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터뷰] 베이루트의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르제> 작가 겸 프로듀서 루아이 크라이시

제14회 아랍영화제 개막작인 <아르제>는 거칠게 요약하자면 비토리오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1948)을 현대 레바논에 이식한 영화다. 싱글 맘 아르제(디아망 아부 아부드)는 광장공포증을 겪는 언니 라일라(베티 타우텔), 레바논을 벗어나고 싶은 아들 키난(빌랄 알 하므위)과 함께 파이 가게를 운영하며 살아간다. 보다 많은 파이 주문과 신속한 배달을 위해 아르제는 키난에게 스쿠터를 사주지만 이내 도둑맞고 만다. 두 모자는 다양한 종교 종파가 존재하는 베이루트의 지역구를 다니며 스쿠터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아르제> 속 모자가 경유하는 도시의 일면은 곧 현대 레바논의 초상이다. 영화의 작가 겸 프로듀서인 루아이 크라이시를 만나 <아르제>와 레바논의 영화 이야기를 물었다.

- <아르제>가 지난해 베이징국제영화제, 트라이베카영화제 등 세계 각국에서 상영을 마치고 제14회 아랍영화제를 찾았다. 긴 여정이었을 텐데.

어딜 가든 따뜻한 반응을 얻어 감사했다. 트라이베카영화제의 경우 5회 상영을 했는데, 모든 회차가 매진이었다. 관객들이 <아르제> 속 인물들과 이들의 고군분투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고 느낀다. 특히 “베이루트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는 반응을 접할 때마다 기분이 좋다. 관객들은 대개 전쟁이 터졌을 때나 베이루트의 소식을 듣고, 폭탄이 터지는 뉴스 화면으로 이 도시를 기억하니 말이다. 주인공 아르제가 누비는 동네 풍경이 아름답고 활기차며 생명력 넘친다는 후기가 많다. 베이루트의 색을 아름답게 담아준 전혜진 촬영감독의 공이다. 영화를 통해 희망을 얻었다는 관객이 있는가 하면, 레바논 출신의 한 관객은 “레바논의 현재를 희망적으로 그리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이다”라고 평했다. 레바논의 현실이 녹록지 않고 삶이 팍팍하지만, 희망이 없다면 모두가 어떻게 버티겠나. 나와 가족이 살아갈 레바논을 떠올리면 영화를 통해 희망을 선사할 수밖에 없다.

- 지금 레바논의 여러 정치·사회적 상황 중에서 어느 요소를 부각해 작품에 녹일지 고민한 과정을 들려준다면.

한 가족과 그들이 겪는 일상적 고난에 집중했다. 이들이 영화 속에서 수행해야 할 목표는 단 하나다. 더 많은 파이를 팔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이외의 것들은 모두 이야기가 놓인 배경이다. 이야기가 레바논에 놓였기 때문에, 캐릭터들은 자연히 레바논에 존재하는 사회적 문제와 맞닥뜨린다. 전쟁, 폭발 사고, 권력에 의한 지배 등등.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진 것들이기도 하다. 그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살아간다. 도시를 돌아다니며 생계를 이어가고 어떻게든 자기 삶을 꾸린다. <아르제>의 핵심은 가족 관계에 있다. 이 관계를 진실하게 그려내면 전세계 어디든 공감을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관객 모두가 누군가의 부모거나 자식일 테니까.

- <아르제>는 아르제와 키난이 도둑맞은 스쿠터를 찾아다니는 로드무비다. 덕분에 관객은 베이루트 곳곳의 풍경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데.

베이루트는 다양한 종교 공동체가 섞여 사는 도시이지만 외곽일수록 특정 종교 공동체가 포진해 있다. 나와 미라 샤입 감독은 이같은 베이루트의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대부분의 베이루트 시민들은 태어난 동네에서 나고 자라며 정착한다. 달리 말해 공동체 너머 타인과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아르제와 키난이 베이루트의 다양한 도시를 오가기 때문에 베이루트의 시민들이 자신의 동네가 나올 때마다 ‘저 거리 알아!’ 하며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 다양한 로케이션에서 촬영하며 경험한 에피소드가 있나.

나와 감독, 또 다른 제작자인 파이잘과 제이나와 로케이션 헌팅을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동네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우리가 외지인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그런데 “영화 촬영할 장소를 찾고 있어요”라고 말하면 모두 반색하며 즐거워했다. 대부분 한번도 영화 촬영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촬영 때마다 “지금 뭐 찍어요?”라며 큰 소리로 묻는 군중을 통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웃음) 촬영 당시 나라 전체가 최악의 경제 위기를 겪었고 전력 위기가 심각했다. 거리 조명과 자동차 불빛만으로 야간 장면을 촬영하는 게 정말 큰 도전이었다. 밤새 거리를 돌아다니며 불이 들어오는 가로등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 오프닝크레딧을 보면 필름인디펜던트에서 지원하는 글로벌미디어메이커스 프로그램과 레드시로지, 토리노필름랩 등 <아르제>가 탄생하기까지 해외의 비영리단체나 영화제로부터 제작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세 프로그램 모두 감독을 위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이었다. 레드시로지에 참여했기 때문에 이들이 처음으로 운영한 펀드에 지원할 수 있었고, 전체 제작 예산의 1/5에 해당하는 금액을 수령할 수 있었다. 자금을 확보하니 이집트와 카타르에서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였다. 다른 두 프로그램과 달리 레드시로지는 실제로 자금을 지원했기 때문에 공동제작자로 이름을 올렸다. <아르제>는 전적으로 아랍권의 자금으로 제작됐다. 대개 레바논의 독립영화는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과 공동제작으로 만들어지는데, <아르제>는 다른 길을 걸었다는 점으로 주목받았다. 뿐만 아니라 <아르제>는 전혜진 촬영감독을 제외하고 베이루트에서 촬영을 진행한 제작팀 전원이 레바논인이었다. 이후 후반작업에 캐나다와 이집트에서 온 크루들이 합류하며 글로벌 프로젝트가 되었다.

- 레바논 내의 지원은 없었나.

불행히도 레바논에는 국가 기관에서 기금이나 인센티브를 운영하는 등의 산업 진흥이 없다. 영화의 제작 지원은 전부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대개 비영리단체를 통해야 하므로 후원자와의 관계 지속이 중요하고 모든 아랍영화 제작자에게 기회가 열려 있어 경쟁이 치열하다. 이런 상황에서 레바논의 영화가 보이는 성과가 놀랍다. 국가 지원 없이 오로지 개인과 민간의 노력만으로 매년 세계 주요 영화제에 초청받는다. 레바논의 상업영화는 주로 로맨틱코미디 장르에 편중되고 그외에는 전부 아트하우스영화다. 그 중간지점이 많지 않은데 <아르제> 가 그 사이를 채웠으면 한다. 영화제도 주목하면서 대중도 쉽게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