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라 경희대학교 프랑스어학과 교수
대학교에서 범죄심리학을 강의하는 중년 남성이 기차역에서 바캉스를 떠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배웅한다. 일거리에 파묻혀 사는 남성은 함께 떠날 처지가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핑곗거리에 불과했던 것 같다. 가족이 떠난 후 남성은 자석에 이끌리듯 갤러리 쇼윈도에 진열된 여성의 초상화에 시선을 빼앗기더니, 저녁 무렵에는 초상화 속 여성을 꼭 빼닮은 여성을 만나 시간을 보낸다. 비교적 덜 알려진 프리츠 랑의 <창가의 여인>(1944)은 이렇게 시작된다. ‘정상’ 가족을 꾸리던 건실한 남성이 범죄의 세계와 연루되고 위험에 빠지는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초상화를 ‘팜므파탈’만큼이나 위력을 가진 요소로 상상한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던 여러 편의 고딕 로맨스물이나 누아르영화, 히치콕의 <레베카>(1940), 오토 프레민저의 <로라>(1944), 윌리엄 디터리의 <제니의 초상>(1944), 약간의 시차를 두고 만들어진 앨버트 르윈의 <판도라>(1951) 등도 초상화의 위력을 서사적 동기로 활용했다.
이중 영원히 바다를 떠도는 유령선 전설을 소재로 삼은 <판도라>에서 초상화는 영화 속 존재들에게 유령적 힘을 행사하는 유일한 사물이 아니라 유령선, 선장, 판도라적 여성 등 영화 속 여러 유령적 존재 중 하나로 나타난다. 반면 <레베카> <로라> <창가의 여인> 등에서는 초상화 자체가 위력을 떨친다. <레베카>에서 거대하고 어두운 성 복도에 걸린 망자 레베카의 초상화는 이곳에 새로 도착한 여주인공을 압도할 뿐 아니라 공간 자체를 압도한다. <로라>에서 로라의 죽음을 파헤치는 형사는 로라가 사라진 어두운 빈방에서 로라의 초상화에 매료된다. 이 두편의 영화에서 초상화를 바라보는 인물들은 어두운 극장 안에서 거대한 스크린 위의 압도적 크기의 ‘영화적 얼굴’을 바라보는 관객, 지금 여기 이 극장 안에 없는 존재의 유령적 이미지에 매혹당한 관객을 닮았다. 이들 영화에서 초상화의 위력은 육신을 가진 관람자를 오히려 압도하는 ‘이미지’의 위력이자 영화적 이미지의 위력을 드러낸다.
고딕소설의 전통을 이어받은 <레베카>에서 초상화가 걸려 있는 폐쇄적인 실내공간은 초상화의 위력을 더욱 강화한다. 반면 <창가의 여인>에서 주인공이 바라보는 초상화는 행인들이 지나다니는 길거리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 영화에서 주인공의 욕망과 환상을 부추기는 것은 초상화일 뿐 아니라 초상화가 놓인 조건, 곧 진열장과 진열장 창이다. 갤러리의 진열장, 갤러리 진열장의 그림은 앤 프리드버그와 같은 학자가 스크린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를 빌리자면 일종의 “가상 창문”에 가깝다. 프리드버그는 스크린이 17세기 대형 유리창의 확산 이후 건축과 문화의 핵심이 되었던 유리창을 대체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이 실내에서 바깥 경치를 액자처럼 보여주는 틀이었다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값싼 대형 유리가 생산되면서 유리창은 상품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상품 진열장이 시각적 소비문화 시대를 열었다면 영화, 텔레비전, 컴퓨터 화면의 ‘창’은 가상 공간을 연다.
<창가의 여인>에서 주인공은 밤늦게 클럽을 나서며 낮에 보았던 초상화가 놓인 진열창 앞에 멈춰 선다. 그는 진열창 ‘너머로’ 초상화를 본다. 이때 초상화 옆에 한 여인의 상이 초상화보다 더 초상화 같은 모습으로 나란히 맺힌다. 주인공 남성이 유리창을 통해 보는 것은 길에 있는 한 여인의 거울상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진열창을 통해’ 초상화를 처음 만날 뿐 아니라 초상화 속 여인을 닮은 한 여인 역시 ‘진열창에 비친’ 상을 통해 만난다. ‘진열창 덕분에’ 초상화는 진열창에 맺힌 주인공의 상과 여인의 상 ‘사이에’ 놓인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면 <창가의 여인>의 뻔한 도덕적 결말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다. <창가의 여인>은 중년 남성에게 아름다운 여성의 유혹에 빠진 죄과를 묻는 영화처럼 흘러간다. 남성은 의도치 않게 살인에 연루되고 협박을 받으며,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공포 속에서 목숨을 끊으려고 한다. 하지만 남성은 순간 잠에서 깨어난다. 이 모든 이야기와 이미지는 진열창 속 그림을 본 남성이 꿈속에서 스스로 꾸며낸 것이다. 그러니 <창가의 여인> 속 창은 한편으로 거리를 걸어가는 산보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19세기적 시각 소비문화의 진열-창이고, 다른 한편 관객을 먼 시간과 장소로 이끄는 스크린-창이며, 관객의 적극적 상상-꿈꾸기 속으로 이어지는 프레임-창이다. 그러니 <창가의 여인>은 초상화 속에서 영화적 얼굴과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이기보다 창의 문화와 스크린 문화가 맺고 있는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일 것이다.
프리츠 랑은 <창가의 여인>을 만든 다음해에 만든 <진홍의 거리>(1945)에서도 그림을 소재로 삼았다. <진홍의 거리>는 장 르누아르의 <암캐>(1931)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오작동하는 무능한 예술가를 극 중 인물로 즐겨 소환하는 르누아르는 <암캐>에서도 자신이 실제로 태어나 자랐던 파리 몽마르트르 지역을 배경으로 삼아 고단한 삶을 사는 평범한 소시민이자 그림에 위안을 얻는 아마추어 화가 모리스 르그랑(미셸 시몽)이 살인에 이르고 노숙자가 되는 과정을 영화로 옮겼다. 그런데 장 르누아르와 프리츠 랑의 영화에서 그림은 어떤 마법적 위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약탈적 사회에서 주인공의 그림은 아내나 정부에게 잡동사니 쓰레기 취급을 받거나 돈벌이 수단으로만 간주된다. 이 세계에서 그림은 자본주의 상품 경제의 무자비한 작동 방식과 주인공의 소외를 증명하는 사물이다. <암캐>의 노숙자 모리스 르그랑은 갤러리 ‘진열장 너머’로 아버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그림을 무관심하게 바라본다. 르누아르는 여기에서 부르주아와 노숙자,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 예술과 노동, 회화와 영화 사이에 위계를 정하는 대신 이를 차별 없이 가로지르는 돈의 문화를 환기한다. 이제 미셸 시몽은 진열장 너머의 그림보다 그것을 구매한 부르주아가 던져준 20프랑짜리 동전에 더 흥분하는 걸인이 되었다. 그는 자유인이지만 돈에 종속된 자유인이다. 감독 장 르누아르는 “인생은 물살에 떠가는 코르크 조각과 같다. 물결에 몸을 맡겨야 한다”라는 아버지의 말을 인용한 적 있다. 그런데 물결은 이제 데이터 또는 데이터가 된 돈의 흐름의 은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할까? 이 질문은 르누아르의 쇼윈도 시대에도 오늘날 컴퓨터 윈도 시대에도 영화와 예술이 나누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