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리코르디아>에서 가장 기이하면서도 욱신거리는 정념마저 불러일으키는 장면. 그것은 아마도 임무를 완수한 듯 만족스러운 표정의 미망인 마르틴(카트린 프로)과 손을 맞잡은 제레미(펠릭스 키실)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운 채 심연의 어둠으로 스며드는 엔딩 신일 것이다. 이때 화면 밖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사제 필리프(자크 드블레)는 매장되어 있던 뱅상(장바티스트 뒤랑)의 시신과 단둘이 있기를 간청한 후, 역시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어설프게 매장되었던 뱅상은 완전한 죽음에 이를 것이며, 보잘것없는 증거였던 버섯도 숲속에서 불쑥 솟아오르기를 멈추고 이제 침묵할 것이다. 마르틴이 침대 위 조명을 소등하는 순간, 오롯한 암흑만이 조용한 마을과 프레임을 잠식한다. 스스로 불가지론자임을 밝히며, 신에 대한 인간의 복종과 같은 개념을 거부한다고 했던 알랭 기로디의 선언(<필로> 42호)을 증명이라도 하듯, 영화는 유일하게 르상티망을 가졌던 예언자 뱅상을 삭제한다. 신의 자비와 구원이 들어설 곳 없는 이 마을에 남은 것은, 금지된 욕망에 복속되어 한없이 연약해졌다가도 악랄해지는, 금기를 향유하는 불가사의한 공동체다.
전작 <호수의 이방인>에서 쏟아지는 햇살 위로 몸을 맞대는 남성들의 육체에서 증폭되는 관능의 최대치를 가공했던 알랭 기로디는 <미세리코르디아>에선 어둠 속에 묻힌 죽은 신체에서 발현되는 기이한 관능을 추출해낸다. 영화의 오프닝, 공간을 식별할 만한 이정표 하나 없는 지루하면서도 의뭉스러운, 어디론가 향하는 듯하면서도 짐짓 망설이는 것 같은 느린 시점숏 끝에 제레미를 맞이하는 것은 아마도 그에게 부고장을 보냈을 미망인 마르틴의 떨리는 얼굴이다. 이어서 들어간 방에는 그의 스승이었던, 그리고 이후 밝히기를 한번도 잊은 적 없이 열망했던 장피에르의 시신이 뉘어져 있다. 카메라는 제레미와 장피에르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교차시켜 비춘 후, 이어서 땅에 묻힌 관을 응시한다. 마치 방금 본 육체는 관 안에 갇혀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임을 확언이라도 하듯. 다음 숏에선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몇 안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제레미는 이제 그들 편에 서 있다. 사제 필리프가 공동체를 위해 중재해주기를 바라면서 장피에르에게 작별의 인사를 전할 때, 카메라는 다시 땅에 묻힌 관과 그 위에 선명하게 각인된 십자가 위로 흩뿌려지는 흙을 비춘다. 이 짧은 몽타주는 부고장의 외양을 띤 초대장을 받고, 언젠가 빠져나왔을 조용한 마을을 제 발로 다시 걸어 들어온 무고한 제레미를 마을의 공동체로 강제로 이주시킨다.
