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기로디의 <미세리코르디아>는 숨기려는 행동과 드러내려는 수사의 충동이 매 순간 맞물리는 범죄영화다. 이 영화의 순전한 재미 중 하나는 파헤칠수록 심층의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숨길 수 없는 충동이 표면 위로 새어나오는 순간들이 보다 진실에 가깝게 느껴진다는 데에 있다. 알리바이, 증거물, 증언, 목격담 등 수사의 근거로 받아들여지는 물증보다 더 강력하게 진실을 소구하는 것은 범죄자의 몸짓과 얼굴- 다시 말해, 화면의 표면에 드러나는 것들이다. <미세리코르디아>에서 영화의 표면은 숨기고 싶은 것이 계속해서 떠오르고 발각되는 운명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장소다. 탄로난다는 것의 관능. 가령 <미세리코르디아>에서 범죄 사실을 숨기려는 제레미(펠릭스 키실)는 시신을 유기한 장소로 돌아간다. 그 자리에는 버섯이 자꾸만 자라나고, 그는 이 사실을 의식한다. 자라나는 버섯을 숨기기 위해서는 그 장소로 가서 버섯을 뽑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경찰 역시 범인이 다시 범죄 현장을 찾을 것이라는 수사의 도식을 따라그 앞에 나타난다. 제레미가 거짓말을 늘어놓는 순간, 그의 얼굴에는 숨겨지지 않는 혐의처럼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갑자기 나타나 범인의 편에 서서 그를 구출해내는 신부 필리프(자크 드블레)의 얼굴 위에도 마찬가지로 그림자가 드리워다. 그림자는 두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화면의 표면에서 범죄를 폭로한다. 이때 ‘탄로남’이란 단지 사실이 드러나는 행위가 아니라, 은닉하려는 충동과 채 숨길 수 없는 진실이 교차하는 이미지적 사건이다.
치정이 범죄에 결합하는 방식
범죄는 표면으로 이루어진 액션이다. 범죄의 묘사에 한해 가장 관능적인 오프닝을 가진 루이 말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의 오프닝 시퀀스를 잠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 오프닝 신에서 범죄는 오로지 사물들의 연쇄를 통해서 제시된다. 사물과 사물 사이를 오가는 인물의 손과 몸짓으로부터 살해와 알리바이, 위장이 성립한다. 사물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수화기, 리볼버, 로프, 장갑, 잭나이프. 수화기를 든 남자는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방에 들어오지 말 것을 주문한다. 그는 책상 위에 있던 리볼버를 챙기고, 창문을 열고 로프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위층 사무실에는 남자의 상사가 있다. 그로부터 약간의 대화가 이어지고 방아쇠를 당기자, 상사의 몸이 쓰러진다. 범인은 쓰러진 상사의 손에 리볼버를 쥐어준 뒤 잭나이프를 이용해 문을 잠근 채로 닫는다. 밀실의 완성.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는 오프닝의 관능을 이어가지 못한 채 인물들의 감정과 사연이 얽힌 평범한 수사극으로 마무리된다. 이 영화가 관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범죄가 화면의 표면을 장악하는 액션이 아니라 치정이라는 내적 동기로 얽히게 되는 순간이다. 형사는 남자가 죽인 상사가 그의 연인의 남편이었다는 사실을밝혀낸다. 이때 범죄는 더이상 화면을 움직이는 수단이 되지 못하고, 형사의 용의주도한 심문 아래 숨겨진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깨뜨려야 하는 대상에 불과해진다.
반면 <미세리코르디아>가 끝까지 흥미진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치정이 범행의 ‘숨겨진’ 동기가 아니라, 치정이 범죄에 덧씌워지거나 결합되면서 표면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경찰이 잠든 범인의 침실에 들어와 (연인이 사랑을 속삭이듯이) 그가 잠결에 자백하도록 심문하는 것도 <미세리코르디아>라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제레미는 무의식중에 말을 내뱉고, 진실을 거의 속삭일 뻔한다. 이 영화에서 침대는 욕망이 드러나는 장소일 뿐 아니라 탄로날 수 있다는 긴장을 통해 치정과 범죄를 결합하는 장치다. 이로 인해 범죄는 도망치는 범인과 그를 쫓는 경찰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욕망을 지닌 모든 이들이 자신의 욕망을 현실화할 수 있는 무대가 된다.
