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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형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여자 - <하이퍼나이프> 김선희 작가

마음속에 자기만의 컴퍼스를 지닌 세옥(박은빈)은 언제나 자신을 중심축으로 동그라미를 그린다. 원의 크기나 모양, 위치는 제각기 달라도 모든 곳에 그대로 남아 있는, 세옥의 지나간 자리를 암시하는 바늘자국만이 그가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병원에서 벌어진 난투극, 불법 뇌수술, 살인과 위협 등 모든 사건은 오직 세옥의 선택과 결정으로 흘러간다. 충동과 무절제로 점철된 세옥은 어느새 병원에서 쫓겨나 섀도 닥터로 불법 수술을 도맡고 있었고, 그를 위협하는 이들을 몇몇 죽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구렁텅이로 빠트린 덕희(설경구)가 나타나서는 자신의 뇌를 수술해 달라고 말한다. 한때 스승이었던 원수 앞에서 세옥은 갈등한다. 그를 수술할까, 말까. 오랫동안 굳건한 지지대가 되었던 컴퍼스 축조차 이제는 동요하기 시작한다. 세옥과 덕희 사이에 놓인 여백을 보다 면밀하게 들여다보기 위해 김선희 작가를 만났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메디컬 스릴러로서 <하이퍼나이프> 고유의 날카로움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가늠하기에 충분했다.

- 4주간의 여정이 끝났다. <하이퍼나이프>를 종영한 소감은.

홀가분하다. (웃음) 그래도 이제는 안전한 곳에 도착한 느낌이다. 누군가가 작품이 별로라고 말해도 어딘가에는 “나는 재미있게 봤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 서로를 미워하는 동시에 과잉 집착하는 기묘한 사제지간. <하이퍼나이프>는 어떻게 출발했나. 메디컬 스릴러 장르를 먼저 설정했나 아니면 사제지간이라는 관계도를 먼저 선택했나.

처음엔 제목도 기획도 아예 달랐다. 제목이 <개를 부리는 여자>였던가. 시골 약사로 일하는 젊은 사이코패스 여성과 은퇴를 앞둔 형사의 이야기였다. 둘이 엮이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보여주려 했다. 대본도 3회차까지 나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갈아엎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지금은 약사로 일하지만 과거엔 의사였던 이력이 있어, 그런데 심지어 천재야.’ 이렇게 살을 붙여가면서 완전히 뒤바꿨다. 이 과정에 덕희라는 인물도 탄생하고, 천재라는 이미지에 걸맞은 뇌과학을 연상하면서 신경외과를 선택했다. 마인드맵처럼 넓혀나갔다.

- <하이퍼나이프>는 1화부터 돌진하듯 빠르게 전개된다. 섀도 닥터가 된 천재 의사의 충동적인 살인이 이어지는데 메디컬 스릴러 장르는 기존에 사례가 많은 편이 아니어서 대본을 쓰다 막막했을 때 참고 자료를 찾기 어려웠을 것 같다.

국내에 참고 사례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내가 상상한 작품의 형태와 엇비슷하게 일치하는 것도 없었다. 그래도 작품 피칭을 할 때 투자자와 제작자들이 어떤 작품인지 상상할 수 있도록 예시를 들 수 있어야 했다. 그게 영화 <위플래쉬>, 시리즈 <킬링 이브> <퀸스 갬빗>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과잉 집착하는 여성 캐릭터(<퀸스 갬빗>)가 충동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와중에(<킬링 이브>) 사제지간의 문제가 드러나는(<위플래쉬>) 이야기랄까. 하지만 절대 오해해선 안된다. (웃음) 처음부터 이걸 뒤섞은 게 아니고 작품 피칭 때 설명을 돕기 위해 비슷한 사례를 찾은 것이다. 처음엔 이 구상이 한국 배경과 잘 맞을까 걱정됐는데 교수와 레지던트 사이의 위계적인 관계나 유교적인 면모가 그것을 잘 붙잡아줬던 것 같다.

- 세옥은 모든 일을 자기중심적으로 저질러놓고 주변이 동요할 때 혼자만 속 편안해한다. 그런 세옥에게 덕희가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넌 문제가 뭐야?” 진짜로 세옥은 뭐가 문제일까.

충동 조절이 잘 안되는 게 가장 큰 문제일 거다. 이건 유전적으로 타고난 기질 같은 거다. 근데 나는 세옥에게 성장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뭐랄까, 이미 충분히 균형 잡힌 캐릭터라 생각했다. 이 세계관을 펼치기 위해, 이야기를 앞으로 진행시키기 위해 첨가한 살인이나 범죄를 차치하고 세옥만 바라보면, 그는 자기 나름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 좀 비정상적이지만(웃음) 안정감 있는 캐릭터다. 그런데 그게 일종의 편견이기도 하다. 사이코패스는 아예 감정이 없거나 뇌의 어느 부분이 마비돼 타인의 반응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드라마상에서 외부 자극을 완전히 차단한 사람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건 한계가 명확하다. 실제로 조사해보니 사이코패스에도 스펙트럼이 있다고 하더라.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는 수준부터 타인을 연민할 줄 알지만 충동이 일어나는 순간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는 수준까지. 그 넓은 스펙트럼 어딘가에 세옥도 있을 것이다.

- <하이퍼나이프>는 으레 드라마 주인공이 얻는 혜택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바로 연민의 여지. 세옥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깊게 조명하지 않아 시청자가 그의 악행을 쉽게 용서하지 않게 하고, 그보다는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지켜보게 한다.

