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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과거라는 현재 - 고전적 할리우드영화와 모더니즘

잘 알려진 것처럼 영화는 근대적인 교통 및 통신의 발달과 함께 시공간적인 차이가 눈에 띄게 소멸하기 시작한 19세기 말의 발명품이다. 데이비드 하비 같은 지리학자는 이러한 근대성 일반의 특징을 ‘시공간 압축’이라는 개념을 통해 제시한 바 있다. 모든 기술적 혁신은 상업자본의 효율적인 교환과 순환을 중심으로 사회적 관계가 재편되도록 촉진했다. 또한 도시 및 상품세계가 비약적으로 확장되며 사물이 스스로 자기증식하는 듯한 환영이 실현되었다. 이제 모든 시공간은 동시적이지만 마치 자율적인 듯 현상했다. 동시성과 자율성의 부상은 자연스레 그간 예술에서 시공간적 거리를 보장해주었던 보는 이의 위치 또한 위태롭게 만들었다. 전통적인 회화 공간을 이루던 빛과 색채를 분해한 마네의 화법부터 전후평행묘사를 통해 동시성을 묘사한 플로베르나 조이스의 작법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는 모더니즘 예술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보는 이가 대상의 모든 것을 관조하며 현실의 시공간을 전체로 인식하는 데 장애가 발생한 바로 그 시점에 기차가 역으로 도착하는 순간을 카메라로 기록한 첫 번째 영화가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모더니즘 예술 일반과 영화는 공통점보다는 차이가 두드러지는 것처럼 보인다. 언급한 것처럼 전자가 과거의 재현 논리가 불가능해진 변화한 역사적 현실을 묘사했다면 후자는 전통적인 시각 양식을 구성하는 장면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차가 도착한 그 순간, 우리는 고정된 자리에서 저 멀리에 있던 기차가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깊은 심도로 촬영된 이미지로 보게 된다. 그것은 소실점을 중심으로 구축된 원근법적 이미지다. 영화는 당대의 혼란스러운 시공간 압축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려는 몸짓이었던 것일까? 물론 이와는 정반대의 대답도 가능하다. 영화는 모더니즘과 함께 소환된 사물화된 감각적 세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가령 뤼미에르 형제를 비롯한 초기 영화에서 우리가 본 것은 사건이라 부를 만한 그 무언가도 결여돼 있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잡다한 것들뿐이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무심히 지나칠 법한 사소한 것들이지만 카메라를 들이밀기 시작하자 갑자기 볼거리가 되었다. 영화는 종래에는 우리의 전체적인 삶의 일부로서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일상의 미시적인 움직임이 이제 전체적 삶과 시간으로부터 분리되어 관찰 가능한 대상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거기엔 전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부분적 대상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뽐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전체를 압도하는 부분’만큼 모더니즘 예술의 특징을 잘 요약해주는 말도 달리 없을 것이다.

<수지의 진심>

그렇다면 전통적인 양식으로 구축된 화면과 그것이 비추는 새로운 대상 사이엔 모종의 모순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외양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기능하고 있는 현실이다. 원근법 모델에 준거한 전통적인 화면은 새로운 대상을 통해 인식된 새로운 현실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모순은 초기 영화에서부터 분기하기 시작한 우연성의 현시와 재현의 관계에도 각인되어 있다. 이 시기의 지배적 장르라 할 액추얼리티 필름(Actuality Film)의 상당수는 일회적이고 우연적인 순간을 강렬하게 제시함으로써 자신이 그 어떤 전체의 시간에도 귀속되지 않는 자율적 생명체임을 웅변했다. 그러나 반복되는 상영 속에서 그러한 현시적 체험은 영화라는 재현체를 통해 강조된 특정한 순간의 이미지이자 기호임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첫 체험이 아무리 충격적일지라도 반복적인 전시 과정에서 그 효과는 점차 감퇴할 수밖에 없으며 우연성은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사실 우연적인 충격이 볼거리가 된 상황 자체가 이미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고 즐길 수 있는 대상화가 선행되었음을 뜻한다. 직접적인 현재성의 강렬함이 자신이 재현되고 대상화된 이미지임을 감추어온 셈이다.

이제 영화는 재현을 은폐하기보다는 재현된 이미지 그 자체를 현재적인 것으로 제시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영화 교과서에서나 보게 되는 이름인 D. W. 그리피스가 이룩한 위대한 성취는 이처럼 재현된 이미지로서 이야기를 현재화하는 숏과 내러티브의 구축에 놓여 있다. 무엇보다 그는 내러티브가 단지 과거에 존재했던 대상을 카메라로 전달하는 지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상영되는 과정에서 관객의 거듭된 관여로 인해 ‘현재적으로’ 구성되는 연속적 과정임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것은 숏의 현재성으로 인해 관객의 자리가 상쇄됨으로써 이야기가 관객 없이도 존재하는 자율적 대상으로 자연화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재현은 그 자체로 기록된 실제 대상처럼 현재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러티브는 현실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종래의 방식으로는 인식될 수 없는 현실을 총체화하고자 하는 몸짓으로서 온전한 표상의 불가능성을 자신의 몸에 새기고 있다.

