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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의 클로징] 김군

5월 하순이면 두 사람의 김군이 생각난다. 한 사람은 1980년 5월22일 옛 전남도청 인근에서 ‘김군’이라는 문구가 적힌 머리띠를 둘렀던 시민군이다. 다른 한 사람은 2016년 5월28일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숨을 거둔 김군이다. 참사 직후 구의역에 붙은 메모에는 나의 것도 있었다. “2013. 1. 19. 심OO(성수역) / 2014. 4. 22. 노OO(독산역) / 2015. 8. 29. 조OO(강남역) / 2016. 5. 28. 김OO(구의역).” 모두 스크린도어 수리 도중 사망한 노동자들이다. 연결되어야 할 열차 운행과 스크린도어 수리 업무는 원청과 하청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런 외주화는 ‘전문화’가 아니라 원청 퇴직자의 고임금 일자리를 창출할 뿐이며 그만큼 현장 노동자는 쪼들린다. 김군은 2인1조 규정이 무너진 자리에서 혼자 일했다. 나는 2015년 한 조직에서 상근을 시작하며 강남역 참사에 관한 논평을 썼다. 이듬해 상근을 그만두기 사흘 전 구의역 참사가 일어났다. 메모를 붙이고 떠난 뒤로 구의역을 갈 수 없었다. 지난 5월28일, 9년 만에 구의역으로 향한 그날도 나는 휘청거렸다. 9-4 승강장의 스크린도어가 열렸을 때, 바닥에 놓인 조화들을 보고도, 열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동요는 을지로4가역에서 환승할 때 시작되었다. 어떤 승객들이 대선후보들을 거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9년 전 추모 물결 속에서 내가 가진 희미한 희망이 산산조각 나 있었음을 문득 깨달았다. 어제 토론회에서 여성혐오 언어를 떠든 후보는 ‘이대남’의 대변인으로 행세해왔다. 살아 있었으면 스물여덟인 김군과는 어울리는 구석이 없다. 정치는 김군처럼 정직하고 신실한 시민들 사이에서 출발하고 있지 않았다. 어느 두 후보는 부정 개표 음모론자였던 자신의 과거를 부인하는 거짓말을 했다. 핵심 지지층 형성부터 잘못된 정치인의 귀결이다. 이런 정치에서 노동은 뒷전일 수밖에. 화제가 된 말다툼, “그렇습니다”, “근데 뭐 어쩌라고요?”는, “당신네 반대로 ‘반도체 연구직에 대한 주 52시간 근무제 적용 제외’는 입법에 실패했지만, 그렇다, 행정 권한으로 그들을 더 일하게 할 수 있다”, “그러면 되지, 왜 따지나”라는 뜻이었다. 싸우는 척하며 담합하기. 만성처럼 굳어진 현실에 새삼 진저리가 나던 찰나, 열차는 건대입구역과 구의역 중간쯤 선로에서 갑자기 멈춰 섰다. 안내 방송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내 속도 덩달아 덜컹거렸다. 다시 움직인 열차가 구의역에 닿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9-4 출입문 앞까지 갔지만 내릴 수 없었다. 그렇게 결국 구의역을 벗어났다. 그때 차창에 J의 얼굴이 비쳤다. 중3 때 의성에서 구미로 전학 와서 나와 같은 반이었다. 봄소풍에서 경악스러운 장기자랑으로 전교 유명 인사가 됐다. 하지만 공고 야간반으로 진학한 J는 여러 동창들의 시선에서 사라져갔고 끝내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공장에서 그는 내가 아는 학교 동창들 가운데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의 죽음을 추적하겠다는 다짐을 지키지 못했다. 2014년 구미공단에서 초장시간 노동 끝에 운명한 유성우씨, 구미에서 나고 자란 화력발전소 노동자 김용균씨, 그리고 김군의 마지막 나날은 어땠을까. 강변역 스크린도어가 열렸다. 반대편 승강장으로 달려가 구의행 열차를 맞이했다. 이제 같이 일하자, 2인1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