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스크마스터(올가 쿠릴렌코)가 초반부터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 몰랐다. <썬더볼츠*>는 자인하듯 마블 서사에서 탈락한 캐릭터들의 재활용 프로젝트다. 갱생의 여지가 있는 재활용 캐릭터들을 모아두고 바로 한명 탈락시키며 시작하는 걸 보고 마블의 나쁜 습관이 또 시작됐구나 싶었다. 하지만 또 한번 실패의 길을 답습하는 것처럼 보였던 <썬더볼츠*>는 의외로 초심으로 돌아가 정석대로 서사를 쌓아나간다. 오해 마시라. 전성기 마블의 영광을 회복할 만큼 매력적이라는 게 아니다. <썬더볼츠*>는 오히려 느리고 무겁고 설명적이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다행이다. 다소 둔탁한 액션과 종종 지루해지는 기계적인 전개 등 여느 영화에선 단점으로 먼저 손꼽을 만한 요소들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거시적인 시야에서 보면 캐릭터에 필요한 질량을 제공한다. 그동안 확장의 저주에 빠졌던 마블을 향한 속죄의 무게라고 해도 좋겠다.
태스크마스터는 왜 먼저 죽어야 했을까
마블의 영광은 확장이 불러온 상상력 덕분이었고 몰락 역시 (모든 서사의 앞자리에 선) 확장에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계관을 넓히는 데 몰두했던 마블에는 캐릭터가 넘쳐난다. 도저히 한편의 영화에 담을 수 없어서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만들 때까진 괜찮았다. 이후 성공과 함께 확장의 욕망을 자제하지 못한 채 멀티버스에 중독된 마블은 서사의 통제를 벗어난 캐릭터들을 주체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중이다. 페이즈4, 5에선 제대로 된 영웅의 서사를 쌓지 않고 필요(혹은 팬서비스)에 의해 캐릭터들을 갑자기 등장시켰다가 도구처럼 낭비하는 게 다반사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썬더볼츠*>는 마블이 그동안 시도했던 여러 방식의 리빌딩 프로젝트 중 썩 나쁘지 않은 결과에 도달한 드문 경우의 수를 선보인다. 팀 썬더볼츠는 ‘어벤져스’처럼 유기적인 화학반응까지 자아내진 못하지만 적어도 한편의 영화 안에서 납득 가능한 수준의 기계공학적 결합에는 성공했다. 그래서, 더 이상하다. 태스크마스터의 죽음은 “팬서비스보다 서사의 일관성”(각본가 에릭 피어슨)을 택했다는 <썬더볼츠*>의 방향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작은 가능성으로의 전환이 가능했던 <썬더볼츠*>의 성취를 제대로 말하기 위해선 이 영화의 이상한 오점 같은 이 선택에 대해 먼저 물어야 할 것 같다. 왜 태스크마스터가 먼저 죽어야 했을까.
에릭 피어슨의 인터뷰에 따르면 태스크마스터의 초반 퇴장은 공동 집필진이었던 제이크 슈라이어 감독의 선택이었다. 이에 대해 슈라이어 감독은 “등장인물 모두가 안전하지 않다는 점을 관객에게 인식시키고 긴장을 주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한다. 말은 되지만 여전히 저의가 의심스럽다. <썬더볼츠*> 서사 내부에서 이들을 모은 건 CIA 국장 발렌티나(줄리아 루이스 드레이퍼스)지만 실제로 이들을 모은 주체는 망해가는 마블이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마블은 세대교체에 실패했고 길을 잃었다. ‘어벤져스를 대신할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 방법을 가리지 않는’ CIA 국장 발렌티나는 망가져가는 마블의 자기 반영적 거울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썬더볼츠*> 전체가 자기반성적인 반성문에 가깝다. 도입부 옐레나(플로렌스 퓨)의 독백은 영화의 방향을 명확하게 선언한다. “좀 이상해. (언니의 죽음 이후로) 공허한 것 같아. 아니면 지루하든가.” 마블 영화가 그랬다. 알맹이가 없거나 재미가 없거나.
그리하여 실패자들이 모였다. 정확히는 모았다. 왜 실패자들인가. 지금의 마블에는 결핍이, 결핍을 겪은 캐릭터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하고 정직한 공식이다. 히어로의 본질은 결핍이다. 특별한 능력은 부수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히어로로 태어나는 존재는 흥미롭지 않다. 우리를 매혹하는 것은 결핍에서 비롯된 고통을 극복하고 히어로로 거듭나는 물리적인 ‘과정’이다. 오만했던 아이언맨은 (지식의 저주로 인한) 불안과 싸웠고,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던 로키는 시간의 신이 되어 스스로 희생하는 것으로 마침내 진정한 자신을 증명했다. “나는 아이언맨이다”와 “당신을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라는 대사가 전혀 다른 의미로 작동하기 위한 서사적 질량이 필요하다.
