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가방에 작은 캐릭터 인형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게 유행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저도 가방에 하나 달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캐릭터라거나 감촉이나 색깔이 마음에 들어서 그걸 달고 다니는 거겠지만 인형의 표정 또한 중요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형에 작고 까만 눈을 새겨넣으면 약간의 배치로도 웃기고 귀여운, 멍청하고 귀여운, 아무튼 뭔가 신경 쓰이는 귀여운 얼굴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학교 책가방에 인형을 달아야 한다면 무표정하거나 피곤한 얼굴의 캐릭터로 반항적인 마음을 몰래 표현하고 싶을 것 같 네요.
점 두개만 보고도 얼굴의 형태를 떠올리다니 인간이란 참으로 인간 중심적인 동물입니다. 이를테면 <꼬마버스 타요> 같은 캐릭터도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눈동자와 표정처럼 보인다는 모티브에서 출발한 게 아닌가 싶어요. 만화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언젠가 서울 시내버스에 ‘타요’ 캐릭터들의 눈을 붙여 운행하는 작은 이벤트가 있었는데, 어린이들이 그 버스에 타고 싶어서 줄 서서 기다리는 등 열광적인 호응이 있었던 것이 떠오릅니다. 아마 캐릭터의 얼굴에서 떠오르는 기억을 좋아하는 거겠지요. 거창하게 얘기해보자면 인간은 어쩌면 두개의 점만으로 사랑에 빠질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형 서점을 거닐다가 조금 수상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문구 코너에서 중년의 여성 한분이 인형 하나를 쓰다듬으며 들었다 놨다 하면서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꽤 진지한 표정이었습니다. 옆에 있던, 아마도 딸인 듯싶은 인물이 “뭐 어때, 하나 사자~”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중년 여성은 순간 놀란 듯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라는 몸짓을 했습니다. 추측이지만 그녀는 자신을 위한 인형을 하나쯤 가지고 싶지 않았을까요. 인형이란 젊은 사람들의 것이라는 인식 때문에 괜스레 민망해졌을 것 같고요. 저는 다른 쪽을 구경하는 척 그녀들이 자리에서 떠나길 기다리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냉큼 그곳에 있는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러 갔습니다. 그녀들의 마음을 빼앗은 녀석은 다름 아닌 고양이 인형이었습니다. 부드러운 털 소재의 이 인형은 멍청하리만큼 온화한 표정이었는데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 눈이 일자로 감겨 있었습니다. 녀석의 목덜미를 잡고 진열대에서 꺼내려니 어딘가 기분 좋은 무게감이 있습니다. 통통한 성묘를 방불케 하는 탐스러운 크기로 엉덩이쪽의 충전재만 살짝 더 무거운 플라스틱 알갱이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무게중심이 안정적으로 맞춰졌습니다만 솔직히 엉덩이를 귀여워 보이기 위한 수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핑크색 발바닥까지 정성스럽게 재현하고 있네요. 인간이 고양이를 특히 대상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복잡한 생각이 들지만 이런 저도 마음이 조금 흔들린 것은 사실입니다.
집에 돌아온 저는 결국 인터넷을 뒤져 그 고양이를 찾아냈습니다. 장바구니에 담았다 뺐다를 몇번이고 반복하며 고민한 끝에, 서점에서 느낀 “뭐 어때”라는 마음으로 결제했습니다. 다다음날 택배가 도착해서 상자를 뜯을 때는 솔직히 조금 두근거렸습니다. 박스를 여는 것도 모르는 듯 투명 비닐로 포장된 고양이 인형은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구매의 여운을 느끼고 싶어 인형을 판매하는 사이트에서 구매자들의 후기를 찾아봤습니다. “17년 키우던 고양이 떠나보내고 너무 그리워서 샀음. 보고 싶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는 하얀 고양이가 담긴 액자와 고양이 인형이 함께 찍힌 후기 사진이 첨부된 글이었습니다. 액자 속 고양이와 봉제 인형은 사실 그리 닮진 않았지만 하얀 고양이가 가진 특징인 코와 귀, 발바닥의 분홍색은 비슷했습니다. “제가 오십대 후반인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입한 인형입니다.” “저희 집 고양이가 많이 아픈데 너무 좋아하네요. 친구가 되어주는 것 같아요.” 공장에서 만들어낸 고양이 인형들은 무언가를 다시 만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집에 도착해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물건은 고양이 모양의 천에 솜을 넣고 얼굴을 그려넣은 형태에 불과합니다만 그렇게 치면 인간도 피와 뼈를 단백질로 감싼 생명체에 불과하고요. 게다가 세월에 따라 변하고 노쇠하고 언젠가 사라지기 때문에 형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인형쪽이 더 낫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인간도 고양이도 만질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속 구멍이 고양이 인형으로 채워지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얼마 전, 메일로 한 영상을 받았습니다. 10년쯤 전에 찍었던 것을 최근에 발견해서 전달한다고 했습니다. 그냥 영상일 뿐인데, 저는 약간 겁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마음을 쓰는 데는 에너지가 필요하니까, 에너지를 다른 곳에 쏟아 모두 소모시키면 마음이 작동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재생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쓸데없이 웃긴 영상을 보거나 아무 내용도 없는 글들을 읽으며 에너지를 줄줄 흘려보냈습니다. 스스로를 한심해하면서 며칠간의 회피를 마치고 난 어느 무더운 오후에야 그 영상을 재생했습니다. 오래된 탓에 화질이 깨진 그곳에는 픽셀로 만들어진 당신이 있었습니다. 잠시 멍하니 앉아 그걸 보고 저는 뚱실한 고양이 인형이 있는 소파로 가서 잠든 녀석을 안고 쓰다듬어보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 제 품에 안긴 인형은 변함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울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