탄로난다는 것에는 무엇보다 타의에 의해 진의가 드러난다는 수치심이 내포되어 있다. 탄로남의 액션이 가장 왕성하게 펼쳐지는 곳 중 하나는 제레미의 몸이다. 그의 몸은 타인의 옷을 걸치거나 완전히 나체가 되고, 욕망하거나 욕망의 대상이 된다. 왈테르(다비드 아얄라)의 집에서 술을 마시던 제레미는 갑자기 찾아온 뱅상(장바티스트 뒤랑)과 왈테르가 이야기하는 동안 거실에 숨어 소파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뒤적인다. 뱅상을 보내고 돌아온 왈테르는 자신의 러닝셔츠를 입은 채 서 있는 제레미를 보고 깜짝 놀란다. 제레미는 왈테르와 같은 러닝 차림으로 마주 서서 그의 몸을 더듬는다. 당황한 왈테르는 속옷 차림인 제레미를 집 밖으로 내쫓아 그의 옷가지를 불결하다는 듯이 내던진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헐레벌떡 달아나는 제레미. 그 이후 줄곧 그가 왈테르의 속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 내내 그와 함께 따라다닌다(심지어 그 겉옷조차 그의 옷이 아니라 사망한 마르틴(카트린 프로)의 남편의 것이다). 그의 속옷은 옷 안쪽에 감춰져 있어 화면에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그가 속옷을 ‘벗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 한, 우리는 그가 여전히 속옷을 ‘입고’ 있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다. 물론 반대로 우리는 그 속옷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릴 수도 있다. 화면에 직접 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 속옷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그러한 불확정성이 속옷의 은밀함을 한층 더 강화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제레미의 신체와 그의 무의식적 욕망이 더욱 긴밀하게 얽히도록 만든다. 속옷은 화면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몸을 투시할 수 없다는 표면의 한계가 오히려 속옷을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제레미는 살인을 저지르고 시신을 유기함으로써 위장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가 왈테르의 속옷을 입은 채라는 사실은 화면으로부터 숨겨지지 않는다. (이미 숨겨져 있기에) 숨기려는 몸짓과 숨길 수 없는 것 사이의 분주한 긴장 속에서, 제레미는 끊임없이 탄로나는 몸이자 표면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보이는 것 너머, 역설의 가능성
<미세리코르디아>가 범죄스릴러라는 장르를 통해 내보이듯이 영화의 표면이란 꽤나 복잡하고 의심스러운 장치다. 그것은 단순히 촬영한 것이 맺히는 표면일 뿐 아니라 영화가 감추고 있는 가능성마저 잠재적인 사실로 응축하고 있는 상태다. 진실을 고백하는 장소가 아니라, 진실의 행방이 묘연해지기도 하는 장소. 이는 사제가 신도에게 하는 뒤집힌 고해성사처럼 때로 혼란스럽고 불순하기도 한 것이다. 표면은 촬영된 현실의 이미지를 조작해 낯선 혐의를 덧씌우고 보이지 않는 것을 감각하게 만든다. 영화의 표면은 무엇보다 지금 당장 화면에 드러나 있는 것뿐 아니라 화면에 연쇄되어 일어나는 것들의 총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영화의 표면이란 드러내는 것만큼 감추는 곳이고, 은닉하려는 충동과 탄로남의 기술이 교차하는 모순적이고 역동적인 장소다.
영화의 표면은 선명하게 보이는 것만큼이나 모호하다. 어쩌면 연출자에게는 영화에 자신의 의도를 풀어야 할 수수께끼처럼 숨겨놓는 치밀함 대신 자신의 연출적 시도를 지극히 우연적인 상태로 내버려두는 대범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표면은 언제나 정확한 독해를 필요로 하는 정답의 무대가 아니라 불가해함을 응축하고 있는 상태기 때문이다. 가령 영화가 감독의 ‘하고 싶은 말’을 숨겨놓는 장치라고 받아들이는 관점에서, 영화는 단 하나의 진실을 감추기 위해서 적당히 동원되는 영화적 효과들로 대체된다. 이때 비평이라는 활동은 그 장치의 효과를 설명하고 한 꺼풀씩 걷어내면서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려는 일방향적인 활동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영화의 표면은 단지 효과가 실현되는 곳일 뿐이다. 반면 연출자가 표면을 (스스로에게조차) 의심스러운 것으로 남겨놓는 한 영화는 여전히 관능과 유희의 장소로 여겨질 수 있다.
