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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제작현장에서 부당하게 배제” vs "갈등 핵심은 편집권 문제"

다큐멘터리 <기계의 나라에서> 연출 크레딧 갈등 수면 위로

장편다큐멘터리영화 <기계의 나라에서>의 감독 크레딧에 관한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중심에는 다큐멘터리 작가이자 기획자로서 <목소리들> <크로싱 비욘드> 등의 제작에 참여한 김옥영 스토리온 대표, <말해의 사계절> 등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허철녕 감독이 있다.

<기계의 나라에서>는 지난 5월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처음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 작품은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쓴 시집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공동 저자 중 3인의 일상과 그들의 시를 나란히 놓고 이주노동자의 자존을 탐색하는 다큐멘터리다. 영화제 기간 중 <기계의 나라에서>의 감독은 작품의 기획자이자 제작자이기도 한 김옥영 대표로 소개되었다. 40여년간 방송과 영화를 오가며 다큐멘터리를 만든 김 대표가 감독으로 이름을 올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 대표는 영화제가 발간한 매거진 <전주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직접 연출을 맡은 계기를 묻는 질문에 “첫 연출이라고 하는데, ‘감독’이란 타이틀이 명시적으로 붙은 경우가 처음이지 지금까지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에서의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동안 방송 다큐든 다큐 영화든 우리 회사에서 만들어진 모든 작품은 내가 직접 취재하고 스터디해서 기 획을 해왔다”고 밝혔다. <기계의 나라에서> 또한 “초기 연출을 의뢰한 감독이 있었지만 작품에 대한 생각이 현저히 달라 중도에 헤어지게 되었고, 시기적으로 다른 분에게 맡길 수가 없어 책임을 맡게 된 것”이라는 의미였다.

〈기계의 나라에서〉 스틸

허철녕 감독, “부당하게 창작권 침해당해”

그러나 지난 5월30일, ‘기존 감독’이었던 허철녕 감독은 김옥영 대표가 “계약으로 합의한 연출자의 크레딧을 일방적으로 변경하려 압력을 행사”했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자신의 페이스 북에 올렸다. 연출자인 자신이 “부당하게 편집 (단계)에서 배제”돼 “창작권을 침해”당했다는 것이다. 허 감독에 따르면 그는 2021년 2월 대학 시절 은사였던 김 대표에게 <기계의 나라에 서> 프로젝트에 함께할 것을 제안받았다. “김옥영 대표가 기획자이자 프로듀서로서 취재, 섭외를 통해 토대를 만들고, 내가 연출을 담당하는 감독으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 그러나 촬영 시작 후 1년이 지날 무렵 부터 두 사람은 연출 방향을 두고 갈등을 빚었 다. 허 감독은 김 대표가 자신의 “연출 방식을 힐난”했다며 “계속되는 폭언에 문제 제기를 하고 싶었”다고 적었다. 그럼에도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우선”이라 여긴 허 감독은 90분 분량의 가편집본을 완성해 2024년 5월16일 김 대표에게 전달했고, 5월17일 김 대표의 자택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 그날 김 대표는 작업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진 점, 작품에 기획자인 자신의 아이디어가 주로 반영된 것과 달리 감독의 의도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자 신이 ‘공동연출자’로서 크레딧을 변경하여 작품을 마무리하겠다고 통보”했다고 한다. 허 감독은 “다큐멘터리에서 현장에 한번도 나오지 않는 연출자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되물으며 회의 자리를 떠났고, 그 후 “<기계의 나라에서> 제작 현장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회고한다. 그로 인해 심리적 타격을 입은 허철녕 감독은 김옥영 대표와 대면하기 어렵다고 판단, 전국 언론노동조합(이하 언론노조) 미디어연대지부를 통해 김 대표와 소통을 재개했다. 허 감독의 페이스북 게시물, 그가 지난 6월2일 <씨네21>과 나눈 통화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하면, 허 감독과 김 대표는 2024년 7월부터 9월까지 언론노조를 통한 중재를 거쳤다. 허 감독이 제시한 중재안은 두 사람이 “함께 동의하는 최종 편집본을 완성”하는 것이었으나 “김옥영 대표가 이를 거절했고, 중재가 채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최종편집을 진행”했다고 한다.

전주국제영화제, “갈등 알았지만 작품성으로 평가해”

허철녕 감독이 이 상황을 공론화하기로 결심한 것은 <기계의 나라에서>가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사실을 알고부터다. 그는 <씨 네21>과의 통화에서 “올해 4월 초 탄핵 정국의 광장을 촬영하던 중 친구에게 영화제 폐막작 선정 소식을 전해 들었다”라며 덧붙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직까지 전주 프로젝트 홈페이지 에는 내가 <기계의 나라에서> 감독으로 소개된 영상이 올라와 있다. 전주국제영화제측도 내가 이 작품의 감독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다. 그럼에도 영화제는 내게 폐막작 선정 소식을 알리지 않았고, 김옥영 대표와의 갈등에 관해서도 묻지 않았다.”