세옥의 전사를 길게 늘어뜨리지 않은 것은 세옥이 그런 성격의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만의 힘든 기억은 있다. 그렇지만 과거에 머물러 그것을 계속해 곱씹는 유형은 아니다. 또 8부작의 형식적 분량을 위해 선택과 집중을 쏟은 것도 있다. 그래도 상상의 여지는 남겼다. 세옥을 찾은 덕희가 “친한 할머니? 친할머니가 아니고?”라고 묻는다거나 “사회복지사 손잡고 입학”했다고 말한다거나. 그런 장면 속에서 세옥이 지나온 삶을 유추할 수 있게 만들었다.

- 스승과 제자는 서로를 싫어하면서도 서로에게 제일 집착한다. 세옥과 덕희가 둘 다 남자였다면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처럼 보였을 거라는 시청자 반응도 있었는데. (웃음)

어머, 진짜 그럴 수 있겠네! (웃음) 하지만 처음부터 남남으로 생각한 적은 없다. 초반 기획이 <개를 부리는 여자>였으니까!

- 한국 드라마 팬들은 선생과 제자를 다룰 때 정겹고 따뜻한 관계를 선호한다. 그런 점에서 세옥과 덕희의 모습은 그 전형성을 깬다.

요즘 사람들은 과거보다 사제지간에 크게 관심이 없다. 내가 체감하기로 그렇다. 누군가의 스승이 되고 싶어 하지도 않고, 누군가의 문하생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은 그 관계성보다 그들이 얼마나 착취적인 노동환경에 놓여 있는지를 먼저 확인한다. 스승과 제자의 환상이 사라진 느낌이랄까. 사실 선생의 의미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먼저(先) 태어난(生) 사람.’ 먼저 길을 걸어본 사람으로서 제 발자국을 쫓아가도록, 그래서 길가의 돌에 채이지도 웅덩이에 빠지지도 않게 도와주는 사람이다. 이런 관계를 조명하고 싶었던 건 내가 선생과 제자 관계를 좋아해서인 듯하다. 연인이나 가족간의 사랑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반면 사제지간은 그것보다 명분이 덜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사랑이니까. 한번은 동료 작가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OCN에서 스승의 날에 <하이퍼나이프>를 틀어주면 좋겠다고. (웃음) 조금 어긋나 보여도 세옥과 덕희는 훌륭한 사제지간이다.

- 그렇다면 더더욱 궁금해진다. 병원을 떠난 후 6년 동안 덕희는 왜 세옥을 한번도 찾지 않았을까.

세옥이 수술식 복도에서 덕희의 목을 조른 후 덕희의 분노는 상상 초월이었을 거다. “네가 어떻게 나를!!!!!” 하고 느낌표를 백개쯤 붙여도 모자랄 정도로. 결국 재판까지 가서 자신이 받은 상처를 되갚지만 정작 세옥이 짐을 챙겨 나갔을 때 빈방을 바라보며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이다. 본인이 생각해도 어마어마한 일을 해버려서 돌이킬 수 없던 거다. 이때 덕희는 정신도 육체도 크게 꺾인다. 눈에 띄게 늙고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몇년 후엔 뇌에 악성종양까지 생긴다. 스스로에게 시한부 선고를 내리지만 그때에도 차마 세옥이를 찾아볼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런데 불법 수술 동영상을 가진 형사가 찾아왔을 때, 그제야 덕희는 움직인다. 염치없는 마음을 합리화할 핑계가 생겨난 거다. 이때부터 세옥과 덕희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서로 막말을 퍼붓지만 자세히 보면 두 사람은 이 재회에 들떠 있다.

- 세옥이 타인의 말이나 상황에 따라 정직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라면 덕희는 은밀하고 미스터리하게 마음을 감춘다. 마치 퍼즐 조각처럼 한 사람은 툭 튀어나와 있고 다른 사람은 쑥 들어간 느낌이다. 이 둘이 “우린 닮았다”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다르게 무게를 분배한 이유는.

데칼코마니는 그림의 방향이 완전히 똑같이 복제되지 않는다. 중간선을 기준으로 반대 방향으로 그림이 완성된다. 그런 지점을 담아내고 싶었고, 무엇보다 똑같은 사람 둘이 만나면 재미없으니까. (웃음) 극단적으로 같지만 극단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그 둘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맨 처음에 세옥과 덕희를 생각했을 때 성별, 연령, 계급장을 모두 떼고 만날 때 둘이 비등비등해 보이길 바랐다. 만약에 덕희가 세옥의 성격과 같았다면 어땠을까. 이미 나이도 많고 사회적 지위도 높은 그가 성격마저 불같다면 이건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격과 같다. 그래서 둘이 정말 비등하다는 느낌 으로 그려내려 했다. 그게 참 재미있는 포인트 같다. 정신적인 본질만으로 대결할 수 있다는 것이.

- 6화에는 세옥이 자기소개서를 내레이션으로 낭독하는 구간이 있다. 그때 덕희의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이 겹치면서 두 인물은 완전히 포개진다. 이때 세옥은 자신의 정서적 불순물을 모두 거둬내고 난생처음 진심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였다. 작가의 공들임이 그대로 느껴졌는데.

내가 그 장면을 정말 좋아한다. 실제로 여러 버전이 있었다. 덕희와 세옥의 유년 시절이 함께 교차되는 버전, 덕희의 훨씬 더 어린 시절을 조명하는 버전 등등. 원래는 분량도 길었다. 세옥의 성격이 엄청나잖나. 그런데 그것만큼은 세옥이가 진심으로 썼다고 생각했다. 세상 사람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지언정 솔직하게 전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편지를 써내려간 거다. 영상으로 만들어진 이 장면을 보았을 때에도 개인적으로 무척 만족스러웠다. 드라마적 완결성이나 연출도 무척 좋고, 내레이션도 완벽했다. 너무 슬픈 내용인데 슬프지 않은 목소리가 감정을 더 끌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