이처럼 이전까지는 물러나 있던 재현 및 이야기를 부단히 현재화하는 과정에서 할리우드의 제도적 재현 양식은 정립되었다. 그것은 초기 영화가 원근법적 시각 양식으로 출발했음에도 그를 매개로 새로운 현실을 전시한 것처럼 익숙하고 낡은 이야기를 통해 그러한 세계가 불가능해졌으며 새로운 세계가 도래했음을 교육하는 장이었다. 이를테면 릴리언 기시가 출연한 그리피스의 멜로드라마들이 디킨스의 소설에나 나올 법한 19세기 빅토리아시대의 목가적 풍경을 영속시키는 과정은 곧 영화가 담아낸 그 풍경이 이미 지나가버린 낡은 세계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고지했다. 우리가 그 가련한 여주인공에게 친밀감을 느끼며 동일시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녀로부터 분리된 채 그녀의 처지를 판단할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녀의 올곧고도 순진한 믿음이 좌절되며 연민을 불러일으킬 때 거기엔 이미 그러한 믿음이 불가능해진 현재시제에서 그녀의 어리숙함을 안타까워할 수 있는 지식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의 전달에는 그 감정이 구성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인식이 동반되며, 과거의 세계는 그러한 세계가 불가능해진 역사적 현실과 함께 작동한다.

<수지의 진심>

예컨대 <수지의 진심>(1919) 같은 영화의 무대가 되는 고즈넉한 전원의 시풍은 대도시와 시골의 삶이 완전히 분화되어 도시인의 시점에서 시골의 서정적인 삶이 대상화될 수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대개의 관객으로부터 자신들의 삶에서는 차단되어 보이지 않던 시골이야말로 삶의 정수가 담겨 있는 듯한 환영을 주조했다. 물론 이 말은 당대의 세계에 남아 있던 과거의 흔적들이 이제는 특정한 과거의 이미지이자 ‘과거성’(pastness)으로 고정되며 마침내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리피스는 우리가 세계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곤란해진 상황에서 이미 사라진 과거를 경험하도록 이끌었다. 그것은 과거로의 퇴행이기는커녕 당대의 세계에 잔존하는 낡은 것들의 흔적을 특정하게 고정된 이미지로 정체화하도록 훈련한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낡고 전근대적인 과거의 잠재적 원료들은 제거되고 만다. 우리는 19세기의 ‘벨에포크’를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를 폐쇄하고 있는 20세기 초의 역사적 시공간을 동시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이야기가 전면화되는 과정에는 이미 현재가 매개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현재는 오직 과거를 통해서만 경험된다. 이 모순은 할리우드영화가 당대의 관객에게 친숙한 과거의 이야기를 제시하는 과정에서 암암리에 ‘모더니즘의 대중화된 판본’으로 기능해왔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많은 영화이론가는 영화가 본디 카메라라는 기계장치로 현실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예술을 탈인간화하고자 했던 모더니즘 기획의 선봉에 서 있었다고 간주하고는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고전적 할리우드영화는 다시금 주체를 중심으로 한 내러티브 및 재현 전략을 택함으로써 영화를 인간화한 반동적인 흐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절반의 사실일 뿐이다. 고전적 할리우드영화는 분명 당대의 진보적 모더니스트들에 의해 버려진 모사적 열망을 끌어안으며 시대 역행적인 환영주의 미학을 추구했다. 하지만 그러한 역행이야말로 공중(公衆)이 장르 시스템과 같은 현실의 범주화 작업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도록 만드는 계기였기 때문이다. 즉 고전적 할리우드영화는 장르적 규약을 통해 규범화된 현실을 반복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이 제공하는 영화적 현실이 낡고 관습화되었음을 인식하도록 추동했다. 관습적인 규범으로 구축된 장르적 현실은 언제나 그 규범 바깥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이중적인 뉘앙스를 내포한다. 가령 서부극에서 주인공은 임무를 완수한 후 공동체와 함께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떠나야만 한다. 멜로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은 엇갈린 타이밍으로 인해 눈물을 훔쳐야만 한다. 이러한 구조는 현실에는 현재의 결과와는 전혀 다를 수 있었던 가능성이 존재했음에도 종국에는 그 가능성이 말소되어버림으로써 현실이 규범화되는 관례를 따라 구축된다. 장르영화는 당대의 현실에 남아 있던 낡은 가치들로 인해 현실이 모순적이고 비일관적으로 드러날 수 있었던 가능성을 노출하지만 그러한 과거의 것들을 규범화된 과거성으로 관리함으로써 현실을 일관된 형태로 조정한다. 그런 점에서 50년대부터 전 지구적으로 본격화된 모던시네마의 대대적인 등장은 고전적 할리우드영화가 세공한 장르적인 현실 전체를 일거에 관습적이고 낡은 현실로 떨쳐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모던시네마의 부상은 할리우드영화에 남아 있던 과거와 현재의 중층성을 새롭게 조직하는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그 자체로 할리우드영화를 구성하고 있던 모순을 증거한 셈이다.