에로틱 스릴러의 자격을 갖춘 <미세리코르디아>는 장피에르와 뱅상, 두 부자의 죽음이 남긴 공동체의 구멍으로 이식된 욕망을 체현하는 천연덕스러운 몸짓들의 연쇄를 그려낸다. 두 차례의 죽음이 촉발하는 이중의 관능은 멈춰버린 빵 기계와 미완성의 욕망에 전원을 켜고 조용한 마을에 구원받지 못할 자비를 싹틔우려 한다. 제레미의 출현은 매장되어 있던 과거의 관계들을 소환한다. 장피에르를 사랑했던 제레미, 그리고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마르틴을 비롯해 제레미는 뱅상과 왈테르(다비드 아얄라)와도 야릇한 제스처를 주고받는다. 기로디는 줄곧 보여주었던 전경화된 섹스 장면 대신, 장피에르의 죽음을 질료 삼아 형성되는 인물간 장력을 복잡미묘하게 쌓아올린다. 이 영화를 장악하는 서스펜스의 첫 번째 기류는, 마르틴이 제레미에게 먼지 쌓인 빵 기계와 함께 조용하다 못해 중성화된 것 같은 생마르샬이라는 마을이자 욕망 기계를 다시 가동시켜주기를 은근히 부추기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 영화의 두 번째 서스펜스는 뱅상의 죽음 후에 그의 시체를 찾는 과정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뱅상은 어째서 아버지의 옷을 입은 옛 친구의 손에 죽어야만 했을까. 다소 과장해보자면 뱅상은 장피에르의 죽음 후에 재편되는 공동체의 형상을 앞서 예견하고 반대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사제와 마르틴이 주관하고 제레미가 순응하면서 완성되는 무위의 공동체의 존속에 불응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죽음에 처한다. 그렇다면 이 공동체란 무엇인가. 내가 타자에게 노출되고, 타자가 나에게 노출되면서 서로에게 기대는 편위로 형성되는, 그렇지만 결코 하나의 단일한 집합체가 되지 못한 채 서로의 유한성을 인정하며 끊임없이 미완을 향해가는 공동체.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제물로 기꺼이 내어준 것 같은 미망인과 더이상 불이 켜지지 않는 녹슨 십자가 아래에 기거하면서 ‘우리에겐 살인이 필요하다’고 속삭이는 사제이자 외로운 중년 남성은 장뤼크 낭시가 주창한 무위의 공동체를 발족한다. 이들은 시체 위로 솟아오르던, 미약하지만 유일한 증거였을 버섯을 수거해 나눠 먹으면서 맛을 음미하고 우애를 다진다. 이뿐인가. 제레미는 사제에겐 진실을 고하며 살인자를 매일 보는 낙을 충족시켜주고, 마르틴에겐 거짓과 변명을 늘어놓으며 스모 경기를 즐겨보는 그녀의 옆자리를 메울 준비를 한다. 짐짓 공동체의 희생양이 되면서 죗값을 치르는 것 같은 제레미는 왈테르를 찾아가선 능수능란한 유혹을 던진다. 조서를 작성해야 할 경찰들 역시, 사건의 전말을 파헤친다는 핑계로 마르틴의 집에서 술을 마시거나, 사제의 발기된 성기를 궁금해하는, 알리바이의 빈곳을 짚어주며 뱅상의 영원한 실종을 염원하는 호기심 넘치는 주민일 뿐이다.
자백과 두려움, 거짓과 변명 등 공존할 수 없는 두 영역을 수없이 가로지르며 진리언표적인 서사를 폐기하는 <미세리코르디아>는 들뢰즈가 현대 영화의 특징으로 제시한 거짓의 역량으로 세워진 공동체를 통해 우리에게 잔혹한 풍경화를 제시한다. 죄의식에 언덕을 오른 제레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의도치 않게 자신이 숲과 마을의 공간을 부지런히 오가며 꾸며댄 이야기들로 덧칠된, 종국에는 자신이 빠져나갈 길마저 뭉개져버린 열린 밀실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이 열린 밀실은 매일 오후가 되면 약속한 듯 호숫가로 찾아와 비밀스러운 욕망을 교환하던(<호수의 이방인>), 매춘부 이사도라에게 매혹되거나 혹은 관찰하다가 한데 모인(<노바디즈 히어로>) 기로디의 인물들이 형성하곤 했던 풍경이기도 하다. <미세리코르디아>는 관능이 촉발한 자비의 끝을 한층 더 집요하게 파고든다. 필리프는 몸을 던지려 한 제레미의 손을 잡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줄 것을 호소한다. 뱅상의 시체는 앞으로도 발견되지 않음으로써, 즉 참과 거짓이 범벅된 미제 사건으로 존재하면서 서로에게 무한한 자비를 허락하는 이 권능의 집단이자 욕망 기계가 유지되도록 헌신할 것이다. ‘일주일이 영원 같았다’고 울부짖던 제레미의 고백. 이 발언의 진위는 의심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십자가를 일찍이 장피에르의 관과 함께 매장하며 신의 구원을 비웃듯이 포기한, 서로의 샅을 삶의 우위에 둠으로써 플라톤의 이상국가로부터 추방된 것 같은 생마르샬의 주민들은 예수가 부활하는 고난의 일주일이 아닌, 공동체의 완벽한 복원을 일궈내는 일주일을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