실패에서 과정으로, 느린 주먹질에 실린 무게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마블이 상실한 건 바로 이러한 질량이다. 결핍의 서사는 실체적 질량을 필요로 한다. 일차적으로는 결핍을 느끼고 공감시킨 후 마침내 극복하는 사건 과정이 되겠지만 여기에 좀더 물질적인 요소가 추가되어야 비로소 관객을 끌어당길 중력이 발생한다. 어떤 의미에서 히어로란 이러한 서사의 중력에 저항하는 존재다. 이는 단순히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 일종의 태도에 가깝다.
예컨대 <아이언맨> 1편의 슈트가 가지는 금속의 무게감,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의 육탄전에 구현된 주먹의 무게와 물리적인 통증, 이를테면 타격감 같은 물리적 이미지까지 포괄한 질량의 실체화야말로 히어로영화의 숨겨진 주인공이다. 요컨대 시그니처 액션이 무엇인가.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마지막으로, 확장의 저주에 걸린 마블은 그 무게를 망각했고 세대교체를 명분으로 세계관의 껍질은 확장됐지만 캐릭터의 밀도는 옅어졌다. 허우적대는 액션과 종이박스를 입혀놓는 것 같은 조악한 CG는 단순한 기술력과 자본의 문제가 아닌 철학과 태도의 결과물이다.
적어도 <썬더볼츠*>에는 히어로의 고뇌가 액션의 무게로 구현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느린 주먹질의 매력이 있다. 비록 초월적인 존재인 빌런 센츄리=보이드와의 난투 액션이 여전히 조잡하긴 하지만 이마저 납득할 여지가 있다. 적어도 이 루저들이 덜 멋진 액션에선 손해를 감수할지언정 (필수적인) 드라마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라도 가능한 건 실패자들을 끌어모았기 때문이다. <썬더볼츠*>는 일일이 좌절의 서사를 구축하는 대신 이미 실패한 캐릭터들을 데려와 빌드업 단계를 생략할 명분을 확보한다. 뉴 어벤져스, 아니 짭벤져스라고 자조하지만 더이상 어벤져스 팔이도 마땅치 않은 마블의 현 상황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기꺼운 궁여지책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왜 태스크마스터가 죽어야 했을까. 썬더볼츠팀의 능력은 이미 누군가의 열화판이다. 옐레나는 블랙 위도우의 그늘 아래 있고, 존 워커는 실패한 캡틴 아메리카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에게 다른 결핍과 극복의 서사를 부여해 다른 영웅으로 거듭날 기회를 제공한다. 능력이 곧 히어로가 아니라 그의 태도가 곧 영웅이 되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때 가장 애매한 존재가 타인의 액션을 카피하는 태스크마스터다. 거울의 액션을 기반으로 한 태스크마스터에 독자적인 정체성을 부여하긴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태스크마스터의 탈락은 <썬더볼츠*>가 짝퉁이나 카피가 아닌 다른 길을 걷겠다는 의지 표명인 셈이다.
그렇게 <썬더볼츠*>는 이들의 별 볼 일 없음을 동력 삼아 차근차근 무거운 걸음을 뗀다. 그 결과 설사 부분적으로 재미가 없을지언정 의미를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실패를 실패로 남겨두지 않고 뻥 뚫린 공허를 극복하려고 발버둥치는 사이, 이들은 패배자에서 길을 잃은 자로 거듭날 무대를 마련한다. 도시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힘 앞에서 다섯명이서 겨우 무너진 벽 하나를 들어올리는 게 이들의 능력과 업적에 불과할지라도, 그제야 출발선에 설 자격을 얻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종 지루하고 처지는 전개에 머문다 해도, 심지어 해결 방식이 능력이 아닌 집단심리치료처럼 보인다 해도, 고백을 멈추지 않는다. 우린 이미 망했다고. 그래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고. 솔직히 장점보다 단점을 열거할 것이 더 많지만 달리 말하자면 이 정도만 해줘도 감사한 게 마블의 현주소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와 <레디 플레이어 원>의 혼종교배 같은 이 어설픈 영화는 조금은 낯설고 여전히 헐겁지만, 그걸 구태여 숨기려 하진 않는다. 그 태도를 한번 더 믿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