<붉은 강>

물론 고전적인 할리우드영화가 과거의 것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매개된 새로운 현실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예술 전반을 휩쓸고 있던 모더니스트들이 인식했던 파편화된 현실 감각과 대관절 무슨 관계인지 의문을 표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선 할리우드건 당대의 모더니스트들이건 모두 개인이 세계를 총체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재현의 위기를 보여줄뿐더러 그들은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여 현실을 총체화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열망 또한 담지하고 있었음을 강조하고 싶다. 할리우드가 장르 시스템과 함께 과거성을 내세운 것은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비롯된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사회질서 속으로 흡수하고자 하는 절박한 시도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모더니스트들이 보여준 새로이 사물화된 감각들과 고도로 자율적인 색채의 언어들은 그러한 경험이 완전히 고갈되며 순전히 양화되어버린 당대의 회색빛 세계의 갈증을 만족시켜주는 상징적 경험을 부여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거듭 분화되고 쪼개지며 점차 소외되는 역사적 현실이라는 대상을 포착하고자 했지만 동시에 그 대상을 감각화하고 전경화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 현실에서는 경험될 수 없는 유토피아적 충동의 주체를 지시하기도 한 것이다.

실제로 상당수의 고전적 할리우드영화들은 그 어떤 근거나 정당성도 없이 초월적으로 승인되어온 전근대적인 사회적 행위 및 제도의 화신이 필연적으로 세련된 민주적 절차와 합의의 세계로 이행할 수밖에 없는 그 변화의 구조 속에서 유토피아적 초월의 갈망을 드러내고는 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초월적인 주인공은 이미 세계와 양립할 수 없는 과거의 인물이지만 그러한 초월성으로 인해 현재 보이는 세계 너머에서 그 모든 것을 총체화하는 현실의 구조적 원리를 암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처럼 과거에 속한 초월적 존재는 이 새로운 세계에서 필시 자신의 외형을 변용함으로써만 존속할 수 있었다. 세계의 외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소급적으로 기존의 세계에 존속하던 다른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충동을 억누른 결과임을 증명하고 있다는 말이다.

<붉은 강>

할리우드의 장르 시스템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의 영화인 하워드 호크스의 <붉은 강>(1948)은 이처럼 타자성이 조정되는 과정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영화에서 톰 던슨(존 웨인)과 맷 가스(몽고메리 클리프트)라는 서로 다른 세대의 인물은 누가 보아도 각각 낡은 세계와 새로운 세계를 표상하는 인물처럼 보이며, 영화는 결국 우리가 새로운 세계에 당도한 바 낡은 세계는 퇴장할 수밖에 없음을 넌지시 읊조리는 것 같다. 그러나 맷은 톰이 잘못한 점을 바로잡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톰을 ‘반복’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맷의 태도는 이상하리만치 자신감으로 가득한데, 그는 자신이 열세에 놓인 상황에서도 마치 역사가 응당 자신의 편임을 알고 있는 듯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그 어떤 근거도 없이 자신을 초월적 존재로 규정한 톰과 흡사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톰이라는 과거의 지도자 형상이 이미 설 자리를 잃은 세계에서 그 초월성의 자리를 보다 합리적인 맷의 자리로 이양하고 있다. 영화에서 톰이 공동체의 신뢰를 잃은 결정적인 순간은, 한밤중 공동체의 일원 중 한명이 실수로 막사에 있던 부엌 도구들을 떨어뜨리며 발생한 소란과 관련된다. 요란한 소리에 놀란 소 떼가 우르르 탈주하고, 추격하는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고 만다. 이튿날 톰은 실수한 대원을 징벌하려다 맷에게 리더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만다. 흥미롭게도 영화의 결말에서 톰과 맷이 주먹다짐하는 가운데 이들이 팬과 냄비 따위가 가득 실린 수레 속으로 고꾸라질 때 우리는 다시금 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 순간 갑자기 이들의 갈등은 극적으로 해소된다. 앞서 소 떼를 놀라게 하며 야생적인 탈주를 촉발했던 미개한 세계 속의 부엌 도구들은 이제 문명화된 부르주아 세계의 장식이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동일한 소리는 인디언과 멕시코인의 땅을 약탈하던 폭압적인 영웅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가리키기보다는 그러한 약탈과 식민화가 더 인도적이고 관용적인 방식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내비친다.

고전적 할리우드영화는 장르를 통해 범주화된 하나의 현실을 말하는 와중에 그 현실에 포함되어 있지만 말해질 수 없었던 타자성의 존재를 동시에 경험하는 변증법적인 장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낡고 익숙한 과거의 세계를 전면화하는 과정에서 그 자신의 붕괴를 재촉하는 현실의 모순이 고집스럽게 지속되고 있음을 빼어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내재적인 모순 혹은 타자성이 모던시네마라 불리는 새로운 영화적 현실로 우리 눈앞에 실체화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