주애는 더 마음껏 불편해진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맞서 싸우는 여공들을 뒤로한 채 성애영화를 찍기 위해 아파트에 입주하고, 더 자극적인 이미지를 전시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고, 성 상납과 다름없는 연회 이후에 돈을 받으며 실컷 부도덕하게 군다. 그렇게 시청자는 하릴없이 헷갈린다. 스스로 에로영화의 주역이 된 이 여자와, 여성 착취적 제작자·소비자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해주는 이 여자와 우리는 한편에 설 수 있을까.
정확하게 절반. 3화의 끄트머리에서부터 <애마>는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기 시작한다. 그저 배짱 있고 야욕만 넘치는 애매한 젊은이가 아니라, 자신이 먹이사슬 단계 중 어디에 있는지 그 위치를 명확하게 인지한 시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구중호의 계략에 따라 불려간 연회장에서 정희란과 눈이 마주쳤을 때, 무려 아시아국제영화제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로 그 배우 정희란이 마약과 섹스의 난장 속에서 들러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그리고 두 사람을 구원해줄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거기서부터 <애마>는 신주애가 더 이상 혼자 감출 수 없는 것들을 마구 폭로하기 시작한다. 그것도 <애마>다운 방식으로. 드라마는 어린 여자에게 과감하게 정희란을 선물한다. 제작자 대표에게 아득바득거리며 지지 않는 신주애와 달리 사실 희란은 신인 시절 자신이 작품으로부터 추행을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객석에서 눈물을 삼켰다. 그는 1970년대 한국 영화시장에서 여배우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자기보다 먼저 경험한 정희란을 통해 신주애는 비로소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찾는다. 예를 들면 (자기 말로는 유럽 스타일 영화라 했지만) 일종의 여성향 성인영화를 꿈꾼 곽인우 감독(조현철)이 사활을 내걸었던 한 장면. 과장된 더빙만 내내 이어지다 어느 순간 진짜 희란으로 돌아와 그의 음성으로 전환되는 장면은 희란이 주애에게, 그리고 <애마>가 시청자에게 남기는 한편의 서신이 된다. “세상이 어떤 잔인한 폭력으로 널 옥죄더라도 괜한 죄책감, 괜한 수치심으로 움츠러들지 마. 그게 무엇이건 너를 지켜.”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내내 도움을 받기만 하던 주애가 희란에게 먼저 손을 건넨 순간이 그가 기어코 말에 올라탔을 때였던 건. 이들을 집요하게 대상화하던 ‘말’은 두 여자가 제 발로 안장에 오르고, 고삐를 쥐고, 가야 할 길을 선택하면서 결국 주체의 상징이 된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벗어나고, 외면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저항하는. 우리를 그토록 불편하게 한 주애의 주체성의 완전한 전환점. 이건 어쩌면 말을 탄 <델마와 루이스>인지도 모른다.
공기중을 내달리며 온몸으로 쏟아지는 해방감은, 그러나 모든 이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자기만의 변곡점을 찾지 못한 배우 황미나(이소이). 남성적 카타르시스와 이미지즘으로부터 빠져나오길 거부하고(혹은 두려워한 것일지도) 동거남 구중호에게 모든 주체성을 위임한 여자는 유흥 가득한 또 다른 연회에서 코카인중독으로 목숨을 잃는다. 자아의 소멸은 곧 선택권 박탈과 같다. 다음 스텝을 제 손으로 직접 만들어나가는 이들과 오직 기득권에 의지한 이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이 하나 흐른다. 그럼에도 이들은 가엾은 동료를 잊지 않는다. 그의 죽음이 온통 외로움으로만 점철되지 않도록 새로운 용기를 어떻게든 생성해낸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보자. 카메라 앞에 헐벗은 저 여자는 내 편일까. 그냥 벗지 않고 내 편이면 좋으련만 여전히 쉽지 않은 질문이다. 하지만 주애의 말마따나 1980년이 아니라 2025년이 되어도 새로운 시대는 오지 않는다. 여전히 “어마어마한 쌍년”이 되어야만 그나마 버틸 수 있는 사정들이 있다. 그러니 이들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 확인하기 이전에 필요한 것은 그 사정을 먼저 보는 것이다. 희란이 주애와 미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러면 분명 고삐는 쥐여질 것이다. 먼 길을 헤매더라도. “다시 돌아갈 게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