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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라의 누구의 예술도 아닌 영화] 화가 히치콕 - <현기증>의 회화적 모티브

이나라 경희대학교 프랑스어학과 교수

<현기증>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1958)에서 남자주인공 스코티는 매들린의 회색 정장과 금발, 헤어스타일에 집착한다. 스코티는 사랑에 빠졌던 친구의 아내 매들린이 사고로 사망한 후 매들린을 꼭 닮은 주디를 알게 되고, 주디에게 매들린의 복장과 헤어스타일을 재연하게 한다. 요즘의 시각으로는 데이트 폭력이라고 부를 만한 스코티의 애원과 강요는 금발 머리 여배우에 집착했던 히치콕의 가학적 연출관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현기증>의 원작인 프랑스 소설 <죽은 자들 사이에서>(1954)의 남자주인공도 이미 죽은 여인(매들린)을 닮은 여인(르네)에게 매들린과 같은 복장, 화장, 머리 모양, 태도를 재현하게 한다. 반면 매들린이 자신이 빙의했다고 생각하는 선조 카를로타 발데스의 초상화를 보러 가는 <현기증>의 유명한 미술관 장면은 프랑스 배경의 소설을 샌프란시스코 배경의 영화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추가된 장면이다.

<현기증>의 미술관 장면은 샌프란시스코의 실제 미술관(팰리스 오브 레지온 오브 아너)을 빌려 촬영에 공을 들였다. 뿐만 아니라 히치콕은 같은 미술관 수위에게 영화 속 수위(영화 안에서 수위는 스코티에게 초상화에 대한 정보가 담긴 팸플릿을 전달한다)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그런데 매들린이 넋을 잃고 보는 카를로타 발데스의 초상화는 영화를 위해 새로 그려진 것이다. 히치콕은 세명의 화가에게 영화에 사용할 초상화를 주문했고, 그중에서 사실주의 화풍의 초상화 대신 추상화가 존 페론이 그린 다소 불안한 기색이 담긴 초상화를 택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안젤라 레오나르두치, “폴린부터 카를로타까지. <현기증> 속 초상화를 찾아서”-편집자) <현기증>에서 미술관과 초상화는 음모, 진실의 폭로, 파국으로 치닫는 <현기증>의 서사를 추동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회화적 존재(카를로타 발데스)와 영화적 존재(매들린, 스코티) 사이의 응시와 매혹의 관계를 통해 회화와 영화 사이의 관계를 성찰하게 하는 역할 역시 수행한다. 샌프란시스코의 미술관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 스코티는 샌프란시코 이곳저곳을 헤매며 돌아다니는 매들린을 미행하는 과정에서 이곳 미술관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서 스코티는 미술관에서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는 매들린을 멀찍이서 훔쳐보듯 바라본다. 그는 매들린이 초상화 속 카를로타 발데스와 같은 꽃다발을 들고, 같은 머리 모양, 즉 나선형으로 감아올린 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히치콕이 그처럼 공을 들인 미술관 장면 안에서 스코티는 매들린에게 전적으로 사로잡힌다. 스코티는 시간의 나선, 환상의 나선 속으로 추락하게 될 것이다. 추락한 자가 지푸라기를 부여잡듯 매들린이 남긴 이미지를 부여잡을 것이다.

