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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우먼후드 <발코니의 여자들>

폭염경보가 내린 마르세유의 여름을 배경으로 한 <발코니의 여자들>은 한집에 머무는 세 여자친구들의 이야기다. 촬영장에서 탈출한 배우 엘리즈(노에미 메를랑)가 친구 니콜(산다 코드레아누)의 거실에 들이닥쳐 격렬하게 숨을 몰아쉴 때부터 전조는 심상찮다. 이 영화는 공황에 빠질 참이다. 첫 소설을 쓰며 고전 중인 니콜은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성생활에 개방적인 캠걸 루비(수헤일라 야쿠브)는 야유에 익숙하며, 마릴린 먼로 분장을 하고 나타난 엘리즈는 남편을 포함한 모든 남성의 성적 대상이 되는 상황을 더이상 용인하기 힘들다. 첫인상에서 알모도바르의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를 떠올리게 하지만, 메를랑의 데뷔작엔 양식미를 향한 스타일리스트의 완벽주의보다 참다못해 터져나온 비명의 열기가 한참 앞선다.

발코니를 드나드는 빌라 거주자들을 모조리 훑는 크레인숏이 <발코니의 여자들>의 오프닝 시퀀스다. 사뭇 교과서적일 정도로 제3의 물결 페미니즘을 향한 직접적 응답인 노에미 메를랑의 감독 데뷔작은 앨프리드 히치콕의 <이창>과 로만 폴란스키의 <테넌트>- 영화의 제왕이든 캔슬 컬처를 대표하는 성범죄자든 간에 여전히 시네마의 명예로 거론되곤 하는 남성감독의 자취- 를 인용하고 다분히 의식하면서 새출발하려 한다. 공동생활의 전경을 유유히 장악한 카메라가 도착한 곳은 가정폭력으로 곳곳에 피멍이 든 여자의 얼굴이다. 곧이어 등장한 남편이 발코니에 누운 여자를 발로 차며 깨우자 죽은 듯 미동이 없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죽음을 가장하기도 한다지만 우리가 보는 건 어떤 방어도 할 수 없어서 죽은 척하기로 한 사람, 한명의 여자다. 곧이어 여자가 결심한 듯 삽으로 남자의 뒤통수를 찍어내릴 때 메를랑의 영화는 즉시 주제와 톤을 설정한다. 중요한 것은 살인사건이 아니라 그 세부다. 죽이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보다 더 호들갑을 떨고, 목을 조르지 못해 얼굴을 엉덩이로 깔아 뭉개는가 하면, 완벽 범죄와는 하등 거리가 먼 피투성이 난장이 펼쳐진다. 이웃집의 소요는 금세 세 여자친구에게도 옮겨 붙는다. 맞은편에 사는 잘생긴 이웃 마냐니(뤼카 브라보)가 루비를 강간하려 하면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세 친구는 곧 학대자의 시체를 처리해야 하는 난제에 놓인다.

당신이 만약 <나를 찾아줘>나 <프라미싱 영 우먼>을 좋아한다면 <발코니의 여자들>과도 통할 수 있을 것이다. 친절과 호감을 가장한 성적 폭력에 넌덜머리난 여자들이 살인마로 돌변하는 일군의 영화가 스릴러와 호러는 물론, 반드시 일말의 코미디와 결합하는 양상이 특징적이다. 얼기설기 터지고 불완전한 모양새의 해방을 겨우 거머쥔 여자들이 웃을 수밖에 없는 해학이 여기 있다. 이들 영화에서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되고 몸이 전시되는 성별도 그와 같다. 여성의 고통을 그리기 위해 여성의 몸을 그래픽하게 보여주는 <리벤지> <서브스턴스>의 코랄리 파르자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한편 <발코니의 여자들>이 유독 표출한 지점은 따로 있는데, 어째서 더 많이 언급되지 않는지 의아할 정도다. 노에미 메를랑은 감독의 지위를 자발적 신체 노출에 동원했다. 산부인과를 찾은 엘리즈가 진료대에 앉았을 때 카메라에 정면으로 보이는 성기나 남편의 요구에 지쳐 거리로 달아난 순간 원피스 밖으로 아무렇게나 삐져나온 가슴을 통해 노골화되는 신체성은 결국 하나의 경구로 수렴한다. 몸은 몸이다. 몸을 몸으로 봐주지 않아 과민해진 엘리즈의 대장은 매일 원치 않는 순간에 방귀 소리가 새어나올 정도로 망가져 있다. 역시 몸은 몸이다. “여자의 신비는 선택이 아니라 처벌”이기도 하다고 <발코니의 여자들>은 바꾸어 말한다.

여기서 잠시, 소설가 데뷔를 앞둔 작가 니콜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기본에 충실하고 감정과 주제를 찾으라는 중년 남성 멘토에게 니콜은 반항한다. 니콜이 바라는 것은 구조적 새로움이다. 싸우고, 구하고, 구원하는 일방향적 전개는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인데 용기와 안목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갈피는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영화의 시공간도 화자의 바람을 따라 슬며시 해체된다. 한여름 태양이 3차원의 벽 일부를 무너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발코니의 여자들>은 이에서 저곳으로 갑자기 숏이 튀고, 혼자 있다 같이 있게 되는 요상한 전환들에 능하다. 현실과 환상, 개별과 집단, 실내와 발코니 사이의 구분이 흐릿해지면서 세 여자의 의식은 하나의 거대하고 끈적한 원한이 되어 뒤엉킨다. 마냐니의 죽음 이후 니콜은 그의 유령과 소통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동네 여자들이 죽인 온갖 남자들의 유령에 시달린다. 제각기 다른 폭력의 이력을 소유한 남성 유령들이 집단적 억울함을 호소할 무렵에 <발코니의 여자들>이 지닌 산만함도 극에 달한다. 실실 웃기면서도 유령들의 필요를 의심할 때쯤, 니콜은 유령 마냐니에게 기어이 자백을 받아낸다. 자신은 강간한 게 아니라고 주장하던 남자가 끝내 “나는 여자를 강간했다”고 스스로 인정하도록. 유럽 아트하우스 영화를 중심으로 스크린에 음습함을 불러내고 다른 세계로의 당혹스러운 초대를 알렸던 아날로그적 유령들이 메를랑 영화에서는 오직 증언을 위해 쓰인다. 아우라를 잃고 완전히 납작해진다. 이 영화가 별도로 묘사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도 전에 스스로 죽은 남자들도 메를랑이 집요하게 추궁하고자 한 유령들의 일원일 것이다. <발코니의 여자들>이 걸어가는 구불구불한 행로에서 비집고 나온 초현실성은 극도로 역겨운 현실성을 가리키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우리끼리 있을 때만 진짜 나 자신이 될 수 있어.” 이 흘러넘치고 정신 사나운 영화가 남긴 메아리는 소동의 뒷맛도 복수극의 쾌감도 아니다. 여자친구들이 모인 첫날 밤, 엘리즈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정확한 쓸모를 직감한다. <발코니의 여자들>은 궁극적으로 세 주인공을 결속시키고 인생이 그들에게 던지는 무감한 폭력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 우먼후드, 여성들의 우정에 바치는 찬사다. 그러므로 시체를 빠트린 바다에서 돌아와 다시 향할 곳은 제목 그대로 그들의 발코니여야 한다. 세상의 위협을 감수하는 동시에 서로를 지켜볼 수 있는 경계의 공간. 그곳에서 충동과 혼란을 나누고 서로에게 해방감을 선사한 뒤 다시 거리로 나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진실만큼은 <발코니의 여자들>이 끝까지 지켜낸 달콤한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