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평] 운명의 사각형, 김소희 평론가의 <페니키안 스킴>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적인 선택을 우연이라는 말로 포장하는 경향이 있다. 우연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애쓴 시간을 부정하고, 자신의 능력치가 현재의 결과보다 큼을 강조한다. 다른 하나는 저절로 된 일의 필연성과 운명을 강조한다. 우연을 지향하는 세계 속에서 계획이나 의도, 노력 같은 인간의 의지는 저평가된다. 의도적인 것은 불순하고 저열하다. 영화에서도 우연은 중요한 요소로 인식된다. 오늘날 영화는 크게 우연을 허용하는 영화와 철저히 통제된 세계를 그리는 영화로 나뉜다. 전자가 대개 주어진 자연물을 활용한다면, 후자는 가공된 세계를 창조한다. 전자의 여백이 관객의 몸을 끌어당긴다면, 후자의 빽빽함은 관객이 몸을 뒤로 무르도록 만든다.

웨스 앤더슨은 철저히 가공된 세계를 그린다. 프레임 내부에 포함된 세부 중 감독과 제작진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그의 영화 내부에서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이란 이 완벽한 세계에 스며든 실수이자 오점일 뿐이다. 물론 영화의 프레임을 벗어나면 어디에나 우연은 존재한다. 웨스 앤더슨이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도 역시 몇 가지 우연들이 개입했을 것이다. 다만 영화 프레임 내부만큼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된 세계다.

철저하게 통제된 미장센은 그 스타일에 맞는 서사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다소 도식적인 분류겠지만, 가령 좁은 화면비와 타이트숏은 통제된 사회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압박을 전달하는 데 용이한 장치일 수 있다. 하지만 웨스 앤더슨의 통제된 프레임은 인물의 심리나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 묘사와는 거의 무관하다. 프레임은 주제를 전달하는 통로가 아니라, 웨스 앤더슨의 특징적인 인장을 실어 나르는 매개로, 명품의 상징이 그렇듯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프레임의 배우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서 프레임은 움직임을 최소화한 고정된 프레임이거나, 이동하더라도 구도를 훼손하지 않는 정량화된 움직임 속에서 중심을 잡는다. 고정 프레임 안에서 배경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배우들은 마치 회화나 문학 속에서 튀어나온 예술품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넓게는 활인화 영화의 맥락에 닿는다. 현대 영화에서 활인화를 논할 때, 로베르 브레송의 배우론을 그 기준으로 삼아볼 수 있다. 브레송이 배우를 모델이라고 지칭한 배경에는 카메라를 앞에 둔 배우에게 요구되는 것은 연기가 아니라 그저 ‘존재하기’라는 발견이 있었다.

비교적 최근의 감독 중에서는 짐 자무시아키 카우리스마키 등의 영화에서 고정숏 안에 존재하며 드물게 움직이는 배우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속 배우들의 부동성은 감독의 영화가 지닌 무뚝뚝한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이런 무뚝뚝함은 어쩐지 무성영화 시기 배우들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그들의 연기에 가닿는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무성영화의 배우들이 몸짓과 표정의 과잉이 필요했던 것과는 반대로, 모든 것을 지닌 오늘날 배우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절제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서 배우들은 카메라와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면 프레임과 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인다. 웨스 앤더슨의 배우들은 웨스 앤더슨 사단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의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단골 배우들이다. 주연을 맡은 베니치오 델 토로를 비롯해 베네딕트 컴버배치, 빌 머리, 스칼릿 조핸슨, 윌럼 더포, 톰 행크스, 마티외 아말리크 등이 이번 영화에도 함께한다. 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필요가 없고,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한 배우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의 존재 자체가 이미 어쩔 수 없이 ‘연기’가 된다.

웨스 앤더슨의 배우들은 프레임 내부를 빽빽하게 채우며 그 자체로 프레임을 이룬다. 보통의 영화에서 인물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 혹은 어떤 장소에 있는가가 위치와 관련해 중요한 내용이라면, 웨스 앤더슨 영화에서는 이들이 프레임 내부에서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이를테면 배우들이 카메라와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는가가 일종의 사건이다. 박물관 통로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 현장을 통제하는 관리자처럼 저택 내부 오른쪽 끝에 배석한 가정교사 비욘(마이클 세라) 역시 롱숏 안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위치에서 건물의 거리감을 강조한다. 자자(베니치오 델 토로)가 성인이 된 리즐(미아 트리플턴)과 처음 만나 대화하는 장면에서 리즐은 지금 우리가 보는 장소의 면적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벽 끝으로 다가가 카메라에서 멀어진다. 반면 자자는 카메라 가까이에서 거대하게 보인다.