<네 멋대로 해라>

머리카락, 헤어스타일에 사로잡힌 영화적 인물과 감독은 스코티와 히치콕뿐이 아니다. 2010년 프랑스 국립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갈색/금발>은 헤어스타일을 영화적 모티브로 다룬 전시였다. 헤어스타일이 영화적 모티브라면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피부라는 모티브라면 조금 더 익숙하겠다. 주인공의 피부색은 정치적 해석의 대상이고, 상처 입기 쉬운 피부의 물질성은 시네마틱한 대상이며, 혐오의 감각을 일깨우는 체액이 배어 나오면서 애틋하거나 관능적인 쓰다듬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갈색/금발>도 머리카락의 정치성과 물질성, 시네마틱한 표현의 능력을 강조했다. 장뤼크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속 진 시버그의 커트 머리는 카메라의 트래킹만큼이나 파리와 영화의 모더니티를 표현하지 않았던가? 신체의 일부이면서 사지보다 더 빨리 자라고 사라진다는 점에서 머리카락은 위태로운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미스터리 속 여성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는 영화들,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샹탈 아케르만의 <갇힌 여인>, 미조구치 겐지의 <우게츠 이야기> 같은 영화들이 머리카락의 연출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일 것이다. 금발 머리카락의 수단을 빌리지 않고 찰스 비도르의 <길다> 속 리타 헤이워스는 관능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고, <길다>가 없었다면 <멀홀랜드 드라이브> 속 욕실에서 기억 상실증에 걸린 여성이 리타라는 이름을 떠올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리타 헤이워스와 진 시버그의 블론드 헤어는 분명 영화의 빛과 카메라의 운동 속에서 관객을 매혹시켰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블론드 헤어의 회화적 표현도 관람객의 시선을 붙잡을 줄 알았다. 프랑스 작가 테오필 고티에의 단편소설 <황금 양털>(1839)과 죽은 아내의 복장에 집착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조르주 로덴바흐의 소설 <브뤼주-라-모르트> (1892, Bruges-la-Morte)는 <현기증> 그리고 <현기증>의 원작 소설 <죽은 자들 사이에서>에 큰 영향을 끼친 19세기 소설로 알려져 있다. (트리스탄 그륀베르그, “회화 속으로 들어가기, 스크린에서 솟아나기: 알프레드 히치콕과 다리오 아르젠토 영화 속 흡수와 체현”-편집자) <황금 양털>의 남자주인공은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1612~14) 속 마들렌(성경 인물 막달라 마리아, 영어 이름 매들린의 프랑스어 이름)의 황금빛 머리카락에 사로잡혀 있다. 예수의 시신을 확인하는 장면에 약병을 들고 등장하는 수난 시리즈 속 막달라 마리아의 도상적 전통에 비추어볼 때 금발 머리를 늘어뜨린 루벤스의 막달라 마리아는 소박하고, 세속적이며, 여성스럽다. 고티에의 주인공은 그림 속 마들렌을 닮은 젊은 여성 그레첸을 만나지만, 그레첸이라는 이름이 부르기 어렵다며 마들렌으로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 말하자면 <현기증>과 <황금 양털>에는 모두 마들렌/매들린이라는 이상화된 인물, 금발 머리에 대한 집착이라는 공통 소재가 등장한다. 두 작품의 남자주인공은 모두 피와 살을 가지고 있는 현실 속 여성을 그림, 가상, 유령, 이미지로 환원하려 한다. <황금 양털>과 <현기증>의 주제는 무엇보다 이미지의 사로잡는 힘, 환상적 속성이다.

<현기증> 도입부, 스코티가 매들린을 처음 목격하는 어니스 바에서 히치콕은 고대 로마시대 메달이나 동전에 새겨진 측면화, 인물을 이상화하고 망자의 이미지에 영원성을 부여했던 측면화, 또는 이 양식을 본뜬 르네상스 시대 측면 초상화를 연상케 하는 방식으로 매들린을 묘사했다. 히치콕은 무빙 이미지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영원히’ 되돌아오도록, 영원히 정지되도록 만들 줄 아는 감독이었다. 바로크회화의 거장 루벤스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에서 창백한 예수의 몸과 몸을 부분적으로 감싸는 백색 수의 위로 굴러떨어지듯 생생하게 묘사된 핏방울, 밑으로 축 늘어진 예수의 오른팔과 달리 이제 막 십자가 못질에서 떼어낸 왼팔의 매달린 자세 같은 것을 통해 시간을 감각하게 한다. 히치콕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아니 히치콕과 같은 방식으로 루벤스는 ‘무빙’ 이미지 없이도 회화적 수단을 통해 운동을 표현할 줄 아는 화가였던 셈이다. 영화와 회화는 이렇게 서로를 품고 있다.