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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어려운 척 쉬운 길로, 이병현 평론가의 <슈퍼맨>

슈퍼히어로의 대명사인 ‘슈퍼맨’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 작품은 새로운 DC 유니버스를 알리는 공식 작품이다. 그러나 <슈퍼맨> (2025)이 남긴 첫인상은 어쩐지 뜨뜻미지근하다. 히어로물 패러디를 연상케 하는 특유의 톤 때문이다. 이를테면 <인크레더블> <메가마인드> <슈퍼배드> 같은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있던 비틀린 영웅물이 떠오른다. 물론 이들 애니메이션은 저마다 미덕이 있는 작품이지만, 슈퍼맨이라는 프랜차이즈에서 이와 유사한 기운을 느끼는 것은 당혹스럽다.

이 미지근한 온도는 단지 잭 스나이더 시절의 장중한 신화적 서사와 대비대며 나타난 낙차만은 아니다. 제임스 건이 ‘인간적인’ 히어로를 그리려는 시도 자체는 썩 흥미롭다. 문제는 이야기와 캐릭터의 설계다. 영화는 저스티스 갱을 비롯한 신인 히어로를 마치 오래된 인기 TV시리즈의 극장판 속 캐릭터처럼 관객의 면전에 던진다. 낯선 캐릭터가 아무 설명 없이 등장해 친근한 척할 때 관객은 마치 길거리에서 얼굴조차 가물가물한 동창이 이름도 밝히지 않고 인사를 건네는 상황과 마주한 기분이 된다. 그리고 그 대화를 2시간 가까이 이어가야 한다면? 반갑기보다는 곤혹스러운 일이다.

전략의 부재, 낯설고 산만한

문제는 이 곤혹스러운 상황이 단순한 일부 장면 설계 문제가 아니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로 느껴진다는 점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이 정도쯤은 알고 있지?’라며 연신 윙크를 날린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스파이더맨이 별다른 기원 서사 없이 ‘삼촌 죽는 것도 이젠 지겹지?’라고 윙크를 던지며 등장했을 때는 과거 두 차례에 걸친 프랜차이즈 흥행 경험과 MCU라는 탄탄한 배경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거의 모든 인물이 쉴 새 없이 윙크하고 있고, 그 결과 낯설고 산만한 서사로 이어진다. 설정을 설명하지 않고 인물만 늘어놓는 것은 친절함의 부족이 아니라, 기획 단계의 조급증에서 비롯된 전략 부재로 여겨진다.

이는 영화가 안고 있는 더 큰 문제와 맞닿은 태도이기도 하다. <슈퍼맨>은 슈퍼히어로 서사를 국제정치와 접목하려고 한다. 겉으로는 꽤 대담한 시도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복잡한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얕은 묘사에 그친다. <슈퍼맨>은 보라비아와 자한푸르라는 가상의 국가를 통해 관객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연상하게 만들지만, 이것을 알기 쉽게 캐리커처화된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를테면 아이가 슈퍼맨 깃발을 들어 올리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예고편에도 사용된 이 장면은 한 국가는커녕 시골 마을 정도나 될지 싶은 숫자의 자한푸르인이 철조망 너머 국적 불명의 황무지에서 제대로 된 총 하나 없이 서 있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반지의 제왕> 속 중간계나 <듄>의 아라키스보다도 더 비현실적인 공간인 이 황무지는 필시 미국 내 로케이션일 텐데, 예산이나 성의, 둘 중 하나는 부족했겠거니 하는 생각을 제외하면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묘사다. 이 장면에서 ‘부족민’ 수준으로 그려지는 자한푸르인 역시 제대로 된 설명이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두 가지 가능성을 따져보자. 먼저 이들이 정규군이건 비정규군이건 군사조직이라면 최소한 대전차로켓을 든 사람들 정도는 이곳에 있어야 맞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굳이 보라비아가 최첨단 무기를 산 다음에야 자한푸르 침공을 결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애초에 탱크가 밟고 넘어올 철조망 따위도 없었을 것이다(설마 국경에 철조망을 깔 도구와 인력은 있는데 무기만 없었다는 소리는 하지 말자).