대조적인 두개의 프레임이 하나의 대화 장면에서 교차하는 양상이 반복되면서 거리에 따라 왜곡된 배우의 크기 차이를 과장해서 인식하게 된다. 보통의 대화 장면이 액션, 리액션숏에서 인물의 크기를 동일하게 맞추면서 그 내용에 집중하게 했다면, 이들의 대화에서는 그 리듬과 프레임 자체에 눈길을 두게 된다. 덧붙여 흑백으로 처리된 천국 장면에서는 신을 연기한 빌 머리의 몸은 거대하게, 그 앞에 무릎 꿇은 자자는 작게 축소하면서 한 프레임 안에서 인물의 크기 왜곡을 실현해 보이기도 한다.

웨스 앤더슨의 미장센의 특징 중 하나는 프레임 안에 인물을 배치할 때, 좌우는 물론이고 상단과 하단에 인물을 조화롭게 배치하면서 프레임을 풍성하게 활용하는 점이다. 새크라멘토 컨소시엄과 농구 내기 도중 자자가 정박한 기차 계단에 앉아 개인적인 고백을 늘어놓는 장면에서 아래쪽에 앉은 자자를 가운데 두고 인물들은 좌우와 상단부에 배치되어 프레임을 꽉 채운 조화로움을 보여준다. 자자가 마르세유 밥(마티외 아말리크)을 대신해 총을 맞은 장면에서도 아래쪽에 반듯하게 누운 자자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이 그림처럼 정밀하게 짜여 있다. 인물은 영화 속에 인용된 예술 작품과 자신을 견주는 자리에서, 자신들이 이미지의 일부가 되는 양상을 흥미롭게 감당한다. 활인화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죽은 것이라면, 영화에서 활인화는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이는 살아 있는 것의 상태에 가깝다. 스타들을 대거 기용하는 웨스 앤더슨의 방식은 이러한 맥락에서 효과적이다. 스타 배우들은 카메라의 도움 없이도 클로즈업되면서 평면 위에 입체감을 새긴다.

프레임 탈출기

웨스 앤더슨의 전작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카메라의 인상적인 수평운동으로 기억되는 작품이라면, <페니키안 스킴>은 상하 이동 양상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돌이켜보면 영화는 첫 장면부터 공중에 뜬 채로 시작한다. 보통의 영화 기준과는 달리, 영화의 위치 기준이 애초에 공중에 있음을 공인하면서 시작하는 셈이다. 물론 비행 장면은 실제 상층부에서 찍었을 리 만무한, 미니어처와 세트의 혼합이다. 하지만 영화가 상부를 상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들은 상공에 떠 있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듯, 사출된 기장의 몸을 통해 지붕을 뚫고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가게 만든다. 기장 역시 자자만큼이나 기이한 방식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로 천국의 빛깔과 흡사한 흑백텔레비전 속 인터뷰하는 모습으로 등장해 그곳이 현세인지, 사후 세계인지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카메라는 자자의 추락과 함께 땅으로 내려온 뒤에도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위를 향한다. 자자가 자택 욕조에서 앉아 치료와 독서와 식사를 겸하는 모습은 미니어처임을 강조하는 극부감숏으로 보여준다. 자자의 저택 응접실을 조망할 때도 카메라를 상부에 배치해 건물의 높은 층고를 인식하게 한다. 자자와 리즐이 만나는 장면의 초대받지 않은 배석자였던 아홉명의 아이는 바닥과 천장 사이에 난 작은 발코니에 나타난다. 다시 바닥 아래는 누군가의 천장과 이어진다. 자자가 발을 굴러 아래층의 조리사를 부르는 장면을 굳이 삽입하며, 자자가 위치한 곳이 누군가에게는 천국일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처럼 상부와 하부 사이에 존재하는 층들을 의식하게 한다.

