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2022)로 한국에서만 120만 관객을 불러 모은 미키 다카히로 감독이 신작 <나를 모르는 그녀의 세계에서>와 함께 내한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소녀를 잇는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평행우주에 떨어진 베스트셀러 작가. 잘나가는 남편 리쿠(나카지마 겐토)와 주춤하는 아내 미나미(미레이)의 유명세가 완전히 뒤바뀐 땅에서, 두 사람은 서로가 성공보다 소중했던 시절의 향기를 다시 맡는다. <소라닌>(2010)으로 데뷔한 이래 20여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만든 미키 다카히로 감독은 여전히 “내 작품이 관객 각자의 삶에 양분이 되기를 바라며” 로맨스 장르를 수호하고 있다. “사랑 이야기는 곧 성장담”이라는 믿음으로.
- 리쿠가 쓴 무협소설의 한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오프닝 신이 작품의 전체적인 톤과 구별되는데, 연출에 있어 달리 신경 쓴 지점이 있나.
관객들이 영화를 보기 시작할 때 ‘잘못 들어온 거 아니야?’라며 놀랄 수 있도록 연출하고 싶었다. 나카지마 겐토 배우에게도 이 장면만큼은 할리우드 SF영화 느낌으로 찍자고 했다.
- 리쿠가 평행 세계에서 눈을 뜨고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원작 <러브 앳>도 마찬가지다. 원작에서 꼭 살리고 싶었던 장면은 무엇이었나.
두 사람이 처음 만나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을 스피디하게 보여주는 시퀀스를 굉장히 좋아한다. 남녀가 결실을 맺기까지의 기세를 리메이크에서도 살리고 싶었다. 또 좋아한 장면은 레스토랑 신이다. 주인공이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는 순간이 그 신에 담겨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시 여기며 연출했다.
- 반면 인물들이 평행 세계에서 가진 직업은 원작과 상이하다. 원작에서 남편은 중학교 교사가 되는데, 리쿠는 잡지사 소속 기자이자 출판 편집자가 된다. 아내도 피아니스트에서 기타를 치는 싱어송라이터로 변했다.
젊은 관객이 많이 봐주기를 기대하며 만든 영화다. 그들에게는 피아니스트의 공연을 보러 가는 것보다 대중음악 가수의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이 더 익숙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남편 리쿠의 직업도 가수와 좀더 가까이 있는 분야였으면 해서 설정을 바꿨다. 그래야 현실에서 유명한 소설가인 리쿠가 평행 세계에서도 글과 연관된 일을 하면서 어떤 글이 잘 팔리는지 의식하며 살아갈 것 같았다.
- 스타가 된 미나미가 리쿠를 경계하다가 점점 마음을 여는 과정을 어떻게 설득하고 싶었나.
이 영화의 큰 줄기는 리쿠가 무언가를 깨닫는 과정을 따라가지만 미나미도 나름대로 깨닫는 게 있다. 미나미는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기쁨과 슬픔을 노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잊었고, 리쿠를 만나 자신이 노래하고 싶었던 감정이 무엇인지 다시 기억해낸다. 그 깨달음을 보여주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 영화 속 상황처럼, 평행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 더 이상 영화감독이 아니라면 무얼 하고 있을 것 같나.
사실 감독 말고 꿈꿨던 작업이 있다. 바로 학교 선생님이다. (웃음) 어쩌면 영화감독이 하는 일은 선생님이 하는 일과 유사한지도 모른다. 영화 속 캐릭터는 반드시 성장하게 돼 있는데, 캐릭터의 성장은 물론 젊은 배우의 성장을 이끌어내는 것도 감독의 몫이지 않나. 그건 내가 무척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다.
- 배우 나카지마 겐토, 미레이와 함께했다. 두 사람의 케미스트리가 빛났던 순간을 꼽는다면.
레스토랑 신을 찍을 당시 현장에서 어려움이 조금 있었다. 리허설할 때만 해도 문제가 없었는데, 본촬영에 들어가자 겐토가 갑자기 얼어붙은 거다. 감정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은 채로 찍다가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마지막 테이크를 가야 했는데 미레이가 겐토의 손을 딱 잡더니 ‘우리 서로 사랑했던 거야’라고 말했다. 그 순간 어떤 스위치가 탁 켜지면서 겐토가 울어버렸고, 촬영을 잘 마칠 수 있었다. 이전까지 점으로 찍혀온 두 사람의 이야기가 쌓이고 쌓여 점묘화로 표현된 장면이었다.
-전작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에도 시간과 기억의 문제를 겪는 연인이 등장한다. <양지의 그녀>도 일종의 판타지였다. 이처럼 환상적인 요소가 가미된 로맨스를 연출할 때와 정통 멜로를 연출할 때 감독의 태도는 어떻게 다른가.
우리가 실제로 겪지 못하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현실을 객관적으로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을 포인트로 삼는다. 타임 루프나 평행우주 세계관 모두 그렇지 않나. 그래서 판타지 설정이 있는 드라마를 그릴 때는 픽션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갈 관객이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까지 신경 쓴다. 반면 리얼한 멜로는 관객이 자신의 추억에 기대며 볼 수 있도록 만들려고 한다. 그들이 ‘나도 저런 순간이 있었지’라고 회상하며 영화를 보기 때문이다.
- 요즘 한국 극장에서는 로맨스영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산업적인 측면에서 이유를 찾을 수도 있지만 젊은 관객들이 더 이상 연애를 주된 관심사로 삼지 않는다는 진단도 있다. 일본은 어떤가.
일본은 ‘틴에이저’라 할 수 있는 10대, 20대 여성이 극장의 메인 관객이 되어가고 있다. 그들이 흥행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카지마 겐토처럼 잘생긴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것도 사실이다. (웃음) 현재 일본의 젊은 여성들이 선호하는 장르 또한 액션, 서스펜스보다는 로맨스쪽이다 보니 아직은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80, 90년대 할리우드 러브 스토리 느낌의 영화들은 잘 안 보이는 것 같다. 이제는 내가 그런 작품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 70대가 돼도 10대들의 사랑 이야기를 찍고 싶다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누군가가 성장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데, 사랑 이야기는 곧 성장담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상대의 시점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면서 상처도 받고, 변화도 겪는다. 나는 연애의 설렘보다는 배려와 성찰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싶다. 그 동기가 계속해서 사랑영화를 연출하게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