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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격자구조의 노동, 조현나 기자의 <일과 날>

노동이란 주제를 내세우면서 다큐멘터리 <일과 날>이 택한 방법은 사무직 노동자의 근무지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시선을 두는 것이다. 이른 아침 가게 문을 여는 반찬가게 주인의 뒷모습부터 마네킹을 조립하는 마네킹 제작자, 염전의 염부에게로 카메라는 천천히 화면을 전환한다. 전술한 사람들 외에도 <일과 날>에는 재활용장의 선별원, 프리랜서 PD, 양조장 관리자, 어학원 직원, 육아휴직 중인 워킹맘 등 총 9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대체로 혼자 작업장에 나선다는 것 외에 이들에겐 나이와 성별, 직업 등 배경적 공통점이 없다시피 하다. 영화의 두 감독은 “관객에게 평범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직업군을 고르게 선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전한다.

인물들은 유사한 방식으로 화면에 비친다. 같은 환경에서 매일 동일한 작업을 수행하는 이들의 숏이 연이어지는 식이다. 노동을 끝마친 뒤엔 암전과 함께 하루가 마무리된다. 넓게 보면 영화가 시작하고 끝을 맺는 구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필멸의 인간들 눈에 쟁기질할 시간이 모습을 드러내면 그대는 지체 없이 일을 시작하라. 마른 땅도 젖은 땅도 쟁기질하되 이른 아침부터 서둘도록 하라”라는 헤시오도스의 시 <일과 날> 인용구와 맞물려 영화는 아침을 여는 노동자의 시퀀스로 시작하고 잠든 이의 시퀀스로 끝난다. 막이 오르고 내리듯 규칙적으로 암전이 끼어드는 덕에 일정한 리듬감도 부여된다. 9명의 노동자의 시간을 이어 붙여 아침에서 저녁으로 향하는 길고 거대한 하나의 하루를 구성한다는 인상 이다.

여기서 출연자를 비추는 방식을 세부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들의 분량은 거의 비슷하게 분배되어 있다. 카메라는 출연자의 작업장 귀퉁이에 고정된 채 유사한 구도로 일하는 대상을 조명한다.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감에도 별반 차이가 없다. 이러한 연출은 특정 대상에게만 주목도를 올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비슷한 규격의 이미지를 생산해냈고 이들의 총합마저 지나치게 매끈하다는 인상을 준다. 의도적으로 사무 공간의 외연으로 선택지를 넓혀 출연자들을 선정했음에도 종국엔 이들의 육체노동이 지닌 생동감이 배제됐다는 느낌을 안기는 것이다. 이러한 충돌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낮과 밤 사이의 단절

출연자와의 거리감에 관해 좀더 살펴보자. <일과 날>에서 연출자는 철저히 관찰자의 위치에 선다. 다수의 다큐멘터리가 시도하는, 프레임 밖에서 출연자에게 말을 거는 인터뷰 형식도 시도되지 않으며 출연자들 역시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태도로 일에 열중한다. 카메라는 흔한 패닝숏 없이 고정된 채 롱테이크로 노동 현장을 촬영한다. 미디엄숏, 풀숏을 번갈아가며 대상과의 거리를 벌리고 클로즈업 역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현장의 앰비언스 사운드는 그대로 담겼으나 한두 차례를 제외하곤 출연자가 직접 발화하는 순간이 부재하다. 이때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내레이션이다. 감독들에 따르면 내레이션은 “노동자들이 일할 때 하는 생각을 듣는 듯한 효과”를 줄 목적이었고 때문에 이미지와 정확히 조응하기보단 노동의 고됨, 보람을 포함해 각자의 삶을 압축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일까. 출연자와 가장 내밀하게 맞닿는 순간임에도 감정이 절제된 내레이션은 출연자와의 간격을 쉽게 좁히지 못한다. 오히려 이 내레이션은 거리감을 유지한 채 출연자들의 밤과 직결된다.

극 중 노동자들이 휴식을 취하는 형태는 대체로 비슷하다. 이들은 TV와 휴대폰 화면을 보다 잠자리에 든다. 한 노동자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볼 수 있기 때문에” 뉴스를 시청한다고 말한다. 미디어 디바이스에선 저출산, 기후 위기, 인공지능과 같이 근미래에 현대인이 직면할 문제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뉴스를 통해 접한 미래 세계, 특히 고용불안에 대한 전망은 노동자들의 두려움으로 치환된다. “중요한 일은 다 기계가 하고 나는 부품이 된 것 같은 허전함이 느껴”지고 “스마트폰 하나면 뭐든지 되는데 굳이 고생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며 “더 편리해지긴 했지만 이대로라면 비참해질 것 같다”는 맥락의 대사들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노동자들은 묵묵히 일터로 되돌아온다. 기시감이 들 만큼 익숙한 풍경인 한편 이미지와 내레이션, 뉴스 보도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이 일련의 흐름이 이상한 괴리감을 안긴다.

