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박 로드리고 세희의 초소형 여행기]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젊어서부터 많은 시간을 여행으로 보냈다. 대체로 단출하게 짐을 꾸려 혼자서 이곳저곳 쏘다니는 배낭여행이었다. 지금껏 70개국 정도를 여행했고, 기간으로 놓고 보면 5년을 훌쩍 넘긴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엇비슷한 여행을 하도 다녀서인지 감흥이 예전만 못해 이제는 나름 새로운 여행을 해보려고 애쓴다. 나의 삶에 여행의 환희는 여전히 필요하므로. 그래서 산악스키, 자전거, 카약 등 무동력 운송수단으로 여행하는 일에 심취했었다. 무동력 여행 중에서도 요트는 유독 진입장벽이 높은데, 요트 자체가 고가이기도 하고 계류를 비롯한 유지비용이 만만치 않아서다. 또한 요트는 기본적으로 네명의 선원이 탑승해야 항해할 수 있는데 나에겐 요트도 없고 동료도 찾기 힘들었으니, 요트 여행은 점점 소원해졌다. 그런 사정 속에서 반가운 풍문이 들려왔다. ‘개척자들’이라는 NGO에서 요트 항해 훈련을 한다는 것이었다. 인도네시아에 가서 무려 한달 동안.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훈련이 필요한지, 어떤 자격이 필요한지 전혀 몰랐지만 일단 마음먹었다. 무조건 참여하리라. 고백하건대 개척자들처럼 인류의 평화를 좇아 항해 훈련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염치없지만 그토록 요트 여행이 하고 싶었다

개척자들이 해마다 항해 훈련을 하는 곳은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섬이었다. 말이 섬이지 한국의 두배 정도 되는 큰 섬이었다. 술라웨시에는 ‘산덱’이라는 전통 요트를 가진 해양 민족이 살았다. 산덱의 역사는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현지의 어부들은 지금까지도 산덱을 몰아 어로 활동을 한다고 한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그랬던 것처럼. 개척자들의 최종 목적지는 ‘루아오르’라는 작은 바다 마을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차로 10시간을 더 달려야 하는 외진 곳이었다. 새벽 4시 즈음,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마을에 개척자들이 탄 차가 들어서자 히잡을 쓴 누군가가 집에서 나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올해도 어김없이 오랜 친구들이 찾아온 것을 확인하고는 일일이 손을 잡고 포옹하며 맞이해주었다. 외지에 나간 아들, 딸이 일년 만에 불쑥 돌아온 것처럼 살갑게 환대했다. 미리 기별을 넣은 것이 아니었다. 매년 이맘때 한국에서 오는 친구들인가 싶어서 나와 본 것이었다. 딱히 소란스럽지도 않았는데 여러 집에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새벽녘이 무색하게 마을은 금세 적도의 태양만큼이나 뜨겁게 들썩였다.

하루, 이틀 회포를 풀고 이런저런 항해 준비를 마치자 개척자들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방수포에 싸서 해체해놓은 산덱 요트를 조립하기 위해서였다. 산덱의 선체는 나무로 만들고 각각의 부분을 끈으로 묶어서 조립하는 형태였다. 험한 바다에 나가야 하니 대충 매어서는 안됐다. 바다를 항해하는 일은 뭍에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험한 일이니까. 오랜 세월 끈과 나무를 만져온 마을 어른들의 손놀림은 장인을 연상시킬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뚝딱 완성된 산덱의 첫인상은 가볍고 날렵했다. 그리고 뜯어볼수록 단아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선체는 단순하고 단단했고, 선체의 양쪽 옆으로 소금쟁이의 다리가 연상되는 대나무 관을 달아 부력을 보완했다. 엄연히 요트인데 못이나 접착제를 전혀 쓰지 않고 순전히 끈으로 묶어 만든다는 게 다시 한번 경이로웠다.

개척자들의 산덱이 완성되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단출한 진수식을 가지고 바다에 배를 띄웠다. 처음 항해하던 날의 환희는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 산덱 위에서 들을 수 있는 세상의 소리는 오직 파도와 바람뿐이었다. 터질 듯이 팽팽해진 돛은 커다란 울림판이 되어 바람의 방향과 강도에 따라 음을 바꾸어가며 노래를 불렀다. 나는 눈을 감고 귀를 귀울였다. 바다 한가운데서 듣는 바람의 노랫소리. 산덱은 파도를 잘도 넘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종종 큰 바람이 불거나 큰 파도에 부딪힐 때면 휘청거렸으나 매듭이 가진 탄성 덕분에 부러지는 곳 없이 낭창거리며 버티었다. 강한 바람이 통나무는 부러트려도 갈대는 부러트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풍랑 위에서 산덱은 하나의 완전한 유기체였고 그 위에 올라탄 나는 온몸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개척자들은 해상 훈련을 하는 동안 철저하게 루아오르 마을의 일원이 되어 생활했다. 마을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야자열매 껍질을 말려 불쏘시개로 쓰고, 앞바다에서 잡은 생선을 구워 스스로 식사를 지어먹었다. 마을 가운데에 난 공동 우물에서 이웃과 함께 목욕하고 빨래하며, 바다에 걸어들어가 아랫도리만 잠그고 용변을 그대로 흘려보내는 현지의 풍속을 따랐다. 낙후된 생활상을 흉내내거나 체험해보는 차원이 아니었고 진심으로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자 애썼다. 뼛속까지 검소함이 몸에 밴 활동가들의 자족적인 생활에 단박에 적응하기란 어려웠다. 나는 지나치게 세속적인 사람이니까. 콜라 한캔조차 쉽게 사먹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밤마다 거처에서 빠져나와 몰래 콜라를 마시며 하루를 돌이켜보곤 했다. 개척자들이 보여준 삶의 태도는 단순하고 솔직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이 여행은 그저 요트를 타기 위한 여행으로 그칠 수 없었다. 그동안 찾아 헤매던 ‘새로운’ 여행을 드디어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원하던 여행의 환희가 다시 차오르고 있었다.

국제평화단체인 개척자들은 제주, 오키나와, 타이완을 잇는 바닷길 3000km를 요트로 항해하고자 한다. 군사시설이 즐비하고 무력 충돌이 빈번한 동아시아의 바다를 공존과 평화의 바다, 공평해(共平海)로 만들기 위한 캠페인의 일환인 것이다. 요트는 바람을 동력으로 사용한다. 강한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엄청난 속도를 내지만 바람이 멈추면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한자리를 맴돈다. 바람이 불어야만 나아가는 게 요트의 숙명이다. 개척자들의 요트가 공평해를 항해하기 위해서도 바람이 불어야 한다. 바람(wind)과 바람(wish)이. 나는 가만히 상상해본다. 많은 사람들의 바람을 모아 비용을 마련한 개척자들이 마침 공평해를 항해하는 그날을. 그리고 그 배에 당당히 선원으로 탑승한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