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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특정될 순 없는 매력적 모호함, <S라인> 이준오 음악감독

1세대 일렉트로니카 밴드 캐스커는 지난 20년간 감정의 온도를 부드러운 질감의 전자음 속에 녹여내며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캐스커의 리더인 이준오는 영화 <더 테러 라이브> <리틀 포레스트>와 드라마 <거래> 등의 음악을 담당한 음악감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독보적인 음악적 색채를 자랑하는 그가 기묘한 분위기의 드라마를 만났다. 모든 사람의 성관계 이력을 붉은 선으로 보는 세계를 그린 안주영 감독의 <S라인>에 참여하며 칸 국제 시리즈 페스티벌 장편 경쟁부문 음악상을 거머쥐는 영예를 얻었다. 인터뷰장에서 트로피 실물을 처음 본다며 신기해하던 이준오 음악감독과 함께 <S라인>의 작업기와 음악 세계 전반에 관해 나눈 대화를 전한다.

- <S라인>으로 칸 국제 시리즈 페스티벌 장편 경쟁부문에서 국내 최초로 음악상을 받았다.

안주영 감독이 전한 출품 소식에 잘됐다는 축하의 문자와 농담 몇 마디를 보냈다. 출품 자체를 잊고 지내다 시상식이 있던 날 새벽에 갑자기 전화가 울려 잠에서 깼다. 현지에서 온 전화였다. 잠에서 덜 깨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니 기쁘고 감사했다.

- 안주영 감독과는 단편 <할머니와 돼지머리>, 장편 데뷔작 <보희와 녹양>에 이어 드라마 <S라인>에 참여했다. 감독의 경력에서 중요한 분기를 함께했는데, 어떻게 시작된 인연인가.

한국영화아카데미 재학 시절, 안주영 감독이 자신을 캐스커 팬인 영화학도라고 소개하며 메일을 보냈다. 그간 영화음악 작업은 꾸준히 했지만 한번도 단편을 작업한 적이 없더라. 그렇게 안주영 감독의 전작을 보게 됐다. <옆구르기>라는 단편이 참 재밌었다. 편집본으로 받은 <할머니와 돼지머리>도 보통 영화가 아니었다. 어딘가 생각하는 게 유별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 호기심에 작업하게 됐다. 그 후로 안주영 감독의 작품이라면 계속 참여하는 중이다.

- <S라인>의 시나리오를 읽고 어떤 인상이 들었나.

안주영 감독이 시나리오를 주면서 메일에 “머릿속에 의문점이 많이 드실 텐데 일단 다 봐주세요”라고 적었다. 시나리오를 읽고나니 정말 머릿속에 물음표가 많이 뜨더라.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안주영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그랬다. 에피소드마다 확실하게 날카로운 지점들이 꼭 있었다. 블랙코미디, 스릴러, 풍자극 같은 장르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는 모호한 음악을 만들면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 성적 관계를 맺는 사람들끼리 이어진 붉은 선이 보인다는 설정은 창작자의 흥미를 돋울 만한 소재다. 이 설정을 어떻게 음악적으로 풀고자 했나.

1화의 마지막은 현흡(아린)의 시선에서 세상이 어떻게 보여지는지를 드러내는 장면으로 끝난다. 붉은 선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는 현흡의 능력이 철저히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평생 자신의 눈앞에서 그 비극을 목도하며 살아온 막막함을 드러내고 싶었다. 무거운 저역을 사용하면서 어떤 음계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멜로디를 배치해서 이런 감정을 확연하게 드러내려 했다.

- <S라인>의 긴장감을 담당하는 두축을 구분하자면 아마 섹스와 스릴러가 아닐까. 서로 다른 두 파트에서 각자의 분위기를 구축하기 위한 방향성이 상이했을 것 같다.

크게 구분하진 않았다. 베드신에 사용된 음악을 살펴보면 에로틱한 음악이 단 한번도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 광경을 보고 있을 때 이상한 불쾌감이 먼저 일게 된다. 예를 들어 4화 ‘미성장’에서 등장하는 장면이 그렇다. 보고 있으면 야하다는 느낌보다는 이물감이 느껴진다.

- 그래서인지 <S라인>의 스코어들은 하나의 분위기로 환원되지 않는다. 캐스커 활동 당시 곡에 담긴 정서를 강조했던 만큼 <S라인>을 작업하면서 추구한 정서가 있었나.

밝지도, 어둡지도,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모호한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기존의 평균율 12음계의 튜닝을 벗어나는 음들을 배치했다. 음악적으로는 미분음이라는 명칭을 쓰는데, 반음 사이에도 무수히 많은 음계가 있다. 이러한 스타일로 음악을 쓰게 되면 메이저나 마이너 같은 특정한 정서로 사람을 안내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보고 듣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 4화 ‘미성장’은 폭넓은 음악 사용이 돋보인다. 수영장에서 현흡과 준선(이광희)이 대화할 때 흐르던 피아노 선율부터 미성(정미형)의 발걸음에는 글리치와 노이즈가 등장한다.

전체 에피소드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에피소드다. 기본적으로 피아노를 중심으로 가되 여러 서사적 포인트마다 변형을 줬다. 미성이 독백하는 장면은 편집본을 보면서 피아노를 쳤다. 유심히 들어보면 박자도 완전히 나가 있고, 대사가 끝나고 시작되는 타이밍에 따라 느낌이 바뀐다. 건반을 치는 사람이라면 정석적으로 가야 하는 5도, 7도 등 화성이 있지만 의도적으로 연주하면서 그 길을 비껴가기를 택했다. 반대로 현흡과 준선의 대화 장면은 안온한 느낌의 피아노 선율을 편하게 연주했다.

- 2022년 가수 윤상과 함께 노이스(Nohys)라는 팀을 결성했다. 첫 정규 《ethic》을 작업할 당시 영화 취향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하기도 했다고.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아무 제약 없이 하고 싶은 것을 편하게 시도하자는 프로젝트가 앨범까지 간 경우다. 솔직히 음악 얘기는 거의 안 했다. 윤상 형도 시네필이라 둘이 영화 얘기만 종일 했다. 《ethic》에는 서로가 좋아하는 고전영화의 코드가 깃들어 있다. 나는 구로사와 아키라와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를, 상이 형은 알레한드로 호도로스키를 좋아한다. 플롯에 집착하지 않고 보는 사람에 따라 이미지가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영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가령 <꿈> 같은 영화들 말이다. 이런 작품을 이야기하다 기승전결이 담긴 음악 대신 앰비언트처럼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청자가 내면의 이야기를 느낄 수 있는 음악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 캐스커의 음악을 기다리는 팬이 많다. 앞으로 아티스트 이준오가 걸어갈 길에 대해 듣고 싶다.

시간이 될 때마다 작업하려고 한다. 캐스커는 싱글이 나온 지 꽤 됐지만 이후에도 솔로 싱글을 계속 내고 있다. 다만 앨범처럼 긴 시간을 온전히 집중해 제작하기에는 여전히 해야 할 다른 작업이 많다. 최근에는 영화음악가와 뮤지션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적정하게 안배하는 법을 고민 중이다. 조만간 계기가 된다면 다시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