<일과 날>은 동세대 노동자들의 현재에 과거와 미래를 끊임없이 틈입시키는 영화다. 과거의 경우 인물들의 내레이션을 통해 드러나는데 가령 전파사를 운영하는 노인은 “예전에는 모르는 얼굴이 없었”는데 언젠가부터 상가 골목 사람들과 “인사도 잘 안 하고 누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과 함께 퇴근길에 나선다. 염전의 염부 또한 기계가 없을 때 동료들과 협업하던 과거를 그리워하듯 회고한다. 반면 뉴스 보도는 과거에 비해 소수의 인간 노동자밖에 남지 않은 현시대의 풍경마저 손쉽게 뒤바뀔 것임을 암시한다.

출연자들의 낮과 밤을 다시 비교해보자. 프리랜서 PD가 야외 촬영을 할 때를 제외하곤 노동자들은 타인과 한 프레임에 담기는 순간이 거의 없다. 말하자면 하나의 숏엔 한명의 노동자만이 출연한다. 밤에도 다르지 않다. 이들이 세상과 연결되는 순간은 오직 미디어 디바이스를 통해서뿐이다. 그리고 그 연결의 순간엔 타인과의 소통이 아닌 오히려 소멸을 암시하는 뉴스 보도만이 도착한다. 낮이든 밤이든 출연자들에게 공통된 전제는 ‘단절’이다. 규모만 다를 뿐, 노동자들은 격자 형태의 일터가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무이한 공간인 것처럼 그 속에서만 움직임을 이어간다. 정확히는 영화가 그런 순간들을 채집한다. 이러한 반복된 노동의 이미지는 마찬가지로 각자의 일터에서 움직이고 있을 수백, 수천의 또 다른 노동자를 연상케 한다. 영화에 등장한 9명의 출연자 외에도 바둑판식으로 무한히 확장하는 일터와 그 속의 인간을 손쉽게 연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출연자 중 한 사람의 시퀀스가 같은 카테고리에 속한 다른 노동자의 것으로 바뀔지라도 <일과 날>의 톤 앤드 매너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 예상한다. 이러한 가능성은 일찍이 자신이 대체될 것을 우려한 노동자들의 불안, 뉴스의 예견과 직결된다. 영화에서 감지되는 출연자들의 무력감은 1980~90년대부터 노동다큐멘터리에서 숱하게 발견되어온 노동자 투쟁의 재현과 기록이 단순히 부재해서가 아니다.

대체된 노동자들의 자리

염부가 일할 때 등 뒤로 노을이 지던 풍경이나 사람의 키를 웃도는 양조장의 기계와 긴 튜브들, 컨베이어벨트를 통해 빨려 들어가던 거대한 쓰레기 더미,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가던 노동자들의 능숙한 몸짓 등 <일과 날>은 사무직 노동자의 시야를 넘어선 노동의 현장을 포착해낸다. 하지만 동시에 <일과 날>은 견고한 형식주의를 강조한다. 한명의 출연자가 하나의 숏에 담기는 격자식 구조와 과거, 현재, 도래하지 않은 미래까지 아우르는 수평적 구조를 동시에 취한다. 대상과 공간을 한정한 뒤 이를 파고들며 내부 시스템의 문제를 도출하는 여타 다큐멘터리의 수직적 구조와는 또 다른 접근법이다. 그러나 출연자들의 육체노동과 영화가 추구한 형식미가 과연 조화로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구조적 틀을 유지하려다 도리어 노동자들의 신체성마저 정제된 것은 아닌가. 그로 인해 <일과 날>이 정의하는 노동이란 운동의 형태가 지나치게 정량화된 것은 아닌지, 결과적으로 경험의 자리마저 사라진 것은 아닌지 일말의 아쉬움이 남는다. 그로 인해 노동자들은 파편화된 채 화면에 등장하고 영화가 보여주는 거대한 하루, 거대한 기계장치를 이루는 일종의 부품처럼 느껴진다. 미래엔 기계로 대체될 것이란 노동자들의 불안은 영화에서 이미 실현된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과 날>에서 언급하고 싶은 몇몇 장면이 있다. 첫째로 육아노동의 현장이다. 육아휴직을 얻은 워킹맘은 회사로 돌아갈 날이 기다려진다고, 사회생활을 할 때 얻는 보람을 다시금 느끼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회사로 복귀해서만이 진정한 노동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지만 영화에선 그의 육아 또한 온전한 노동으로 인정하며 카메라를 비춘다. 나머지 하나는 반찬가게 주인이 밥을 챙겨먹지 못하는 어르신들을 위해 따로 도시락 반찬을 만들어주는 때다. 염전의 노을처럼 미학적 아름다움을 담보하지도, 경제적 대가를 기대할 수도 없는 선택이지만 아마도 기계로 쉽게 대치되지 못할 인간적인 균열이 감지되는 드문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