마르세유 밥의 나이트클럽에 잠입한 무장한 혁명단은 천장에 기관총을 갈기면서 거대한 샹들리에로 장식된 천장을 망가뜨린다.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방향은 앞서 자자가 발을 굴리자, 조리사가 머무는 공간 천장에 매달린 전구가 흔들리던 장면의 방향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거대한 선박과 수력발전소 터, 호텔 스위트룸 등 자자가 이동하는 장소들은 자자의 저택처럼 높은 층고를 특징으로 한다. 각각의 장소는 벽 한쪽에 마련된 계단을 통해 아래와 위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구조화된다. 수직의 구조물은 머리 칸과 꼬리 칸처럼 계급 차이를 상징하는 은유로 쓰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페니키안 스킴>의 구조를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수직 구조의 최상단에는 다름 아닌, 죽음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삼촌 누바르(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운명은 가장 높은 곳과 닿아 있는 죽음을 표시한다. 몇 차례 자자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누바르는 자자가 투자자들에게 페니키안 프로젝트 계획을 발표하는 장소에 나타나 자자를 직접 살해하려 달려든다. 두 사람은 가파른 계단 위에서 서로를 넘어뜨리고 구르고, 공격한다. 누바르가 자자를 죽이려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유일한 이유는 누바르는 자자와 대립하는 역할을 맡았고, 자자에게는 그같은 방식의 속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누바르는 자자를 죽이려고 던진 폭약이 운명처럼 그의 발 아래로 되돌아오면서 독가스에 휩싸여 죽는다. 그는 죽기 직전 폭약을 뒤집어쓴 잿빛의 보라색 인간이 되어 거대한 프로젝트를 미니어처로 구현한 구조물 뒤편의 투명한 막 뒤에 나타난다. 얼굴을 뒤덮은 거대한 수염을 기른 그의 외양은 모델이 된 실존 인물에게서 따왔지만, 흡사 무성영화 시기 마술사를 연상시키는데, 그의 마지막 모습은 그러한 인상을 더욱 강화한다. 그는 프로젝트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하고 기괴한 형상으로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마술 퍼포먼스로 프로젝트의 정점을 찍는다.

삶의 지분

<애스터로이드 시티>

우연이 제거된 것처럼 보이는 내부 세계를 구축해온 웨스 앤더슨은 거스를 수 없는 필연처럼 우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어기(제이슨 슈워츠먼)가 죽은 아내, 정확히는 죽은 아내를 연기한 배우를 우연히 만나는 인상적인 발코니 시퀀스처럼, 이번에는 우연이 곧 운명인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국제 사업가로서 자자가 벌인 악행으로 인해 그는 숱한 테러 위협에 시달려 일곱번의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하지만, 그럴 때마다 번번이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다. 자자는 죽지 않을 운명을 타고난 것 같다. 혁명단 일원이 그를 향해 쏜 총알마저 우연히 재킷 안쪽에 있던 외교 신임장을 관통하면서 결국 그의 목숨을 살린다.

죽을 수 없는 남자라는 사실은 그가 이미 죽은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관객의 믿음을 요구하는 방향은 죽음보다는 삶이다. 서사를 통해 마련된 자자가 살아야 했던 이유는 자자와 리즐의 만남과 화해를 위해서다. 이들의 여정은 표면적으로는 갭을 메우고 자산을 지키기 위한 여정이기도 했지만, 부녀의 관계 회복을 위한 여정이기도 했다. 리즐의 목적이 어머니의 죽음에 누가 얼마만큼의 지분을 가졌는가에 있다면, 자자의 목적은 리즐은 누구의 딸인가에 있었다. 여정을 마쳤을 때, 두 사람은 진실이 무엇인지에 더이상 의문을 품지 않고, 진실이 무엇이든 크게 상관없는 상태로 나아간다.

작고 분주한 식당을 개업한 자자와 리즐은 그날의 정산이 끝난 뒤 익숙한 듯 테이블을 만들고 카드 게임을 준비한다. 자자는 천장에 붙은 전구를 테이블에 맞춰 아래로 끌어내리면서 상부에서 시작한 이들의 자리가 낮아졌음을 표시한다. 카드 게임을 하는 동안 전구가 외부의 진동으로 흔들리고, 양동이에 물방울이 떨어진다. 이것은 부유했던 자자의 몰락을 표시하는가, 이것이 삶임을 드러내는가. 어쩌면 그것은 위로부터 도착한 호출 신호일 수 있다. 프레임 위에 포착된 뒤에야 들리는 작은 소리는 모든 것을 통제한 뒤에도 결국은 어쩔 수 없는, 시간이 보내는 불가해한 모스부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