이에 허 감독은 영화제가 개막한 후 이 사안을 질의했고, 영화제측도 답변을 전달했다. <씨네21>이 지난 6월4일 영화제로부터 받은 공식 입장도 그 답변과 동일했다. 영화제는 “<기계의 나라에서>를 (폐막작으로) 선정할 때 이 영화에 관해 일종의 분쟁이 있음은 인지”했으나 “그 갈등의 자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몰랐기 때문에 김옥영 감독에게 문의”했으며, “김옥영 감독은 허철녕 감독과 함께 일했고, 뜻이 안 맞았고, 결국 허 감독이 자진해서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는 설명”을 했다고 전했다. “영화제와 김옥영 감독이 수년 동안 다양한 협업을 했기 때문에 믿음”이 있었고 “그 설명에 관해 의문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영화제는 “허철녕 감독의 입장을 여쭤보지 못했던 것은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그럼에도 “영화를 폐막 작으로 선정하는 데는 김옥영 감독의 명성이나 관계 같은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영화가 품은 새로운 형식과 내용이 뛰어났다는 점이 절대적인 선택 기준”이었음을 분명히 했다. 여기에 전주국제영화제는 <씨네21>에 “저작권자인 제작사와 감독간의 불화 시 감독을 교체하는 것이 아주 특이한 경우는 아니기에 양측의 확인까지 필요하다고 판단하지 않았었다”며 “(<기계의 나라에서>는) 허철녕 감독이 사임한후 편집, 후반작업을 마친 영화로, 두 가지 트랙으로 예술적 구조를 가진 독특한 영화의 작품성을 높게 평가”했던 것이지 “단순히 이주노동자라는 소재만으로 영화제가 작품 선정을 한것은 아니”라는 입장도 추가로 전달했다.

〈기계의 나라에서〉 스틸

김옥영 대표, “문제의 핵심은 연출 타이틀 아닌 편집권”

<씨네21>은 허철녕 감독의 페이스북에 언급된 상황에 대한 김옥영 대표의 반론을 듣고자 연락을 취했다. 김 대표는 “갈등의 핵심은 ‘편집 권’의 문제”라며 사안의 쟁점을 짚었다. “이 일은 한 작품의 ‘편집권’과 ‘최종결정권’이 감독에게 있느냐, 기획자이며 제작관리자이며 저작권자인 제작사에 있느냐의 문제”인데 “계약상 으로는 분명히 나에게 있는 것이 맞”다는 것이 다. 김 대표는 자신이 촬영 현장에 나오지 않았 다는 허 감독의 증언도 반박했다. “내가 현장에 여러 번 간 것은 허 감독도, 스태프들도 다 알고 있다. 현장에서 연출을 안 했다는 말을 저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출연자들의) 노동 현장 외 개인별로 촬영해야 할 상황과 장면 대부분은 제작회의 때 내가 제시하고 감독이 수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디렉션인가.”

그는 허 감독의 표현이 자신을 “사무실에 앉아만 있다가 타이틀을 가로챈 부도덕한 제작자” 로 인식시키는 것 같다며 우려를 표했다. 더불어 김 대표는 자신 또한 언론노조와의 중재 절차에서 허철녕 감독의 언어에 상처를 입었다고 토로했다.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동안 건넨 피드백이 위계에 의한 폭력으로 굴절된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김 대표도 지난 6월4일 저녁 허 감독과의 협업 과정을 비롯해 갈등의 경과를 종합한 글을 페이스북에 업로드했으나, 법적 자문을 거치라는 조언에몇 시간 후 글을 비공개 처리했다고 한다.

한편 <기계의 나라에서>에 참여한 김선아 프로 듀서 또한 자신의 페이스북에 허철녕 감독의 게시물에 대한 견해를 나눴다. 그는 몇분들로부터 “‘왜 공동감독 크레딧을 주지 않았느냐’는 질문과 비난을 들었다”며 자신이 이에 관해 허철녕 감독과 직접 메일을 주고받았고, “‘공동감독’ 크레딧을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허철녕 감독이 거부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김옥영 대표가 감독 타이틀을 단 것도 “거부당한 자신의 편집 구성안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한 행동”이었 다는 것이 김선아 프로듀서의 관점이다. 현 상황이 “돈과 예술의 대립 또는 강자와 약자의 대립”처럼 인식되는 게 안타깝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옥영 대표는 계약상 작품의 편집 권이 제작자인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있고, 허철녕 감독은 위계에 의한 업무 배제가 발생해 자신이 연출자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니 ‘감독 김옥영’이라는 명명이 불합리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양측의 입장이 팽팽한 가운데 당분간 대립이 이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