다니엘 위예와 장마리 스트라우브가 <시칠리아!>(1999)를 편집하는 과정을 촬영한 페드로 코스타의 <당신의 숨겨진 미소는 어디에?>는 영화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전술을 보여주는 흥미진진한 사례다. 표면적으로는 두 거장의 편집실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며 그들의 창작론을 드러내는 영화에 대한 영화이지만, 실상 이 영화는 두명의 공동 연출자이자 파트너 관계에서 발생하는 위계와 정치를 드러내는 스크루볼코미디이기도 하다. 약간의 언쟁과 충돌, 럼에도 대체로 공고한 두 사람의 협업은 편집 중인 영화 <시칠리아!>의 화면에 적극적으로 기입된다. 위예가 자리에 앉아 필름 릴을 되감고 자르면서 차분히(그러나 정열적으로) 편집하는 동안 스트라우브는 무지 한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며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두 사람의 편집은 한자리에 정적으로 머문 채 필름 릴을 만지는 사람과 끝없이 움직이면서 말하는 사람 사이의 변증법적 움직임으로 이루어지는 운동이다. <당신의 숨겨진 미소는 어디에?>는 두 인물을 전면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이들을 약간은 멀찍이 바라보면서 편집 테이블에 앉은(혹은 주변을 서성이는) 두 사람의 뒷모습과 이들이 편집 중인 화면, 그리고 외화면 목소리를 기입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편집 중인 <시칠리아!>의 표면과 두 사람의 언사와 몸짓이 충돌을 적극적으로 조정하는 페드로 코스타의 개입이 상호작용하는 표면이라는 이중의 화면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시칠리아!>는 고향을 떠났던 남자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만나는 인물들과의 대화 시퀀스로 구성된다. 남자는 기차 칸에서 낯선 이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숏-역숏을 편집하기 위해 프레임 단위로 필름 릴을 조정하던 위예는 남자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치는 것을 본다. 하지만 이 미소는 적나라한 웃음이 아니라 필름 릴을 느리게 늘어뜨려놓고서야 미세하게 드러나는 잠정적인 상태의 감정에 가깝다. 표면으로는 감지되지 않는, 뉘앙스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 장면을 아무리 프레임 단위로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미소가 얼굴에 머무는 순간을 포착해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 미소는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정녕 그 미소는 화면 안에 있는 것일까? 두 사람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미소가 거기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믿기로 한다. 스트라우브가 제안한 방법은, 숏의 연쇄를 통해 미소(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웃는 남자가 아니라 건너편의 남자가 말하는 장면을 잘라야 한다고 말한다. 남자가 미소를 짓는 것은 건너편의 남자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의 미소는 ‘거짓말쟁이, 나는 당신을 믿지 않아’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거짓말하는 사람을 오래 보여준다면 관객은 그의 거짓말과 직면해야 한다. 하지만 거짓말하는 남자의 말이 끝나는 구두점에서 프레임을 잘라내, 거짓말을 듣는 사람의 편으로 화면을 전환한다면 거짓말은 거짓말을 곱씹는 사람의 편으로 이동한다. 그 순간 관객은 거짓말을 들은 이의 반응에 직면하게 되어 그의 반응을 살필 수 있게 된다. 거기서 비로소 미소가 드러난다. 아니, 미소는 여전히 숨겨져 있다. 우리는 영화의 표면에서 그 미소를 정확히 포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숏과 숏 사이를 통과하는 순간, 그 간극 속에서 미소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영화에서 스트라우브는 몽타주의 심리학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그건 숏과 숏 사이에, 바로 그 몽타주 자체에, 그리고 숏들이 서로 연결되는 방식에 존재해요. 아주 미묘한 심리학이죠.” 페드로 코스타는 두 사람의 편집 장면을 주의 깊게 보여줌으로써 영화의 표면에 두 사람의 말과 실천을 기입한다. 그들이 프레임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조정했기 때문에, 관객이 그 의도를 빠짐없이 읽어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영화의 편집은 하룬 파로키가 말했듯 이미지의 자율성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미지는 우리를 속이기도 하고, 가끔은 자신도 모르게 진실을 발설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영화의 표면은 사전에 정해진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카메라에 기입된 세계, 그리고 이미지의 자율성과 더불어 끊임없이 변모하고 생성되는 장에 가깝다. 미소는 여전히 숨겨져 있고, 그것을 정지된 상으로 포착하는 영화의 편집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가 이미지에 기입된 세계를 따라 연결되고 움직인다면, 우리는 그것의 표면에서 자신의 은밀함을 드러내는 미소를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