반대로 이들이 만약 군사조직이 아닌 민간인이라면, 그리고 아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럴 확률이 더 높아보이는데, 대체 탱크가 다가오는 평야에서 왜 도망을 가는 대신 맨손으로 군대와 마주 보며 서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애초에 왜 벌건 대낮에 적국의 군대가 국경에 모였는데 자한푸르 군대는 보이지 않는가? 자한푸르엔 독재자는 있지만 군대는 없는 것인가? 물론 이런 의문에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나쁜 이스라엘 학살자’-‘불쌍한 팔레스타인 민간인’이라는 구도를 묘사하기 위해 말이 안되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덕분에 관객은 아이가 깃발을 들어 올리든 말든, 호크걸이 보라비아 대통령을 죽이든 말든,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다. 모든 게 얄팍한 가짜로 느껴져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린 랜턴인 가이 가드너가 가운뎃손가락으로 탱크를 날린다고 한들 그 탱크가 방에서 굴러다니는 레고 조각보다 의미가 없는 물체에 불과하단 사실이 가려지지도 않는다.

현실을 소모적으로 다룬 정치적 묘사

나는 지금 히어로물 주제에 감히 국제정세를 다룬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이 장르는 원래 현실과 느슨한 관계를 맺는 SF물이었고 슈퍼맨 역시 나치부터 KKK까지 온갖 악인을 무찌르고 다녔다. 그러나 2025년에 슈퍼맨을 주인공으로 삼은 블록버스터 히어로영화가 개봉한다면 우리는 이것보다는 조금 더 높은 수준의 세계 묘사를 바랄 수밖에 없다. 영화가 이런 무미건조한 장면을 연출하는 과정에서 ‘하마스’라는 실제 분쟁의 핵심 요소에 은밀한 괄호를 쳐둔 상태라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겠다. 이스라엘 편에 서든, 팔레스타인 편에 서든, 하마스라는 문제를 다루지 않고 이-팔 분쟁을 다룬다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하다. 기왕에 슈퍼맨이 현실 국제정치에 개입하는 설정을 다루고 싶다면, 그리고 그것을 통해 관객에게 히어로물 특유의 현실도피와 대리만족을 주고 싶었다면, 이 장면을 현실감 있게 그리려는 최소한의 노력은 필요할 것이다. 만약 온갖 핵심 요소에 괄호를 친 채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현실을 단순화시키지 않고서는 이 이슈를 다룰 능력이 없었다면, 애초에 이런 깜냥에도 맞지 않는 시도는 하지 말았어야 한다.

돌아가야 할 길은 질러가고, 정면으로 맞서야 할 일은 우회하려다 발생한 이 불균질한 장면들은 영화가 단순한 영합주의에 기대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나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속 욘두 액션 자기복제 열화판에 가까운 T-스피어 액션신을 보면서, 안타깝게도 돌아온 <슈퍼맨>이 슈퍼히어로물의 기준을 높이기보다 오히려 그 기준을 더 낮추는 데 일조했다는 결론을 내려야 했다. 숄더숏에 가까운 애매한 카메라 위치 탓에 액션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영화 전체를 요약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썩 괜찮은 아이디어를 가졌지만 제대로 실행되지 못한 결과물. 그나마 이것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제일 나은 액션신이라는 사실은 나를 슬프게 만든다.

다급하게 세계를 소개하려는 조급함과 현실을 소모적으로 다룬 정치적 묘사는 DC 유니버스의 새 출발점이라기엔 너무 불안정하다.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에서 출발한 DC 익스텐디드 유니버스(DCEU)가 결국 이러한 조급증과 유아적 세계관 탓에 자멸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결을 지닌 이 작품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슈퍼맨>이 증명한 건 한 가지다. 우리가 기대했던 슈퍼맨은 아직 오지 않았고, 우리는 더 나은 <슈퍼맨> 영화를 볼 권리가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