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희 감독의 ‘3학년 2학기’는 대학가요제를 향한 열망으로 요동쳤다. 수상자를 많이 배출한 학교가 어딘지도 알아뒀다. 기어코 그곳에 입학해 록 그룹 보컬 오디션에 합격했는데, 며칠 전 친해진 연극부 선배들이 눈에 밟힐 줄이야. 가창력을 평가받던 순간보다 편안한 분위기에 홀린 새내기는 마이크 없이 맨몸으로 무대에 서길 택했다. 학생 신분으로 시작한 연기에 빠져 배우이자 기획자로서 극단 한강을 거친 다음 <웰컴 투 동막골> 현장까지 경험했다. 카메라 곁에서 집중이 더 잘된다는 걸 통감한 나날이었다. 그러다 “동네 공원에서 재미난 걸 하고 있다”는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 밴드가 공연 중이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어설피 연주하는 사내들은 “마치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주인공들 같았다”. 그들에게 반한 기억을 더듬어가며 만든 데뷔작 <휴가>에 이어 특성화고 학생들의 첫 사회생활을 그린 신작 <3학년 2학기> 개봉을 앞둔 이란희 감독이 툭 터놓았다. “처음부터 켄 로치가 되려고 한 건 아니었다.”
- 공장 현장 실습생 창우(유이하)는 주어진 일에 열심이지만 잘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다. <3학년 2학기>의 주인공이 창우여야 했던 이유는.
<3학년 2학기>에는 성민(김성국)처럼 용기 있는 인물도 있다. 반면 창우는 별거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주인공으로 세웠다. 직업계 고등학교 교사들에 따르면 학생들이 처음 입학할 때만 해도 공기업에 입사할 수 있다거나 특성화고 전형으로 수도권 대학에 갈 수 있다는 희망에 차 있다더라. 그러다가 2학년 2학기 때부터 소위 ‘현타’를 느끼고, 3학년 때는 완전히 눈높이가 낮아진다고 한다. 꼭 좋은 직장에 가야 인생이 활짝 피는 건 아니지만 학생들에게는 그게 기준이기에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신이 쪼그라든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긍지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게 창우다.
- 어머니가 홀로 키우는 삼형제의 장남이라는 점도 창우의 큰 특징이다.
의외로 많은 관객이 창우가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하던데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창우에게는 노래하고 싶어 하던 고등학생 때의 나처럼 특별한 재능도, 취업에 유리한 스펙도, 좋아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집안도 없다. 선택지가 적은 것이다. “이거 아니면 뭐 할 건데?”라는 질문이 창우의 핵심적인 대사다. “뭐라도 하겠지”라고 말할 수 있는 배짱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앞선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공장을 택한 건데, 창우에게는 그 선택에 대한 명분이 필요했을 테다. 공장에 가면 엄마와 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명분. 그건 희생과는 다르다고 본다.
- 이 영화 속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어떤 존재이기를 바랐나.
어른들이 나름대로 자기 역할을 다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기를 바랐다. 그런데 각자의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용접사 한 주임은 창우에게 친절하지만 창우가 다친 채로 일해야 할 때 수고하라는 인사와 함께 지나친다. 호의는 베풀 수 있지만 아이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싸워주는 사람은 아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어른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특정 캐릭터를 빌런으로 몰아가 이 영화의 여러 맥락을 축소하고 싶지는 않았다.
- 그래서 극 중반 펼쳐지는 한 인물의 장례식에서도 한명의 악인이 아닌 그가 처한 환경 자체가 그를 좀먹고 있었다는 암시만 전했나.
죽음을 보다 직접적으로 다뤄야 영화적이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사고의 순간을 재현하는 것은 실제로 비슷한 사건으로 유가족이 된 분들이 관객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일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분들에게 예를 갖추고자 아이들의 일상을 그리는 데 더 집중했다. 또래들과 밥 먹고, 수다 떨고, 실습 일지를 한줄만 썼다가 여러 줄 썼다가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슬픔의 자리가 얼마나 익숙하지 않은지도.
- 창우가 기타로 연주하는 <울게 하소서>가 정중한 진혼곡으로 들렸다.
주인공이 비극을 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화가 한 인물의 죽음에 너무 함몰되지 않되 그 죽음에 예의를 지켜야만 했다. 창우의 연주가 그 역할을 해줬다. 장례식 시퀀스가 끝난 다음 등장하는 그 장면이 꼭 창우의 뒷모습이어야 한다고 직감했다.
- <휴가>에 이어 <3학년 2학기>에서도 무언가 차려 먹고 나눠 먹는 행위를 자주 보여준다. 창우가 선생님에게 부탁하는 ‘맥모닝’, 첫 월급 턱으로 사는 ‘허니콤보’ 치킨은 어떻게 골랐나.
현장 실습생들은 공장 주변에 마땅히 놀거나 쉴 곳이 없는 걸 힘들어하더라. PC방도, 프랜차이즈 카페도, 패스트푸드점도 없어 점심시간을 마땅히 즐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게 마음에 남아 창우가 공장에 들르겠다는 학교 선생님에게 맥도날드에서 아침 메뉴를 사다 달라고 하는 설정을 넣었다. 비싼 치킨은 씨리얼의 유튜브 채널(@creal.official)에서 ‘용돈 없는 청소년’이라는 콘텐츠를 보고 따왔다. 엄마가 사오는 옛날 통닭만 먹다가 친구 집에 놀러가 브랜드 치킨을 먹고 놀란 학생이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동생과 그 치킨을 사먹었다는 일화가 기억에 남았다. 창우도 월급을 타면 동생을 위한 음식을 챙겼을 것 같고, 연출부가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브랜드 치킨을 말해줘 반영했다. 원래는 내 취향의 치킨을 시나리오에 넣었는데 그건 요즘 취향이 아니라고 하더라. (웃음)
- 공장 사장실 신에는 사과가 나온다. 사장이 직원이 내온 새 사과를 두고 갈변된 사과를 먹는 까닭은.
취재하다가 실제로 목격한 장면이다. 그 대표님은 자기 업적에 대한 자부심이 큰 분이었는데, 제작진을 위해 새 사과를 내주고는 본인은 갈변된 사과를 드시더라. 그게 내게는 놀라운 장면이었다. 절약하는 게 몸에 밴 분인가 싶으면서 영화 속 사장을 묘사함에 있어 많은 상상을 할 수 있게 했다.
- 개봉 전 마지막 관객과의 대화를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진행했다. 그날 “처음부터 켄 로치가 되려고 한 건 아니었다”고 고백했는데, 앞으로는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나.
자전적인 경험을 녹인 단편을 만들다가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 밴드에 꽂혀 <휴가>를 구상하고, 현장 실습생들의 사고 소식을 잊지 못해 <3학년 2학기>를 찍는 바람에 노동영화 전문 감독으로 불리고 있다. (웃음) 그렇지만 관객이 우리 영화를 어렵거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닌 보편적인 이야기로 봐주길 바란다. 누구에게나 첫 노동은 첫사랑만큼 고생스러운 일이지 않나. 앞으로도 지금까지 그래왔듯 시선이 자꾸 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